267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3)
[바닥을 드러낸 아시아의 홈런왕. 태평양을 건너와 방망이를 손에서 놓아 버린 이유는?]
[역대급 설레발. 투타겸업? No. 최고 96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투수일뿐.]
[기계 차이? 아니면 어딘가에 문제가? 102마일을 던진다던 역대급 신인이 96마일밖에 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구력 난조? 연이은 몸에 맞는 공에 이어 폭투까지.]
한국의 기사들이 좀 오글거릴 만큼 나를 찬양하고 있다면 뉴욕의 기사는 정확하게 그 반대였다. 이것들 아주 인과관계고 뭐고 사실확인도 없이 그냥 일단 던지고 보는 기사 투성이다.
“이거 역시 뉴욕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양키스와 계약 직후 자기들과 인터뷰 따위 없이 곧바로 플로리다로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실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실력을 보이면 다 사그라질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땐 더 경쟁적으로 내가 대단한다고 떠들어대겠지. 트래픽을 먹고 사는 언론이란 원래 그런 족속들이다.
“어, 스완. 감독님한테 좀 가봐.”
경기장에 출근해서 항상 하던 대로 불펜으로 갔는데 배터리 코치가 감독이 나를 찾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짬밥이 안되거나 입지가 불안한 선수라면 여기서 감독이 찾는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감독과 개인적인 만남이란 매우 높은 확률로 마이너로 내려가기 직전의 면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미리 축하해. 이제 시작하겠네.”
배터리 코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투타 겸업.
현재 나는 적응이라는 이름 아래 꾸준히 투수로만 기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이너에서 담금질을 받을 것도 아니고. 결국 당장 이번 시즌에 메이저에서 즉시 전력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처지다. 슬슬 투타 겸업이 시작될만한 타이밍이다.
-똑똑
“최수원입니다.”
“들어와.”
작은 사무실.
조금 피곤한 인상의 제프 클라크 감독이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왜 불렀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으니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할게. 오늘 등판하고, 모레 타자로 출장할 거야. 오늘은 3이닝. 그리고 앞으로 이닝 숫자는 점점 늘려보는 걸로 하자고. 오케이?”
“네.”
“아, 그리고 전력분석팀에서 커브의 비율을 조금 높이는 걸 추천하더군. 내 생각도 비슷하고.”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커브의 비율을 좀 높이는 건 최근들어 고민을 하던 부분이었다. 야구의 모든 구종 가운데 너클볼이라는 좀 개념부터 이상한 공을 제외하고 원피치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공이 바로 커브다.
게다가 커브는 2년 후부터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마이너에서 일부 사용되던 AI심판이 빅리그에 도입되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을 AI가 실시간으로 해서 구심에게 전달하고 구심은 그냥 그거에 맞춰서 크게 외치기만 하는 제도다.
사실 요즘 야구계에 적극적으로 커브를 구사하는 투수가 늘어난 것도 이 AI 심판때문이 좀 크다. 시범적으로 사용한 몇몇 리그에서 정말 놀라운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피팅맵은 2차원이다. 하지만 사실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것은 면이 아닌 공간. 즉 3차원이다.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에 거의 땅에 처박히는 커브볼에 심판은 보통 스트라이크 판정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AI의 판정은 달랐다. 어쨌거나 스트라이크존을 지나는 순간에는 그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지나갔다고 판정한다.
덕분에 영상으로 경기를 보는 이들은 이게 어떻게 스트라이크야? 하는 공들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다. 그건 타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트랜드라는 게 항상 돌고 도는지라 33시즌 이후로는 또 타자들이 커브에 특화되는 경우가 매우 많아지긴 하지만 아무튼 적어도 2, 3년 정도는 달달하게 꿀을 빨 수 있는 구종이 바로 이 커브다.
잠깐 고민하며 걸었더니 어느새 불펜이다.
호세 트레비뇨가 장구류를 착용한 채 나를 맞아줬다.
“왔어?”
“네.”
“감독님은 뭐라셔? 당장 내일부터 타자로 출장하는 거야?”
“아뇨. 내일은 아니고 모레부터요.”
“홈런왕의 타격. 드디어 볼 수 있는 거네.”
“타격 연습하는 거 종종 봤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에이, 그래도 진짜 경기 뛰는 거랑은 또 다르지. 아, 맞다. 근데 그러면 이제 라이브 배팅도 들어가겠네?”
“네, 안 그래도 오늘 바로 라이브 배팅 들어가 보라고 하시던데요.”
타격 훈련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내가 지금까지 하던 타격 훈련이 파트너가 가볍게 올려주는 공을 두들기는 토스 배팅이었다면 라이브 배팅은 실제 경기처럼 투수가 던지는 공을 두들기는 훈련이다.
뭐, 이것도 다 같은 건 아니고 대충 실전 느낌만 내고 실제로는 타자가 치기 쉬운 공만 던져주는 타입도 있고, 스트라이크 존 안에 넣는 조건으로 까다롭게 던지는 타입. 아예 완전히 실전처럼 던지는 타입까지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미리 정하기 나름이다.
“뭐야? 스완. 드디어 라이브 배팅 들어가는 거야? 잘됐네. 그거 내가 도와줄게.”
“어? 로드리게스 오늘 선발 등판 아니야?”
“에이, 도밍고라고 부르라니까. 뭐, 3이닝 던질 예정이기는 한데 어차피 경기 전에 가볍게 몸도 풀어야 하니까. 게다가 기껏해야 시범경기잖아? 코치님 괜찮죠?”
“······. 15개까지만이다.”
“오케이. 그 정도면 충분하죠. 스완 어때? 코치님도 허락하셨는데.”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자신이 라이브 배팅에 공을 던져 주겠노라 제안했다. 무슨 의도인지 좀 빤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메이저 최정상급 투수를 상대로 지금 내가 얼마나 통할지 좀 궁금하긴 했다.
애당초 도밍고 로드리게스라면 회귀 전 전성기의 나라고 해도 KBO 시절처럼 마음 놓고 두들길 수 없는 수준의 투수다. 어쨌거나 이 녀석은 사이 영 컨텐더 급의 투수였으니까.
“뭐, 저야 고맙죠. 그러면 저 잠깐 몸만 좀 풀고 20분 후에 보시죠.”
“오케이.”
지난번에 게릿 콜이랑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나를 옆자리에 두겠다는 걸로 자기들끼리 되지도 않는 서열 싸움을 했을 때 결국 그들은 나에게 ‘선택권’을 쥐어 줬다. 뭐 말이 선택권이지 자기들끼리 정리가 되지 않으니 나에게 맡긴다는 매우 고약한 짓거리였다.
“아, 그러면 전 볼피 옆자리로 할게요. 어차피 경기 자체는 야수로 더 많이 뛸 예정이고. 사실 여기 플로리다에 미리 와서 훈련하는 동안 볼피랑 좀 친해졌거든요.”
그리고 거기서 난 게릿 콜도 도밍고 로드리게스도 아닌 제3자를 선택했다. 나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 이후로도 저 두 사람이 은근슬쩍 나에게 질척거린다는 점이었다.
꼼꼼하게 몸을 풀고 라이브배팅을 위해 운동장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준비를 끝낸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마운드에 서 있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아시아 홈런왕의 실력을 보는 거네.’
‘티배팅만 봐서는 73개나 칠 만큼 막 파워가 엄청난 것 같지는 않았었지?’
‘그래도 토스배팅에서는 정확도가 대단했잖아. 배트 컨트롤이 좋은 거지.’
‘몇 개나 칠 수 있을까?’
‘글쎄. 외야까지 나가는 공이라면 2개?’
‘상대가 도밍고 로드리게스인데?’
‘아무리 상대가 도밍고라고 해도 AA급 리그라고 해도 거의 4할에 홈런만 73개를 친 타자잖아.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리고 그 외에도 정말 많은 선수들과 스탭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있었다. 내가 몸을 푸는 사이 이미 팀 내에 소문이 쫙 돈 모양이었다.
“어떻게? 오래간만의 라이브 배팅인데. 좀 치기 쉽게 던져줄까?”
“그럴 거면 로드리게스 씨한테 부탁한 보람이 없죠. 존 밖으로 빼지만 말고 최대한 까다롭게 부탁할게요.”
“거, 참. 도밍고라고 부르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오케이. 알았어. 봐주는 건 없이. 존 안쪽으로.”
타석에 들어서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마운드의 투수는 도밍고 로드리게스.
24시즌의 사이영 위너이자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도 리그 최고에 가장 가까운 남자 중 하나다.
과거 그가 사이영 상을 받았던 24시즌.
언론에서는 도밍고 로드리게스를 ‘거울에 비친 페드로 마르티네스’라고 평가했었다. 뭐 약간의 과장이 더해졌다고는 해도 무려 페드로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언급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기량을 짐작할 수 있다.
레파토리는 최고 99마일의 속구와 세 종류의 커브. 쓸만한 슬라이더와 꽤 괜찮은 커터. 그리고 결정구로 써먹는 체인지업이다. 좌완 선발 주제에 시즌 평속이 95마일이 넘어가는 것도 사기인데 피칭 레파토리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뭐, 현역 최고 수준의 투수 소리 들으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겠지.
부드러운 와인드업.
글러브에 감춰있던 손이 머리 뒤에서 순식간에 뽑혀 나왔다. 물 흐르는듯한 폼 속에서 홀로 프레임을 잘라낸 것 같은 기묘한 움직임. 타석에서 보니 더욱더 기가 막힌 디셉션이다.
벼락처럼 날아드는 빠른 공.
공이 그의 손을 떠나는 타이밍을 살짝 놓쳤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건 ‘존을 벗어나지 않는 속구’다.
도밍고 로드리게스는 분명 사이 영을 수상한 리그 최고의 투수다.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MVP는 타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2034년부터 2042년까지. 9년을 통으로 놓고 봤을 때 나는 가장 강력한 ‘타자’였다.
-딱!!!
나의 방망이가 그의 속구를 두들겼다.
빠르게 날아가는 타구.
“미친?”
우리를 지켜보던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마운드에 서 있던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얼굴에도 당황이 역력했다.
그리고 쭉쭉 뻗어나간 타구가 좌측 담장을 두들겼다.
‘역시······.’
약간의 아쉬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120kg에 달하던 나였다면 아마 지금, 이 타구는 담장을 넘어갔을 거다. 지금 내 체중은 100kg. 딱 20kg만큼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최대한 집중해서 그의 피칭을 따라갔다.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폼 사이에 프레임이 잘린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또 속구였다.
하지만 타이밍이 달랐다.
분명 같은 폼이었는데 구속과 타이밍의 차이가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딱!!!
아, 물론 못 쳤다는 말은 아니다. 좌측 담장 대신 우측으로 향한 타구가 파울 라인 안쪽으로 떨어졌다. 리그 평균 이상의 외야수가 있었더라면 단타. 만약 수비 시프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팀이라면 올스타급 외야수가 있었더라도 얄짤없이 2루타다.
라이브 배팅이 이어졌다.
도밍고 로드리게스는 세 번째도 변화구를 던지지 않았다. 아마 어쩌면 그건 그 나름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딱!!!
그래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두들겨줬다.
아무리 생소한 폼과 타이밍 조절이라고 해도 ‘존에 무조건 들어오는 속구’를 세 개 연속으로 던지는데 이걸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서야 ‘21세기 가장 많은 MVP 2위를 달성한 남자’라는 타이틀이 부끄럽다. 아니, 사실 그런 거 아니더라도 저 타이틀은 좀 수치스럽긴 하다. 2위를 가장 많이 달성한 남자라니······.
쭉쭉 뻗어나간 타구가 깔끔하게 좌측 담장을 넘어갔다.
안타 두 개에 시끄럽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마운드의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웃었다.
“와······. 이거 안 되겠네.”
그리고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화날 때 웃는 타입이라는 것을 그 웃음 같지 않은 웃음로 알 수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우리 팀의 에이스가 네 번째 공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