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2)
‘아, 그러고 보니 하퍼가 이맘때쯤에는 필리스에서 뛰고 있었겠구나.’
21세기 초반의 대약물 시대는 05년 호세 칸세코의 자서전에서 시작하여 야구계 최고의 영웅이었던 마크 맥과이어가 의회 청문회에서 비겁한 눈물을 흘리는 것을 기점으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타고투저의 화끈했던 메이저리그는 어느새 투고타저의 리그로 변했다. 그렇기에 야구의 가장 큰 재미가 ‘화끈한 홈런’에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약물이 아닌 본인의 힘으로 이 지루한 시기를 끝내줄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을 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혜성처럼 나타난 ‘선택받은 자’ 브라이스 하퍼는 그들이 기대하던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남자였다.
100미터를 11초 대에 달리는 압도적인 운동능력.
최고 96마일을 던지는 강한 어깨
무엇보다 16세의 나이에 이미 173미터짜리 대형 홈런을 쳐내는 장타력까지.
당시 브라이스 하퍼는 단순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수준을 넘어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를 노릴만한 재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야구계를 넘어 미국의 스포츠계 전체를 뒤흔들었던 유망주였다.
‘르브론 제임스는 마이클 조던의 아성에 도전할 ‘자격’을 갖춘 유일한 선수이며 브라이스 하퍼는 야구계의 르브론 제임스라고 볼 수 있다. 오직 그만이 ‘야구의 신’ 베이브 루스의 아성에 도전할 자격이 있다.’
이게 불과 20년쯤 전에 브라이스 하퍼가 받았던 평가였다. 물론 서른다섯이 된 지금은 아마 하퍼 본인도 저런 과장된 평가는 조금 민망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분명 브라이스 하퍼는 명예의 전당에 어울리는 실적을 쌓아 올린 대단한 선수였지만 35세가 된 지금까지도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야구의 신’에 필적할만한 성과는커녕 그 절반도 채 되지 못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뭐, 실제로도 내가 기억하는 42세의 브라이스 하퍼는 그런 평가를 좀 민망하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사실 나는 브라이스 하퍼와 제법 친밀한 관계였다. 당연히 선수 대 선수의 관계는 아니었다. 브라이스 하퍼는 92년생으로 나보다 무려 16살이나 연상이다. 내가 빅리그에 진출했던 2034년에는 이미 41세로 필리스와의 12년짜리 장기 계약을 끝내고 추가로 2년짜리 연장 계약까지 소화한 이후였다.
브라이스 하퍼와의 인연은 내 메이저 데뷔 시즌이었던 2034년 겨울의 어느 토크쇼에서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나의 타격폼은 브라이스 하퍼의 초창기 그것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뭐, 실제로 당시 타격폼을 만들 때 브라이스 하퍼의 폼을 많이 참고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간 그러한 이유로 토크쇼에서는 이미 은퇴했던 하퍼를 깜짝 게스트로 초대했고 거기서 나는 제법 쓸만한 조언들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브라이스 하퍼가 이래저래 동시기의 다른 전설들에 비하여 좀 안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이긴 했지만, 아무튼 나보다 17년이나 더 먼저 프로 생활을 했던 선수였다. 당시 그는 타격에 있어서 내가 지나왔던 길을 한발 먼저 지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인연은 이후로도 이어져서 그 이후로도 오프 시즌에 종종 만나서 타격 지도를 받았다. 심지어 나중에는 반대로 그 아들인 크레스 하퍼에게 내가 타격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오스왈드 웰트에 이어 뭔가 익숙한 얼굴을 또 만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생겼다. 아니, 말그대로 안면 정도만 있던 오스왈드 웰트에 비해 진짜로 친하던 사람인지라 그 반가운 마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하지만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승부는 승부다
.
타석에 선 브라이스 하퍼가 익숙하지만 동시에 생소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애초에 내가 처음 본 하퍼는 이미 40대였고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50대 중반이었으니 그에 비하자면 진짜 뽀송뽀송하게 느껴질 정도다.
초구.
바깥쪽 낮은 코스 빠른 공.
반쯤 따라 나오던 브라이스 하퍼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뻐엉!!!
“스트라잌!!!”
절묘한 코스였다.
브라이스 하퍼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헬멧을 고쳐 썼다. 그리고 다시 타석에 들어왔는데 뭐랄까? 그래, 포스가 달라졌다.
-넘겨버리겠다.
온몸으로 발산하는 압도적인 감정과 의지.
솔직히 조금 놀랐다.
내가 알고 있던 브라이스 하퍼는 훌륭한 코치이자 좋은 아버지였으며 신실한 종교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저 남자는 흡사 야수와 같았다.
고작 스프링 트레이닝 첫 경기. 아직 메이저에 데뷔조차 하지 못한 투수를 상대로 저런 강렬한 감정의 발산이라니. 나의 공을 받아 줄 포수 놈은 하퍼의 뒷모습만으로도 기세에 눌린 것이 내 눈에 보일 지경이다.
‘바깥으로 하나 더 빼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금 어색한 손길로 양키스의 사인에 맞춰 나의 의사를 전달했다.
‘커브.’
포수의 얼굴에 살짝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 새끼 이거. 아까 연습 때 커브 하나 놓치더니 실전에서 받는 건 부담스럽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두 번째 공을 커브로 결정했다.
두 번째.
높은 코스에서 뚝 떨어지는 맹렬한 탑 스핀의 커브볼.
사실 빅리그의 공인구에 적응하면서 속구보다 훨씬 적응하기 어려웠던 공이 바로 이 커브였다.
뭐, 커브에 관한 매우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내가 동호대의 박광식 코치님께 배운 이론은 NPA쪽 방법론인데 사실 이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여기서 커브는 꽉 쥐고 있던 공이 위로 뽑혀 나오게 만들어 강력한 탑스핀을 만들어내는 것이 요령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부분은 빅리그 공인구가 KBO 공인구에 비해 워낙에 미끄럽다는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악력으로는 충분한 스핀이 안 먹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내가 익혔던 낙폭에 대한 감각 자체가 엉망이 돼버렸다.
브라이스 하퍼의 방망이가 나의 커브볼을 쫓았다.
높은 코스에서 시작해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거의 바닥에 찍을 기세로 떨어지는 커브볼이다. 당연히 하퍼의 자세는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자세에서도 그의 방망이가 내 커브를 꾸역꾸역 건드렸다.
-딱!!
하지만 딱 거기까지.
타구가 파울라인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볼카운트 0-2.
‘카운트도 좋은데 바깥 쪽으로 하나 빼보자.’
세 번째.
아까 전부터 바깥으로 빼자는 말만 주야장천으로 하는 포수 놈에게 또 한 차례 고개를 저었다.
‘커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커브.’
‘날 한 번 믿어봐. 너 오늘 속구 진짜 죽여주더라.’
‘커브.’
‘아니, 타자가 브라이스 하퍼잖아. 같은 공을 두 개 연속 보여주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하나 바깥으로 빼자고. 초구 좋았잖아.’
‘커브.’
보통 투수와 포수가 싸우면 10중 8, 9 투수가 이긴다.
투수를 이겨 먹는 포수는 진짜 드물다. 같은 커리어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고 정말 압도적인 커리어의 포수가 신인이나 비교적 유순한 투수들을 상대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 내 공을 받는 조쉬인지, 허쉬인지 하여간 저 녀석은 압도적인 커리어의 포수가 아니었고 나 역시 그렇게 유순한 투수는 아니었으니 결과는 뻔했다.
‘그래, 커브 하나 더 가자.’
치겠다는 의사가 명백한 타자만큼 공략하기 쉬운 타자도 없다. 유인구에 방망이가 붕붕 돌아가는데 애초에 좋은 공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던져 봐라. 넘겨 줄테니까.
그리고 타석의 브라이스 하퍼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아주 강렬하게 전달했다.
세 번째.
커브.
브라이스 하퍼의 몸이 움직였다.
추측하기로 그의 현재 기량은 회귀하기 전 34세 시즌의 나에게 버금간다. 그러니 아마도 지금 내가 던진 공이 커브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어떻게든 쳐서 넘겨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공을 살피고 방망이를 멈춰 세운다.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MVP 컨텐더급 타자가 보여주는 기량다웠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하프 스윙?
아니다. 그럴 리가. 하퍼의 방망이는 돌지 않았다. 체크 스윙이다.
분명 지난겨울 메이저리그 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커브를 다시 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나는 더 미끄러운 공을 더 단단히 붙잡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단단히 잡았느냐에 따라서 더 떨어지고, 덜 떨어지는 공의 낙폭을 몸에 다시 새겨 넣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손에서 더 쉽게 빠지는 공이 ‘커브’라는 공을 던지기에는 뭔가 더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어쩌면 내가 NPA이론에 따라 커브를 구사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KBO의 공인구를 사용할 때면 속구와 같은 속도로 팔의 스윙을 주면서 손에서 공이 뽑혀나가도록 하는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시즌을 치르던 중간중간에는 NPA 이론과 달리 팔목에 약간의 회전을 더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미끄러운 MLB의 공인구는 단순히 그렇게 스윙하는 것만으로도 손에서 공이 쑥 뽑혀 나가는 것을 가능케 했다.
중요한 것은 공을 움켜쥔 중지의 단단한 악력과 회전수를 조절하는 검지의 접지면적.
나의 두 번째 커브.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커브가 브라이스 하퍼에게 삼진을 뽑아냈다.
메이저 최정상급 타자를 상대로 삼구삼진.
타석의 브라이스 하퍼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경기가 계속됐다.
나는 커브 위주의 피칭을 가져갔고 결과는 2이닝 3탈삼진 1폭투 무실점. 그래, 애쉬인지 허쉬인지 하여간 그 비슷한 포수 새끼. 결국 공 하나를 놓쳤다.
하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비록 커브를 제대로 못 받는 포수와 함께했지만, 그는 주전 포수도 두 번째 옵션도 아닌 아마 시즌 내내 볼 일이 없을 세 번째 옵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여기는 주전 포수가 내 커브를 못 받던 마린스가 아닌 무려 플래티넘 글러브를 두 개나 수상한 호세 트레비뇨가 주전 포수로 있는 양키스다.
그레이프푸르트 리그.
원정 첫 번째 경기.
이 경기에서 브라이스 하퍼는 3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우리는 15:3으로 깔끔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쨌거나 오늘 경기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경기였고 그들은 주전급 선수를 대량으로 내보냈지만 우리는 주전급 선수라고 할만한 녀석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 아무튼 괜찮았다.
[선발 출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사인펜을 놓지 못하는 최수원 선수]
[메이저리그의 투수 최수원 압도적 데뷔!! 그 브라이스 하퍼를 상대로 삼구삼진!!]
[메이저리그 MVP 3관왕 브라이스 하퍼!! 최수원의 커브볼에 무릎 꿇다.]
[한층 더 성숙해진 최수원의 피칭!! 메이저리그의 베테랑을 침묵시키다!!]
그렇게 첫 번째 원정이 끝난 날.
양키스의 클럽하우스 라커룸에서 3명의 선수가 짐을 뺐다.
본격적인 스프링캠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