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65화 (265/305)

265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1)

그레이프푸르트 리그.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이 스프링 트레이닝 리그는 약 한 달의 기간에 걸쳐서 진행이 된다. 올해 양키스의 경우 30일 동안 31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경기를 치르는 기간보다 경기 숫자가 더 많은 이유는 중간중간 홈과 원정 경기를 같은 날에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대형 버스.

마이너에서 타던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버스였다.

오스왈드 웰스가 길게 날숨을 내쉬었다.

“후우······.”

“긴장한거야?”

“어, 어?”

그의 옆자리.

눈을 감고 있던 최수원이 말을 걸어왔다.

“미안, 내가 잠자는 데 방해한 거야?”

“뭐, 딱히. 그렇게 걱정하는 얼굴 안 해도 괜찮아. 한숨 좀 쉬었다고 설마 빈볼이라도 던지겠어?”

한국에서 온 투타 겸업의 선수로 유명한 이 녀석은 지난 청백전을 통하여 조금 순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자신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켰다.

총 3.2이닝 동안 2자책.

숫자만 보면 그리 인상적인 기록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피칭의 내용이었다. 녀석은 무려 세 명의 타자에게 96마일짜리 속구를 꽂아 넣었다.

“······.”

“농담이야. 농담.”

특히 대단했던 부분은 세 번째 빈볼이었다. 앞선 타자들에게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여 만루가 된 상황이었다. 다들 문제의 ‘세 번째’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타자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빈볼을 던질까? 라고 생각했었다.

-뻐억!~!

그 찰진 타격음이 아직도 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메이저 스프링 트레이닝은 처음?”

“어, 작년까지는 마이너리그 단지에 있었지. 올해가 처음이야.”

“긴장이 역력한 게 그런 것 같더라니.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 마. 공 받는 거 보니까 제법 잘 받더만.”

“아, 그래? 고마워.”

올해 23살.

메이저를 못 밟아보는 것은 보통이겠지만 메이저 스프링 트레이닝 자체가 처음인 건 명백히 보통 이하였다.

“아니,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사실 난 제법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 솔직히 드래프트가 된 것부터가 행운이었고. 이렇게 꾸역꾸역 빅리그 스프링 트레이닝까지 밟은 것도······.”

오스왈드 웰스가 자신의 주근깨 가득한 콧등을 타고 내려가는 안경을 치켜 올렸다.

“아, 미안. 오늘 선발인데 생각 없이 내가 자꾸 말을 걸었네.”

“아냐. 어차피 그런 거 예민한 타입도 아니고. 게다가 스프링 트레이닝에 선발은 무슨······. 심지어 원정인데. 그냥 가서 먼저 잠깐 던지고 쉬는 투수인거지.”

역시 입지가 다르고 실력이 다르기 때문일까?

분명 최수원 역시 스프링 트레이닝은 처음일텐데 이상하리만큼 여유롭다. 오스왈드 웰스는 그 여유에서 문득 자신의 친구가 떠올랐다.

본래 양키스의 1라운드였지만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야구를 그만둔 그 친구는 어떻게 보면 오스왈드 웰스가 아직까지 이를 악물고 야구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평생동안 흑백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는 자신의 인생이 흑백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영화나 만화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눈부신 무언가가 현실에 존재하리라 상상하지 못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러하다. 평생을 살아가며 그런 순간을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스왈드 웰스 역시 그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했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재능으로 스스로 빛나던 그 녀석은 오스왈드 웰스를 비롯한 미드웨이 고등학교 야구부 전원의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마지막은 드래프트에서였다.

MLB의 드래프트는 총 20라운드.

한때 40라운드까지 있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의 숫자는 고작 26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 20라운드만 하더라도 충분히 많은 숫자였다.

그렇기에 하위픽의 경우는 ‘인맥’으로 적당히 뽑아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독의 아들이라거나 코치의 조카라거나. 혹은 당해 1라운드 선수가 3년 내내 함께 했던 어떤 포수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단하네.”

“그렇지? 정말 대단했어. 천하의 양키스가 드래프티 하나를 위해서 하위픽에다가 낙하산을 꽂아 주게 만들다니.”

“아니, 그거 말고. 너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네가 17라운드였다는 거잖아.”

***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

너무 뻔한 이 말이 이 바닥에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야구라는 것이 그만큼이나 ‘재능’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은 ‘노력’의 영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빠른 공을 작은 방망이로 정확하게 쳐내는 것 역시 ‘노력’의 영역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일정 부분까지는 ‘훈련’으로 가능하다.

그렇기에 리그 수준이 AA정도라는 KBO에서는 종종 드래프트 하위 라운드나 신고선수 출신의 프로가 탄생하는 거다.

하지만 빅리그의 영역은 다르다.

하위라운드의 성공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성공은 정말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희귀한 일이었으며 성공을 떠나서 메이저리그 데뷔 자체만 따져보더라도 6라운드 이하에서 메이저에 데뷔하는 것은 확률적으로 정말 극악한 수준이다.

그래서 놀랐다.

‘응?’

일단 인상이 많이 달랐다. 몸도 너무 둥글둥글했고 거기에 안경까지 써서 순둥순둥함이 너무 강조됐다. 무엇보다 이 녀석 내가 기억하기로는 양키스의 선수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양키스에서 데뷔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오스왈드 웰스.

지난 1988년 62라운드 전체 1390번으로 데뷔했던 마이크 피아자 이후로 가장 성공적인 하위 드래프티.

나랑 같은 팀에서 뛴 적은 없었지만 워낙에 이색적인 이력을 가졌던 터라 가끔씩 이름도 듣고 한 번은 잡지 촬영도 같이 한 적이 있던 녀석이었다.

당시에 녀석은 꽤 단단하고 완고해서 마치 차돌과 같은 인상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솜사탕 같다는 느낌이다.

“아, 도착했다. 그러면 오늘 열심히 하고. 이따 보자.”

스프링 트레이닝의 경우 보통 짬밥 되는 선수들은 홈에서 뛰고 입지가 좀 불안한 선수들은 원정을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내 입지를 생각해보면 홈에서 시작하는 게 당연했지만 뭐랄까?

“스완, 후······. 모레 필리스랑 경기 등판이다. 짐 챙겨 놓도록.”

“네.”

그래, 이건 밀어내기 빈볼에 대한 일종의 ‘벌’이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버스는 한국에 비해서 좀 좁고 불편하긴 했지만 그것도 애초에 KBO의 버스가 너무 좋은 탓이다. 이 정도면 거의 메이저리그 수준에 가까운 버스였다. 게다가 원정 거리도 1시간 20분으로 비교적 짧았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까지 있었다.

“저기 최수원이다.”

“야, 빨리 카메라 챙겨.”

언제나처럼 많은 기자들이 나에게 달려왔다. 그 덕분에 경기장을 미리 찾은 몇몇 팬들의 시선 역시 나에게 쏠렸다. 여기 브라이트 하우스 필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홈구장이긴 했지만 아마 오늘 경기장을 찾은 팬들 가운데 대부분은 양키스 팬일 것이다.

실제로 기자들 뒤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양키스의 줄무늬 저지를 입고 있었다.

“최수원 선수. 오늘 양키스의 첫 번째 시범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시게 됐는데요.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최수원 선수!! 청백전부터 해서 꾸준히 투수로만 기용이 되고 있는데 혹시 타자로는 언제 경기를 소화하실 예정인가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역시나 대부분이 함량 미달이었다.

“일단 첫 번째 시범 경기이긴 하지만 원정이라서 첫 번째로 던지는 것도 큰 의미는 없고요. 그래도 청백전이 아닌 미국에 와서 양키스 소속으로 치르는 다른 팀과의 첫 번째 경기인 만큼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구단에서는 타자로써의 기량을 시험하기보다는 투수로써의 기량을 시험해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미 거기에는 몇몇 선수들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는데 40대 초반쯤 됐을까? 나에게 손을 내미는 팬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어? 이거 유니폼은 어떻게 벌써 맞추신 거예요? 아직 시즌 시작도 안 했는데?”

“하하, 얼마 전에 뉴욕 갔다 올 일이 있어서 아들이랑 같이 맞췄습니다.”

“아, 원래 양키스 팬이셨어요?”

“아뇨. 원래는 다저스 팬이었는데 이번 시즌부터 양키스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최수원 선수 파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 정성이면 나의 미국 1호, 2호 사인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무릎을 꿇고 아이의 등에 먼저 사인을 하나 해주고 그 아저씨의 등에도 사인했다.

그 외에도 나에게 공을 내미는 이들 몇몇에게 사인을 해줬는데 YES 네트워크의 방송 덕분인지, 아니면 원정 경기였던 탓에 이름값 있는 선수들이 거의 안온 덕분인지 대부분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오는 바람에 모두에게 사인을 해주지는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선발이라서.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아이들에게는 다 사인을 해주긴 했다.

버스를 타고 오느라 굳은 몸을 완벽하게 풀어주고 몇 차례 공을 던졌다.

-뻐엉!!

평소에 항상 공을 받아 주던 호세 트레비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거라 그런지 제법 공을 받는 것이 나쁘지 않았······.

-뻐억

아······. 좀 나빴다.

그렇게 많이 빠지는 커브가 아니었는데 받아내질 못했다. 내가 알기론 팀의 두 번째 옵션은 아니고 세 번째 옵션 정도 되는 포수였는데 최근 액티브 로스터에 야수를 13명만 쓰는지라 백업 포수도 딱 한 명만 쓰는 걸 생각할 때 26인 명단에 들어오기는 힘든 포수다.

1회 초.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마운드에 앤드류 페인터가 올라왔다. 2021년의 1라운드 전체 13번으로 390만 달러를 받고 입단했던 03년생. 올해로 빅리그 5년 차의 우완투수로 사이영 컨텐더급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에이스라는 칭호 정도는 충분히 붙일만한 투수다..

작년 성적은 31경기 189.1이닝 ERA 3.14.

-뻐엉!!

“스트라잌!!”

브라이트 하우스 필드의 전광판에는 구속이 표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확한 구속을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느껴지기에 93마일 정도? 요즘 평속 98마일 99마일짜리 우완 선발이 점점 늘어나는 걸 고려하면 빠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2월 말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속이었다.

양키스의 타자들이 방망이를 붕붕 돌려댔다.

뭔가 한 번 보여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아, 물론 당연히 그 강한 의지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렇게 대놓고 붕붕 돌려대는 타자들이라면 투수 입장에서는 오히려 요리하기가 쉬운 법이다.

뭐,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40인도 간당간당한 타자들 상대로 나름 에이스급 투수가 이 정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필리스의 에이스가 1회 초 양키스의 공격을 삼진 1개 포함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막아냈다.

그리고 1회 말.

나의 차례.

첫 번째 타석부터 너무 유명한 남자가 올라왔다.

브라이스 하퍼.

지금 당장 은퇴한다고 해도 명예의 전당에 자기 얼굴을 새겨넣을 것이 확실한 빅네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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