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64화 (264/305)

264화. 초구는 원래(2)

그리고 호세 트레비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이거······.’

노골적이다.

너무 명백하게 노골적이다.

호세 트레비뇨 짬밥 정도 되면 공을 던지는 투수가 빈볼을 일부러 던진 건지 실수인지를 얼추 알아볼 수 있다. 심지어 정황까지 너무 확실하다. 지금 타석에 섰던 태너 고든의 경우 오전에 클럽하우스 라커룸에서 최수원이 이름을 물었던 녀석 중 하나다. 뭐 평소에도 언행이 좋지 않던 녀석이니 만만하게 보고 시비라도 걸었겠지.

엉덩이를 잡고 쓰러졌던 태너 고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당장에라도 자신의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마운드의 투수에게도 똑같게 전달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해 보인다.

“쏘리.”

하지만 놀랍게도 마운드의 최수원이 고개를 까딱하며 ‘사과’를 했다.

이게 왜 놀라운 일인가하면 기본적으로 빈볼은 야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호세 트레비뇨는 이 태너 고든이라는 녀석이 빈볼을 맞을 만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오늘 투수로 마운드에 오를 녀석에게 그런 섣부른 도발을 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야구는 왜 신사의 스포츠인가.

간단하다.

마운드의 투수가 언제든지 방망이를 쥔 타자의 머리통을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코난 더 바바리안이 말하지 않았던가.

문명인이 무례한 이유는 무례한 말을 해도 도끼에 대가리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렇기에 야구는 신사의 스포츠여야 만했다.

투수의 강속구에 대가리가 터지기 싫다면 말이다.

그리고 대가리 대신 엉덩이가 터진 태너 고든은 감히 마운드로 달려 나가지 못했다. 최수원의 사과도 사과였지만 애당초 태너 고든이라는 인간의 성정 자체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달려 나간다고?

투수가 사과까지 한 마당에 과연 그를 따라서 마운드로 달려 나가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식 경기라면 벤치클리어링에 합류하지 않는 것에 강제 패널티가 부여되지만 이건 정식 경기가 아니다.

게다가 만약 정말로 지금 자신의 엉덩이를 때린 공이 머리를 향한다면?

태너 고든이 얌전하게 1루로 향했다.

호세 트레비뇨가 마운드를 응시했다.

‘그래, 굳이 라커룸에서 말싸움을 하는 것보다 설사 1사 1, 3루의 상황이라도 과감하게 빈볼을 던지는 것이 취향이라니. 스완 네가 보기보다 더 터프한 녀석이라는 건 이 빈볼 하나로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최수원은 본인이 있던 리그에서 슈퍼 스타였다.

하지만 그것이 빅리그에서까지 이어질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물론 그의 타격은 빅리그에서도 어느 정도는 통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투타겸업이라는 희귀한 자원임을 고려한다면 26인 액티브 로스터의 한 자리 정도는 보장될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추정하기를 5년을 더 KBO에서 뛰고 온다면 최소 1억 5천만 달러. 어쩌면 2억 달러 이상의 소득을 벌 수 있었을 이 남자가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최소한 선발의 한 자리. 그리고 그것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번 캠프에서 최소한의 모습은 보여줄 필요가 있으리라.

1사에 만루.

마운드의 최수원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호세 트레비뇨는 그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부디 녀석이 보여줄 피칭도 저 표정에 어울리는 것이었으면 좋겠노라고.

***

지난 겨울 나는 무지막지하게 몸을 키웠다.

사실 이건 굉장한 모험이었다. 물론 타자로써 나는 120kg까지 증량해도 괜찮은 프레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투수로써는 어떨까?

-뻐엉!!

“스트라잌!!”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100kg까지의 증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지옥같은 유연성 훈련과 함께 했다고는 하지만 몸의 가동범위 자체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상체에 근육이 찌면 팔의 가동범위 자체가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는 걸 고려했을 때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타석의 타자가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7번 타자.

KBO 시절이라면 쉬어가는 타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름도 잘 모르겠는 저 7번 타자가 KBO에 오는 타자 용병들보다 수준이 더 높다.

그러니 방심하지 않았다.

두 번째.

뚝 떨어지는 커브.

KBO에서 제법 쏠쏠하게 써먹었던 공이다. 또한 내가 가진 변화구들 가운데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공이기도 했다.

-부웅!!

“스트라잌!!”

2구 연속 스트라이크.

세 번째와 네 번째 유인구.

타자가 하나는 그냥 흘려보냈고 또 하나는 건드려서 파울로 만들었다.

볼카운트 1-2.

다섯 번째.

또 한 번 크게 떨어지는 커브.

높은 코스에서 크게 떨어지는 공으로 앞선 세 번째 네 번째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스윙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구였다.

-딱!!

흐트러진 자세.

타자의 방망이가 나의 커브를 두들겼다.

완벽하게 무너진 자세였으니 당연히 방망이에 제대로 힘이 실렸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과연 메이저리그라는 것일까?

그렇게 무너지는 자세에서도 끝까지 돌아간 방망이가 타구를 날려보냈다.

“저 친구 꽤 괜찮은데?”

“펠릭스 로사리오. 이번에 마이너 FA로 새로 계약한 친구입니다.”

“아, 그 화이트삭스에서 지명 할당 됐다던 그 친구?”

“네, 타격 밸런스는 상당히 괜찮은데 기복이 있고 장타력이 좀 약한 편입니다. 게다가 수비도 1루 정도만 가능한지라······.”

하지만 타석의 타자가 메이저리거였던 것처럼 내 등 뒤를 지키는 야수들도 메이저리거였다. 비록 투수들 간의 케미스트리가 개판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수비만큼은 마린스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2루수가 제법 빠른 타구를 깔끔하게 잡아냈다.

유격수 역시 어버버 하는 일 없이 빠르게 2루로 커버를 왔다.

4-6-3 더블플레이.

1사 만루의 위기가 단 1점의 실점도 없이 매우 깔끔하게 끝이 났다.

나올 때는 불펜에서 나왔지만 돌아가는 것은 덕아웃이었다.

원래 2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덕아웃이 아주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안타를 미친 듯이 처맞은 게릿 콜은 보이지 않았다.

“게릿? 먼저 씻고 집에 들어갔겠지. 아니면 안 씻고 바로 집으로 갔거나.”

그래, 이게 메이저리그지.

코치가 2회에도 조금만 더 던질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네, 얼마든지요.”

타자 두 명.

그것도 하나는 초구 몸에 맞는 공으로 끝냈던지라 아직 몸이 좀 근질근질했던 차에 좋은 제안이었다.

타자로서의 나는 이미 완성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투수로서는 아니다. 이런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2회에도 4명의 타자를 상대로 실점 없이 1피안타 1탈삼진.

투수가 타자에 비해서 몸이 늦게 풀리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

라커룸으로 향하는 복도.

출입 허가를 받은 기자들이 나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최수원 선수. 오늘 청백전에서 1.2이닝 동안 피안타 한 개. 무실점으로 굉장히 훌륭하게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타격 기회는 받지를 못했는데요 아쉽지는 않습니까? 고국에 있는 팬분들게 한 마디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원래도 나에게는 한국 기자들이 많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오늘 첫 청백전이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많은 느낌이다.

“준비했던 피칭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몸이 더 풀리면 더 괜찮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은 감독님과 이미 이야기가 된 부분입니다. 투타 겸업의 루틴은 천천히 적응을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적당히 답을 해주는 사이 호세 트레비뇨가 라커룸 쪽으로 걸어왔다.

“오늘 끝?”

“어. 나도 오늘은 이제 퇴근. 그나저나 역시 스타네. 기자가 대체 몇 명인 거야? 뉴욕도 아니고 이제 청백전 하나 했는데.”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하던 기자들 가운데 몇몇이 호세 트레비뇨를 알아봤다.

“호세 트레비뇨 선수잖아.”

“호세 트레비뇨? 그게 누구야?”

“왜 있잖아. 그 양키스 주전 포수.”

“아!! 그 수비 잘한다던?”

아니, 솔직히 나를 인터뷰 하러 왔는데 호세 트레비뇨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좀 한심하긴 했는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메이저리그를 보는 기자가 대체 몇이나 되겠으며 심지어 야구 규칙이라도 제대로 아는 이가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기자들이 우르르 호세 트레비뇨에게 다가가 쓸데없는 질문을 날렸다.

다행히 두유노 시리즈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골드 글러브 세 개에 플래티넘 글러브 두 개나 받은 포수한테 물어볼만한 질문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세는 싫어하는 티 하나 내지 않고 그들의 질문에 매우 친절하게 답을 해줬다. 역시 제대로 교육받은 베테랑 메이저리거다웠다.

“스완, 맛사지 받고 바로 집에 갈거야?”

“그래야죠.”

“그러면 가는 길에 밥이나 같이 먹을까? 내가 근처에 맛있는 햄버거 가게 하나 아는데.”

“사는 겁니까?”

“내가 인터뷰로 이만큼이나 떠들었으면 네가 사는 게 도리 아닐까?”

“오케이. 인정. 오늘은 제가 사죠.”

***

“너희 나라에서 인기가 대단하긴 대단한가봐?”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야구거든요. 그리고 전 한국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선수고요.”

“아, 그래? 한국도 일본처럼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야구구나.”

“네, 일본처럼 야구 인기가 축구를 완전히 압도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죠.”

내가 미국식 햄버거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아서 그런가? 햄버거는 호세의 장담과 달리 그리 맛이 있지는 않았다. 수제버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패티가 굉장히 잘 구워졌다고 좋아하겠지만 아무래도 난 햄버거는 역시 소스가 맛있어야 한다는 쪽이다.

“오늘 빈볼 그거 일부러 던진거지?”

“티 났나요?”

“어, 오늘 야구 처음 보는 볼보이도 그게 일부러 던진 빈볼인 거 알 수 있을만큼 티 많이 났지.”

“다행이네요. 티 안 났을까 봐 걱정했는데.”

“······. 라커룸 자리 볼피 옆으로 옮긴 것도 일부러 그런 거야?”

“그것도 티 났어요?”

“그것도 티 안 났을까 봐 걱정했어?”

호세의 질문에 다이어트 콜라를 한 모금 쭉 빨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어?”

“그냥 로드리게스도 그렇고. 콜도 그렇고. 자기들 파워 게임 하는 데 저를 말처럼 써먹는 게 너무 같잖아서요. 그리고 그 얼간이 삼 형제는 저한테 선택의 여지를 안 줬잖아요.”

“선택의 여지?”

“사실 별 감정은 없어요. 뒷담이야 뭐 그럴 수 있죠. 질투심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저한테 시비를 걸었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제 꼴이 너무 우스워지잖아요. 이런 건 조기에 미리미리 진압을 해둬야 괜히 나중에 더 큰 사건이 안 생기는 법이죠.”

어디를 가건 서열을 정하려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위협당한 인간이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것을 미워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결국 꼬리를 내리는 일이다.

“잠깐만······. 스완 너 설마······. 아니지?”

호세의 질문에 내가 그냥 웃었다.

***

-뻐억!!!

“꾸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움켜쥔 타자가 쓰러졌다.

그레이프푸르트리그 첫 경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사흘.

세 번째 청백전에서 최수원이 또 한 번 빈볼을 던진 덕분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까요.’

마운드 위에서 쏘리라는 말과 함께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최수원을 바라보며 호세 트레비뇨는 생각했다.

저 새끼 저거 아직 실력은 모르겠지만 성격만큼은 ‘선발 투수’가 확실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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