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초구는 원래(1)
메이저리그팀은 기본적으로 팀당 40명의 로스터를 갖는데 이것을 40-man Roster(40인 로스터)라고 부른다. 물론 그렇다고 메이저리그를 40명의 선수로 굴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메이저리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선수의 숫자가 40명으로 제한된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 40인 로스터에서 진짜 메이저에서 뛰는 선수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총 26명이다. 그리고 이 26명의 로스터는 따로 Active Roster(액티브 로스터)라고 부른다.
또한 액티브 로스터 안에도 제약은 존재한다.
투수의 숫자를 최대 13명으로.
따라서 나머지 13인은 야수로 채워진다.
즉 26인 액티브 로스터는 40인 로스터 내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 13명과 가장 뛰어난 야수 13명을 뽑아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거기에 바로 함정이 있다.
투수의 숫자를 ‘최대’ 13명으로.
여기서 이 최대라는 단어의 의미는 ‘너희들 야수는 14명 15명 해도 되지만 투수는 절대 13명을 초과하지 마!!’라는 일종의 제약이다. 그리고 이 말인즉 만약 저 제약이 없더라면 메이저리그 팀 가운데 몇몇은 액티브 로스터의 절반 이상을 투수로 채우려 할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투타겸업이 등장한다.
투타겸업.
투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야수’
그 조건은 투수로 20이닝 이상. 그리고 야수로 20경기 이상 출장한 선수.
본래 26인 로스터는 13명의 가장 우수한 투수와 13명의 가장 우수한 야수로 이뤄진다. 하지만 만약에 누군가가 야수로는 13번 명 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투수로는 20이닝을 충분히 소화할만한 기량이 있다면 어떨까? 안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투수를 쓰고 싶던 구단들 입장에서는 불감청이 고소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내가 굳이 장황하게 메이저의 규칙들을 설명한 이유가 있다.
“투타겸업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타자로는 출장을 안하는가보네?”
“그러게. 아시아의 홈런왕이라길래 얼마나 대단한지 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대단은 무슨. 딱 봐도 비리비리한 것이 그냥 안봐도 뻔하겠구만.”
“하긴 내 친구가 그러는데 거기 최근에 승부 조작도 있었던 리그라고 하더라. 리그 성적에 대한 신뢰도가 개판이라는 뜻이지.”
“야, 근데 우리 목소리 너무 큰 거 아니야? 다 들릴 것 같은데?”
“괜찮아. 어차피 한 단어씩 또박또박 말해 줘도 제대로 알아들을까 말까일 텐데. 쟤 통역 데리고 다니는 거 봤잖아.”
“그리고 또 설사 알아 들으면 어쩔 건데? 우리 셋을 상대로 따지러 올 수나 있겠어?”
내가 굳이 여기서 다가가서 ‘너희가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들었다. 이 루저 새끼들아.’라는 말 따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저 녀석들 가운데 진심으로 내 실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저기서 지금 떠드는 애들은 26인 로스터에 간당간당한 애들로 몇 년만 저렇게 지내다 보면 KBO에서 뛰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될만한 애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저기서 저렇게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것도 결국 자기 자리를 뺏길 거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난 저들을 기꺼이 용서한다. 능력 없는 이의 질투까지 미워하기에 나는 너무 잘났으니까.
“호세.”
“응?”
“저기 쟤들. 이름이 뭐야?”
“누구? 아, 쟤들? 뭐야? 혹시 너한테 시비라도 건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관대하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이름만 기억해두려는 거다.
그게 전부다.
***
1회 초.
청팀의 시작은 양키스의 에이스인 도밍고 로드리게스부터였다.
그는 라티노 미남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어느 인종과도 다른 독특한 매력의 얼굴에 187cm라는 일반인으로는 평균 이상인, 하지만 선발 투수치고는 약간 작은 체구를 가진 남자였다.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왼손으로 글러브 안의 야구공을 몇 차례 더듬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그만의 가벼운 루틴이었는데 그 가벼운 몇 번의 동작에 그의 마음이 매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백팀의 상대 타자는 마크 토마스.
올해 나이 24살. 작년 양키스의 AA팀인 서머셋 패트리어트에서 0.299/0.341/0.479를 기록한 타자다. 이스턴 리그가 평균 OPS 0.697의 투고타저였음을 고려한다면 마크 토마스 역시 충분히 이번 시즌 메이저 콜업을 기대해볼 만한 선수라고 볼 수 있었다.
-부웅!!
가벼운 연습 스윙이었지만 그 스윙에 담긴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메이저 콜업을 목전에 둔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렇듯 그 역시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감독과 코치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어보겠다는 강한 열망으로 매우 높은 수준까지 몸을 완성한 상태였다. 반면 도밍고 로드리게스는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리그 에이스로 개막에 맞춰 천천히 몸을 끌어올려야 하는 상태다.
이번 승부를 굳이 숫자로 표현하자면 자기 실력의 7할도 내지 못하는 도밍고 로드리게스와 10할을 온전히 발휘하는 마크 토마스의 승부라고 볼 수 있었다.
초구.
93.7마일의 빠른 공.
-딱!!
마크 토마스가 그 공을 두들겼다.
‘젠장······. 높았어.’
아릿한 손바닥.
이제 고작 2월 말. 아직 구속은 리그 에이스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그것이 아니었지만, 공의 무브먼트만큼은 여전히 리그 에이스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그것이었다.
초구 파울.
그리고 두 번째 같은 코스.
마크 토마스가 또 다시 방망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슬라이더.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터널링 구간이 긴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는 것은 또 달랐다. 슬라이더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완전히 늦은 타이밍.
86.7마일의 고속 슬라이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높은 코스 93.4마일의 속구까지.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이름값에 어울리는 피칭으로 양키스의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작년보다 커맨드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아직 투수로는 한창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았으니까요. 듣기로는 이번 오프시즌에는 마르티네스에게 코칭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 나도 조슈아 단장에게 전해 들었다네. 페드로 그 친구가 같은 도미니카 출신이라고 그래도 제법 예뻐했다던데.”
제프 클라크 감독이 페드로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압도’라는 단어 뿐이었다. 현역 시절 11타수 1안타 8삼진. 그야말로 압도적 패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페드로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에 담긴 무게가 그만큼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제프 클라크 감독이 뛰었던 시기의 페드로는 그야말로 전성기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던 당시의 페드로였다. 어쩌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었을지도 모르는 투수를 상대로 한 번이라도 안타를 쳤다면 그건 자랑거리면 자랑거리지 절대 굴욕이 될 수 없으리라.
“일단 체인지업이 꽤 좋아졌으니 그것도 한 번 지켜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페드로의 체인지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그들이 1회 초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피칭에서 체인지업을 보는 일은 없었다. 속구와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
오직 세 가지의 구종만으로 도밍고 로드리게스는 3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7할의 도밍고 로드리게스조차 40인 언저리의 선수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음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공수교대.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내려간 자리.
비어있는 마운드 위로 게릿 콜이 올라왔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남들보다 하루 늦게 스프링트레이닝에 합류한 만큼 몸 상태는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할 때 오프 시즌에도 개인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것은 20대의 젊은이 가진 특권이었다. 겨울 오프시즌은 30대 후반의 노장에게는 정말 최선을 다해 휴식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게릿 콜이었다.
통산 2901개의 탈삼진과 197번의 승리.
그가 쌓아올린 커리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마운드의 게릿 콜이 가볍게 세 개의 연습구를 던졌다.
-뻐엉!!
주전 포수 호세 트리베뇨가 기분 좋은 포구음으로 그의 기운을 북돋웠다.
타석에 청팀 타자인 바트 웨스트가 올라왔다.
백팀의 마크 토마스와는 다르게 몇 차례 메이저리그를 경험했던 남자였다. 올해 29세. 전형적인 AAAA급 선수로 작년 AAA리그인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0.317/0.401/0.422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게릿 콜을 바라봤다.
마운드에 선 게릿 콜은 살짝 살이 붙은 몸의 중년을 향해가는 남성이었지만 바트 웨스트가 기억하는 게릿 콜은 터무니없이 대단한 투수였다.
그랬다.
분명 전성기의 게릿 콜은 그야말로 탈삼진 머신이었다. 선발 투수로 200이닝을 넘게 던지는데 평균 구속이 97~98마일. 최고 구속은 102마일을 찍었었다. 무브먼트도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는데 거기에 슬라이더까지 최고 수준으로 던졌었다. 20-80 스케일로 따지자면 속구가 80에 슬라이더가 70.
물론 만으로 37세를 넘긴 지금 전성기만큼의 구위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작년의 기록만 보더라도 평균 구속이 95마일 내외. 최고 구속도 100마일을 찍었으니 메이저리그를 기준으로도 여전히 파이어볼러의 범주에 넣을만한 투수임은 변함이 없었다.
-따악!!
그리고 그를 상대로 바트 웨스트가 유격수의 키를 훌쩍 넘어가는 안타를 기록했다.
과연 그 안타는 감독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만 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게릿 콜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은 바트 웨스트만이 아니었다.
그래, 분명 작년의 게릿 콜은 파이어볼러의 범주에 들어갈만한 투수였다. 하지만 오늘 청백전에서 보여주는 게릿 콜의 모습은 작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섯 타자를 상대로 무려 3피안타 1볼넷.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성기에 탈삼진 머신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웃카운트 하나는 삼진으로 잡았다는 점 정도일까?
“몸에 문제는?”
“전혀요. 다만 작년에는 막판에 좀 심하게 고생했던 만큼 작년보다 더 천천히 몸을 끌어올릴 모양입니다. 만약 올스타에 선정된다고 해도 출장을 거절할 생각도 하고 있는 것 같고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키스의 덕아웃에서는 게릿 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베테랑이었고 지금은 스프링 캠프의 첫 청백전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소집일에도 하루 늦게 응했던 만큼 몸이 더 천천히 올라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조금 이르지만 스완을 올려보지.”
“네, 알겠습니다.”
덕아웃의 전화기가 울렸다.
만약 오늘이 진짜 경기였더라면 조금 곤란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자체 청백전이었고 그렇기에 약간 이른 타이밍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수원에게는 충분히 몸을 풀 시간이 주어졌다.
1회 말.
주자 1, 3루.
상대는 6번 타자.
마운드의 최수원이 무표정 속에서 마음으로 웃었다.
타석에 선 남자의 이름은 태너 고든.
오늘 오전 복작이는 라커룸에서 감히 그들 셋을 상대로 따지러 올 수나 있겠냐는 헛소리를 늘어놓던 바로 그 머저리였다.
하지만 고작 저런 애송이에게 감정을 갖기에 수원은 이미 너무 위대했던 선수였다. 그가 미움이 전혀 섞이지 않은 냉정한 마음으로 심지어 아직 어린 타자에게 일말의 가르침까지 담아 정성껏 공을 던졌다.
‘원래 좋은 투수는 타석에 바싹 선 타자놈들에게 대가리가 깨질 각오를 하는 법을 알려주는 법이지.’
초구 96마일.
태너 고든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