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에이스의 옆자리(3)
호사가들이 떠드는 이야기 가운데 명예의 전당 보증 수표라는 것이 있다.
보통 홈런 타자의 경우 500홈런. 똑딱이들의 경우 3,000안타.
물론 이것만 있다고 무조건 명전이 보장된다는 것도 아니고, 이게 없다고 절대 명전을 못 간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보통 저런 누적을 쌓을 정도면 다른 성적 역시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500홈런을 치고 2할 밖에 못 친 타자가 있다면 이 타자는 명전을 갈 수 있는가? 뭐 이런 건 오래된 떡밥이긴 한데 사실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기인 것이 애초에 통산 타율이 2할 초반 밖에 안 되는 타자는 30대 후반까지 빅리그에서 뛸 수가 없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누적도 400홈런 언저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게 보통이다.
아무튼 이 명전 보증 수표라는 지표들 가운데 선발 투수의 지표로 유명한 건 3000K-250W이 있다. 3천 탈삼진과 250승을 동시에 달성한 선발은 무조건 명전에 첫턴으로 들어 간다는 이야기인데 뭐 원래는 300승이었는데 투수분업화 이후로 승리의 조건은 조금 낮아졌다.
“그러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게릿 콜과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악연이 시작이 된 거지.”
“악연?”
나의 질문에 조쉬 클린턴이 도널드 해리슨의 말을 이어받았다.
“지난 24시즌에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사이 영을 탔거든.”
“그런데?”
“그때 사이 영 2위가 게릿 콜이었어.”
“아······.”
“게릿 콜이 근 10년 통틀어서 제일 잘 던진 투수 중에 하나인 건 맞지만 상이 없었거든.”
안다.
사이 영 2위만 무려 네 번.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저 양반도 어지간히 콩라인은 콩라인이다. 하지만······.
“아니, 상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기에는 그래도 사이 영 한 번은 받았잖아.”
조쉬 클린턴과 도널드 해리슨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에이, 그래도 통산 2900삼진에 197승 거둔 투수가 사이 영 하나는 좀 초라하지. 최근에 은퇴한 양반들 보면 죄다 사이 영 3개씩은 들고 은퇴했잖아.”
“게다가 수상 실적이 딸리니까 명전 첫 턴도 좀 어려워졌다. 뭐 그런 거겠지. 설사 첫 턴에 가더라도 막 다른 선수들처럼 85% 이상 이런 거 아니라 70% 턱걸이 정도일 거고.”
확실히 21세기 시대의 지배자라고 할만한 투수들을 보면 사이 영 3개씩 탄 투수들이 좀 많긴 했다. 게다가 커리어 15년 동안 삼진 2900개에 197승. 심지어 게릿 콜이 아직 1, 2년은 더 던질 수 있는 상태라는 걸 고려하면 명전에 못 갈 성적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첫 턴에 무조건 들어갈만한 성적이냐면 고개가 조금 갸웃해지는 커리어인 것도 사실이다.
“아니, 근데 그거야 그 양반들이 좀 특별했던 거잖아. 그리고 실력에서 밀려서 2위 된 건데 그런 걸로 이렇게 대놓고 투닥거린다고?”
“당연히 그것만으로 이렇게 된 건 아니고. 예전에 양키스에 온 이후로 게릿 콜이 좀 삐딱하게 나가는 걸 도밍고가 작정하고 덤볐거든.”
어느 세계를 가건 ‘서열’이라는 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성별과 인종을 떠나서. 아니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 다른 동물들을 보더라도 무리 내 ‘서열’이라는 건 존재한다.
어린 아이의 세계를 보더라도 무리 내에 마운팅을 하고 은근히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은 쉴 새 없이 이뤄진다. 메이저리그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커리어, 폼, 인기. 그 외 기타 등등. 많은 요소들이 그 나름의 수치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게릿 콜과 도밍고 로드리게스는 사실 싸움이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폼이 지금 절정이라고 하지만 게릿 콜 역시 전성기에는 그만한 기량을 보여줬다.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도미넌트한 투수로 분류될만한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게릿 콜이 팀 내에 인망이 좀 없었나 보네?”
“어, 아무래도 실력에 비해선 좀 그렇지. 성격도 성격이지만 사건들이 좀 많았잖아. 파인타르라거나······.”
아······.
이거 아무래도 앞서 내 생각을 조금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게릿 콜. 어쩌면 저 정도 성적으로는 명전에 못 갈 수도 있겠다.
파인 타르 사건.
최근 야구계에 벌어진 일들 가운데 사인 훔치기 스캔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사실 파인 타르는 메이저리그에서는 적당히 눈에 띄지 않게 알아서 요령껏 사용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이게 복잡하다면 복잡한 문제인데. 일단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의 공인구는 굉장히 미끄럽다. 그걸 어떻게 해보려고 전통이랍시고 진흙을 위에 바르는데 그렇게 해도 여전히 미끄럽다.
그런데 생각을 좀 해보자. 공이 미끄러워서 제구가 어려울 때 진짜 위험한 건 누구일까? 볼질을 좀 하게 되는 투수? 아니면 대가리에 100마일짜리 속구 두들겨 맞을 타자? 이러한 이유로 사실 파인타르는 그냥 알고도 모르는 척 다들 눈감아 주는 관례아닌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 게릿 콜에서 시작된 저 파인 타르 사건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
사실 마찬가지로 화제가 됐던 사인 훔치기도 그렇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인을 훔친다는 비도덕적인 부분에 좀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원래 야구에서 사인이라는 건 도둑 맞은 쪽이 병x취급 받는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휴스턴의 휴지통이 문제가 된 건 현대의 첨단 과학을 동원해서 사인을 훔쳤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게릿 콜의 파인 타르 역시 그러했다. 그가 사용한 건 단순한 파인 타르가 아니었다. 몇몇 투수들이 알음알음 모두가 사용하던 파인 타르를 넘어서 스파이더택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물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사무국에서는 칼을 빼들었고 당시 의심받던 몇몇 선수들의 성적은 수직으로 낙하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SNS로 저격을 받았던 게릿 콜 역시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뭐 사실 파인타르만이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게릿 콜은 그냥 뭐랄까······.”
“재수가 좀 없지.”
“실력이 좀 좋은 건 인정을 하겠는데······.”
“말하거나 하는 짓을 보면 거의 그걸 넘어서 자기가 데릭 지터라도 된 것처럼 군단 말이지.”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앤디 페티트 정도라면 또 몰라도. 거기까진 절대 아닌데 말이야.”
“그러게. 스캔들 있는 것까지 딱 앤디 페티트이랑 비슷하네.”
아까 낮에 라커 빼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조쉬와 도널드 둘 다 게릿 콜에게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아무튼 오늘 너 옆에 두려고 그렇게 신경전 한 거 너 때문만은 아닌 거 다들 아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맞아. 둘이 신경전 하는 거 하루이틀 일도 아닌데 뭐.”
결국, 본래라면 더 우위에 있어야 할 베테랑 선수가 이런저런 이유로 흠결이 있고 젊은 에이스는 그에게 굽힐 생각이 없다는 것이 현재 양키스 투수진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둘이 평소에도 이렇게 자주 싸우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 라커룸에는 기자들도 많이 오잖아. 평소에는 그냥 서로 상종을 안해.”
“맞아. 라커도 어차피 반대편에 있고. 선발 등판도 둘이 연이어서 하는 편이니까. 사실 부딪힐 일이 거의 없지. 다른 구단에는 거의 소문도 안 났을걸?”
“그런데 둘은 이런 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우리야 뭐. 여기 스프링 캠프만 벌써 세 번째에. 작년에는 여기 도널드는 빅리그에 콜업도 됐었거든.”
“그래봐야 보름인데 뭐. 게다가 이후로 팀에서 성적은 조쉬 네가 더 좋았잖아.”
그러고 보니 이 둘도 팀내에서 가장 커리어 짱짱한 베테랑 투수 바로 옆자리에 라커를 배정받은 데다가 셋이 아닌 둘이서 라커를 공유하는 걸 보면 빅리그와 아주 먼 선수들은 아닌 셈이다.
“오케이. 이제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고마워.”
“고맙기는. 여기 밥 네가 산다며.”
“맞아. 요즘 이렇게 맛있는 고기 먹을 일이 없었는데 우리가 더 고맙지. 스테이크 하나 더 시켜도 돼?”
“두 개 더 시켜.”
한 접시에 35달러씩 7접시. 총 245달러 정도?
메이저 콜업을 눈앞에 둔 23살, 24살 청년들의 눈동자에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이 깃드는데 필요한 금액이었다.
***
“하하, 이것 참 묘하구나. 미국. 심지어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니 말이다.”
“뭐,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선배님은 좀 어떠세요?”
“나? 나야 이제 슬슬 출국 준비 중이지. 네가 뉴욕 양키스에 미리 갈 줄 알았다면 그쪽도 좀 알아봤을 텐데.”
“에이, 선배님한테는 뉴욕보다는 LA가 낫죠.”
“나한테는 LA가 낫다고? 왜?”
“아니, 날씨도 그렇고······. 아, 맞다. 한식. 한식도 LA가 훨씬 잘해요. 여긴 좀 퓨전이 많아서 선배 입에는 안 맞을 겁니다.”
팀 내 알력이라는 어디 마린스에서나 경험해볼 것 같은 일을 경험한 직후.
놀랍게도 규만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쪼유랑 이정훈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요즘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는 안부 인사였다.
“늙은 선배랑 자주 부딪히기는 싫다. 뭐 그런 거냐?”
“에이, 저야 선배님 자주 보면 든든하고 좋죠. 진짜 순수하게 선배님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너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니 참 좋구나.”
“잘 지내다뇨. 오늘만 해도 이런 개똥같은 일을 경험했는데요.”
이규만이 웃었다.
“고작 그 정도로 개똥 같다니. 마린스에서는 그보다 더 한 것도 헤쳐 나간 녀석이 엄살이 심하구나.”
“에이, 마린스는 이런 건 없었죠. 애초에 마린스는 선배님이 꽉 잡고 계셨잖습니까.”
“꽉 잡기는······. 너 오기 전만 하더라도 팀이 아주······.”
“아주?”
“아니, 아니다. 아무튼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네가 제일 잘 하는 거 하면 될 거다.”
“야구나 열심히 해라를 굉장히 기분 좋게 말씀해주시네요?”
이런 사소한 농담조차도 그렇게 재밌던 걸까? 이규만이 정말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수원아. 나는 네가 잘 됐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무슨 의미일까?
본인은 끝끝내 도전하지 못했던 메이저리그. 한국 야구를 박살낸 내가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도 박살 내는 것을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나를 응원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그 진심의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
그냥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만만치않게 훌륭한 덕담을 하나 건네주었다.
“네, 저도 선배님이 얼른 마린스에 감독으로 컴백하셨으면 좋겠네요.”
“······.”
덕담이었다.
***
메이저리그 공인구에 대한 적응을 시작한 건 지난 11월.
한국 시리즈가 끝난 직후부터였다. 애초에 워싱턴 형제와의 훈련 자체가 메이저 공인구를 기반으로 하던 훈련이었다.
-뻐엉!!
“굿!! 아주 좋아.”
호세 트레비뇨가 정말 기분 좋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확한 구속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96마일 전후. 그러니까 154.5km/h 전후 정도 되지 않았을까? 구속이야 어차피 아직 몸을 끌어올리는 단계니까 한참 더 올라갈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어깨도 아직 완전히 다 풀리지 않은 느낌이었고.
“스완 너 모레 청백전에 두 번째 투수로 낙점됐다며.”
“어, 근데 나도 내일 야수조랑 훈련 스케줄 완전히 같이 공유하는 건가?”
“글쎄······.”
“호세 너는 신체검사 내일 받는 거야?”
“아니, 난 입소한 날에 받았지. 너도 굳이 또 받을 필요는 없지 않아? 아, 아닌가? 신체 사이즈야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테스트는 필요하려나?”
고작 사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주전 포수인 호세 트레비뇨와는 제법 친해졌다. 이건 나의 친화력이 빛을 발했다기보다는 호세 트레비뇨 쪽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데 역시 이녀석이 생각할 때도 내가 이번 시즌 선발의 한 자리를 담당할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추측이 됐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뭐, 굳이 원한다면 참가해도 괜찮지만 그것보다는 모레 있을 청백전 피칭에 더 집중하는 걸 추천한다.”
배터리 코치가 나에게 내일 있을 야수조 훈련에 참가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틀.
몇몇 선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스프링캠프에 소집됐고 마침내 팀 내 최초의 청백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