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에이스의 옆자리(2)
올해 나이 25세의 제이스 휘태커는 양키스 팜 출신의 유망주였다.
2024년의 3번째 보상 라운드 픽으로 전체 132번.
대학야구에서 2년을 던지고 21살이 되던 해에 드래프트로 나왔던 그는 마이너를 1년 반만에 졸업하고 고작 23살의 나이에 불펜으로 빅리그에 입성했다.
대단한 일이었다.
양키스의 콜업이 보수적인 것은 유명했다. 아무리 얼리드래프트라고 해도 아무리 투수라고 해도 2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메이저까지 올라오는 일은 절대 흔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양키스의 팬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열광을 보냈다.
20세기 이후 양키스의 에이스 계보를 살펴보자면 양키스 팜 출신 선수는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 코어4의 일원이었던 앤디 페티트와 국제 유망주 계약으로 양키스에서 뛰었던 루이스 세베리노 정도만이 잠깐이라도 양키스 팜 출신의 에이스였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두 선수 모두 마무리는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키스는 21세기 들어 두 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과 4번의 챔피언십 우승. 12번의 지구 우승을 해냈다. 비결은 간단했다.
가장 좋은 선수를 키워내지 못한다면 그 가장 좋은 선수를 사 오면 그만이다. 로저 클레멘스, 마이크 무시나, CC 사바시아. 다나카 마사히로. 그리고 게릿 콜까지. 그리고 지금 저기 앞에서 달리고 있는 도밍고 로드리게스 역시 그런 선수들의 연장선이 있는 남자였다.
탬파베이 출신의 젊은 에이스로 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며 빅리그에 콜업. 빅리그 데뷔 첫해에 신인왕 3위를 차지했으며 이후로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여 4년 차에는 마침내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재작년 FA에서 무려 8년 3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며 양키스에 합류. 노쇠화로 성적이 점차 떨어지고 있던 게릿 콜의 왕좌를 별다른 잡음 없이 물려받았다.
그리고 바로 작년.
제이스 휘태커가 달리던 위치는 바로 그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옆자리였다. 2026시즌 불펜으로 2개월을 던지는 동안 그는 30.1이닝 평자책 2.08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었고 프런트에서는 27시즌 선발의 한 자리를 그에게 약속했다.
빛나는 미래가 보였었다.
도밍고 로드리게스와 게릿 콜의 뒤를 이어 세 번째 선발로 당당히 자리를 잡고, 게릿 콜이 은퇴하기 전에 2선발을 차지. 그리고 FA를 앞두고 마침내 도밍고 로드리게스에 필적하는 투수가 되는 장밋빛 미래가.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작년 그는 전반기에 13경기 선발로 출장하여 5.12의 평자책을 기록했다. 마이너로 밀려나진 않았다. 그가 첫 번째 타순에서는 그래도 2점 후반대의 평자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후반기 다시 불펜으로 돌아간 그는 4.13의 평자책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의 시선이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옆자리로 향했다.
바로 작년 자신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달리는 남자는 다름 아닌 최수원. 이번 겨울 메이저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를 몰고 다녔던 아시아의 ‘홈런왕’이었다.
‘젠장.’
녀석의 라커룸 위치는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바로 옆자리로 심지어 한 칸을 온전하게 혼자 사용한다. 또한, 특별히 정식으로 나온 이야기는 없지만 돌아가는 꼴이나 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메이저 데뷔는 물론이거니와 선발의 한 자리도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스무 살.
제이스 휘태커는 저 대우가 AA레벨에 불과한 리그에서 한 시즌 뛰고 온 것 치고는 너무 과한 대우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어울리는 지인들 역시 그의 그런 불만에 강하게 동조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금방 바닥을 드러낼 거야. 팀에서 선수들 마이너에서 굴리는 게 괜히 굴리는 게 아니잖아.”
“맞아. 그 뭐더라? 옛날에 드래프트 없던 시절에 보너스 키드인가? 바로 메이저에서 뛰게 했던 그 사람들도 다 망했었다더라. 그래서 이후로는 드래프트 된 선수들 마이너에서 몇 년씩 구르게 하는 게 전통이 됐고.”
보너스 베이비.
과거 드래프트가 없던 시절의 보너스룰로 인하여 마이너를 뛰지 못하고 곧바로 메이저 로스트에 붙어 있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 결국 마이너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올라온 선수는 그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이스 휘태커 자신과 같이 피해를 보는 이들에게는 누가 어떻게 보상을 해줄 수 있을까?
제이스 휘태커가 생각할 때 그가 작년 시즌 초에 선발로 조금 실패했던 것은 결국 적응의 문제였다. 따라서 시즌 막판에 다시 불펜으로 그렇게 활약했으니 충분히 다시 선발 기회를 받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저렇게 갑자기 등장한 녀석이 선발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스프링 트레이닝.
총 41명의 투수들이 각자의 생각 속에 러닝을 이어갔다.
***
언제나 그렇듯 첫째 날의 훈련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간단하게 신체 검사를 하고 단체로 러닝을 한 이후 하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하프 피칭을 30개 정도 던지는 것으로 첫 번째 날의 훈련이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 날.
“오우, 네가 스완이구나. 반갑다.”
하루 늦게 합류한 양키스의 주전 포수 호세 트레비뇨가 나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의 이 포수는 골드글러브를 세 개나 받았고 심지어 플래티넘 글러브도 두 개 수집했다.
골드글러브가 각 포지션 가운데 가장 걸출한 수비를 보여준 선수를 기자단 투표로 선정하는 것이라면 플래티넘 글러브. 그러니까 롤링스 플래티넘 글러브의 경우는 각 리그에서 가장 걸출한 수비를 보여준 선수 단 한 명씩에만 수여되는 상이다. 즉 호세 트레비뇨는 적어도 두 시즌은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훌륭한 수비를 보여준 선수였다는 뜻이다.
보통 둘째 날에 주전 포수와 합을 맞춰보는 건 짬순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일찍 하고 일찍 퇴근하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무조건 짬으로만 하는 건 또 아니다. 적당히 현재 폼도 좀 고려하고 커리어의 퀄리티도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다섯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마이너 계약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사실상 FA나 다름 없는 위치였으니까.
-뻐엉!!
몇 차례 공을 주고받은 호세 트레비뇨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오, 이번 건 진짜 좋은데? 이게 몇 퍼센트 정도야?”
“글쎄요. 한 70퍼센트?”
“진짜?”
“당연하죠. 저 피칭 좀 부진해도 마이너 내려갈 일 없는 거 알잖아요.”
“아, 맞다. 너 투타겸업이었지. 공이 너무 좋아서 잠깐 깜빡했네. 브레이킹볼은? 가능 하겠어?”
“커브 몇 개 던져볼까요?”
“커브 좋지.”
마린스에서 뛸 때는 초반에 포수 때문에 진짜 힘들었었다. 쪼유가 마스크를 쓴 이후에는 뭐 꽤 괜찮았지만 이 녀석은 빠따가 워낙에 폐급이라······.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호세 트레비뇨의 포구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읏차!!”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손에서 공이 빠지는 바람에 바닥을 크게 찍은 커브를 몸으로 받아내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었으니 순발력에서는 쪼유보다 좀 못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메이저에서 플래티넘 글러브를 받은 포수의 수비는 과연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공이 뒤로 빠질 것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미리 듣기로는 슬라이더랑 체인지업도 있다면서.”
“네, 그런데 슬라이더는 아직 빅리그에서 써먹을 정도는 아닐 것 같고. 체인지업은 요즘 한창 교정중이라서요.”
“그래? 그래도 한 번씩만 좀 보여줘 봐. 혹시 모르잖아.”
속구와 커브.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까지 전부 다해서 34개.
두 번째 날 나의 불펜 피칭이 그렇게 끝이 났다.
***
“어땠어?”
“속구는 합격. 커브는 좀 애매하고. 슬라이더랑 체인지업은 진짜 깜짝쇼 용도 정도지. 염두에 두고 있으면 무조건 장타 나오겠던데요?”
“흐음······. 몸 상태 70% 정도라는 것도 염두에 둔 거지?”
“음, 그 말이 정말로 진짜라면 속구에 커브만 써도 180이닝에 4점 초반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호세 트레비뇨는 지금이 자신의 70%정도라는 수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 바닥에 신인들이 스프링 트레이닝에 몸 상태 최대한 끌어 올려서 오는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던가.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선발 투수라는 놈들은 대부분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다. 이를 악물고 던진 주제에 ‘이건 내 100%가 아니다.’같은 중2병 대사를 태연하게 던진다. 70%라고? 오늘 그게 80%. 아니 90%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5선발로는 충분히 돌릴만하다. 뭐 그런 소리네?”
“지켜봐야죠. 선발이 어디 구위만 갖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경험이야 한국 리그에서 이미 선발로만 160이닝 정도 던져봤으니 아예 초짜는 아니지.”
“에이, 어디 마이너랑 메이저랑 같나요. 게다가 저 정도 공이면 그냥 속구만 복판에 던져 넣어도 다 통했을 텐데, 여기선 그게 아니잖아요. 솔직히 구위만 따지면 작년에 제이스도 충분히 통할만 했는데 시즌 진행되면서 좀 두들겨 맞더니 멘탈 박살나서 그렇게 망가진 거잖습니까.”
“아무튼 잘 좀 지켜보라고. 이제 막 미국에 와서 많은 것이 낯설 테니까 말이야.”
“걱정마십쇼. 투수놈들 멘탈 케어야 제가 또 전문 아니겠습니까.”
호세 트레비뇨의 말에 배터리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셋째 날.
라커룸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사실 스프링캠프의 라커룸은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정상이긴 정상이다. 캠프 시작할 때야 다들 희망에 가득 차서 시작하지만 이게 조금 진행되다 보면 현실의 높은 장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내가 그래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로는 ‘아, 이제 내 차례겠구나.’하는 순간들이 찾아오면 보통 어김없이 하루 이틀 내로 라커룸에서 짐을 빼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야수조까지 다 합류하고 본격적인 연습경기들이 시작된 이후. 그러니까 옥석 고르기가 시작된 이후의 이야기다. 지금은 아직 모두가 머릿속의 꽃밭을 뒹굴며 희망에 가득 차 있는 게 정상인 시기였는데······.
“오, 신참!! 반갑다.”
게릿 콜이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지난 10년 메이저리그의 모든 투수들을 통틀었을 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트루 에이스로 올해 나이는 서른 일곱.
193cm에 110kg.
물론 프로필 상으로는 나와 비슷한 키에 나보다 아주 약간 체중이 더 나가는 수준이다. 하지만 눈으로 봤을 때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120kg 당시의 나와 비슷한 체격으로 보였다.
“듣던 것보다 몸이 단단한데? 라커는 지금 어디 쓰고 있어? 아, 저기야? 음······. 그러지 말고. 헤이. 너. 어. 그래 너. 이름이 뭐였지? 아, 조쉬. 그리고 너는? 도널드. 오케이. 조쉬랑 도널드. 지금 짐 빼서 여기 이 스완이랑 자리 좀 바꿔줘. 아, 직접 할 필요는 없고. 내가 이따가 여기 클러비한테 부탁할테니까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돼. 오케이?”
천하의 게릿 콜이 부탁을 하는데 대체 누가 여기서 No를 외칠 수 있을까? 그의 바로 옆 자리 라커를 공유하던 두 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콜씨. 잠시만요.”
“응?”
“이미 자기 짐 다 풀고 자리 잡았는데 그렇게 마음대로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여긴 우리 홈도 아닌데 클러비한테 그런 거 시키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
아, 있었다.
여기서 No를 외칠 수 있는 인간.
도밍고 로드리게스.
두 선수의 시선이 부딪히는 공간.
직접 짐을 옮기려던 조쉬랑 도널드가 몹시 뻘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개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