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60화 (260/305)

260화. 에이스의 옆자리(1)

쪼유가 속삭였다. 심지어 여기서 한국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자신과 나. 그리고 저기서 어느새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이정훈밖에 없는데도 굳이 속삭였다.

‘야, 파티라며.’

‘왜? 메이저리거 파티라니까 막 금발 모델들이 수영장에서 비키니 입고 있고 그런 거 기대했냐?’

‘아니, 수영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적으로 이건 애초에 파티도 아니잖아.’

한쪽에서는 근육이 불끈불끈한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예압 베이베를 외치며 바벨을 들어 올리고, 또 다른 쪽에서는 오늘 있는 NFL 경기를 보면서 유청 단백질을 들이킨다.

“파티는 재밌게 잘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네? 음식은 어때? 입에 좀 맞아?”

“어, 단백질이 한층 더 맛없어졌던데 성분 더 좋은 걸로 바꿨나봐?”

“하하, 역시 예리하다니까. 이번에 새로 나올 제품이야. 음식이 맛이 뭐가 중요하겠어. 안 그래?”

앤서니 볼피가 웃으면서 미친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 놓는다.

“아, 그런데 저기 저 친구는 꽤 재밌더라고. 재능도 있고. 너랑 친구라고 그랬지? 그러면 저 친구도 앞으로 한 4, 5년만 있으면 빅리그 오겠네?”

“올해로 나이가 서른한 살이야.”

“뭐? 서른한 살? 맙소사. 나는 당연히 너랑 동갑이거나 한두 살 정도 차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얼굴에 서른한 살이라니. 하여간 한국인들은 얼굴만 보고는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니까. 그러면 이쪽도 서른한 살인가?”

“아니, 이쪽은 나랑 동갑. 그보다 정훈이형 재능이 그렇게 괜찮아보였어?”

“스무 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력 좀 많이 붙이고 더 성장하면 충분히 빅리거 감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서른한 살이면······. 코너 외야수라고 그랬지?”

“어, 좌익수.”

“그러면 내가 볼 때는 몸무게 자체를 좀 더 늘리는 편이 낫겠던데?”

“글쎄다······.”

사실 말로 하는 건 참 쉽다.

힘이 부족하면 몸이 조금 느려지더라도 사이즈를 올려서 근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사람마다 최적의 지점이라는 건 다 다르다. 괜히 그러다 오히려 성적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즉,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서야 본래 자신이 하던 것에서 확 하고 바뀌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이정훈처럼 나름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의 나도 82에서 120kg까지 늘리는 데 13년 정도의 시간을 들였다. 당시에는 투수를 안 했던지라 비교적 체중 늘리는 게 쉬웠음에도 그랬다. 뭐, 지금 이렇게 겨울 시즌 동안 10kg이나 한 번에 찌운 것도 이미 한 번 가봤던 길이니 내 몸이 저 정도까지는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스트렝쓰 훈련은 되게 잘 돼 있더라. 솔직히 저 사이즈에서는 저 이상 힘을 내는 것도 어려워 보일 만큼 훌륭해.”

앤서니는 저것 자체를 훈련의 결과물이 아닌 이정훈의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녀석이 뭔가 김이 샌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일까?

그 표정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쪼유, 너도 여기서 나랑 이러고만 있지 말고 가서 좀 해봐.”

“어? 나?”

“원래 너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되게 잘 어울리잖아.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왜 낯을 가리고 그러냐?”

“아니, 그거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잖냐. 여긴 말도 안 통하고······.”

“야, 어차피 쟤들도 다 말 통하는 거 아니야. 스페인어랑 영어 다 할 줄 아는 애들은 몇 없어. 그리고 어? 운동 선수들이 만났는데 말이 뭐가 중요하냐? 근육과 근육으로 대화하는 거지.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나중에 뛰려는 메이저리그 애들은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체험해 봐야지. 안 그래?”

“그런가?”

난 쪼유의 야구 실력을 절대 메이저급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녀석 적어도 운동 능력 만큼은 정말 메이저급이다. 아니, 어쩌면 그걸 넘어서 NFL에 도전해 볼 만한 잠재력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고등학교 졸업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다. 애초에 대학 가서 약물로 괴물이 되는 놈들은 인간 끝판왕 급 피지컬을 갖출 재능에다가 약물을 더하는 거라서 피지컬만 따지면 엘리트 체육인이고 뭐고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쪼유의 경우 원래 체중 대비로는 상당히 대단한 근력을 자랑했지만 겨울 동안 워낙에 살이 찐 터라 무게만 따졌을 때는 사실 그리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구비된 도구들은 그런 단순한 도구들이 아니었다.

쪼유가 처음 두각을 드러낸 것은 둥근 볼 위에서 코어를 잡고 중량바를 컨트롤 하는 운동이었다.

“오우!! 브로!! 할 수 있어!! 좋아!! 간다!! 간다!!”

이정훈의 나이를 듣고 좀 흥이 식었다는 표정을 짓던 앤서니 볼피가 흥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NFL을 시청하던 녀석들도 하나둘씩 주변에 둥글게 모여서는 거의 무슨 스포츠 경기 응원하듯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와, 저 친구는 진짜 대단한데?”

“뭐 저 정도를 가지고. 너도 저 만큼은, 아니 저것보다 훨씬 더 잘 하잖아.”

“아니, 그렇기는 한데 이제 고작 스무 살이라며. 나도 저거 처음 했을 때 저만큼은 못 했었다고.”

“쟤 플라이오매트릭 계통 훈련 시켜보면 더 깜짝 놀랄 걸?”

“점핑으로?”

“아니, 점핑은 지금 살이 급하게 많이 쪄서 좀 그렇고.”

내가 생각할 때 쪼유의 가장 큰 장점은 순발력과 반사신경에 있었다. 그리고 플라이오매트릭 계통의 운동은 순발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는 운동들인데 근육을 증가하기 위해 하는 운동도 이미 근육이 많은 사람이 했을 때 퍼포먼스가 좋은 것처럼 이것도 애초에 순발력이 좋은 사람이 하는 게 당연히 퍼포먼스가 좋았다.

“와······.”

그리고 쪼유는 여기서 거의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 정도다. 당장 메이저리그 팀을 찾아보더라도 한 팀에 두세 명 정도나 쪼유보다 더 괜찮은 동작이 나올 수준이다.

“쪼유라고 그랬나? 스무 살이라고 그랬으니까 쟨 별 일 없으면 5년 후에는 메이저 오겠네.”

“글쎄······.”

물론 쪼유가 타격하는 꼴을 보면 생각이 좀 바뀔 것 같긴 했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 쪼유도 그렇고 이정훈도 그렇고 처음에 무슨 파티가 이렇냐고 투덜거리던 것치고는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쪼유는 뭔가 상당히 강력한 희망을 얻은 것 같아서 영 꼴 보기 싫었는데 어차피 올해 시즌 치르면서 다 사라질 물거품 같은 희망이라서 굳이 내가 직접 그 거품을 꺼트리지는 않았다.

“우리 이제 간다.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래도 종종 연락하고. 다음 주까지 미국에서 훈련하니까 시간 나면 꼭 놀러 오고.”

“어, 시간 나면 한 번 찾아갈게.”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마린스 스프링캠프장으로 돌아갔다.

나는 YES 네트워크에서 요청하는 인터뷰를 몇 번 한 것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루틴하게 2주일의 시간을 보냈다. 다만 마린스의 스프링캠프장을 찾지는 않았다. 인생에 어느 지점에서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보다 조금 더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몰입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지금이 그런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양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늦지 않은 아침.

옆집의 타일러 바트가 오늘도 똑같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고작 2주일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얼굴에 살이 제법 빠진 게 티가 난다.

“굿모닝 스완.”

“타일러, 오늘도 열심히 달렸나보네?”

“그렇지 뭐. 스완 넌 오늘부터 합류겠네?”

“어. 야수 조는 다음 주 소집이지?”

“응, 다음 주 월요일.”

일반적으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투수 소집일은 야수보다 닷새 정도 빠르다. 아무래도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 그만큼 더 길기 때문이다.

“이따가 끝나면 우리 집으로 놀러 와. 오늘은 간만에 치팅 데이라서 스테이크 구워 먹기로 했으니까.”

“소스 팍팍 뿌려서?”

“소금에 후추로······. 대신 네 껀 소스 팍팍 뿌려줄테니까 걱정 말고 오라고.”

“오케이.”

타일러 바트의 인사를 받고 테드 박이 운전해주는 차에 탄 채로 스프링 트레이닝 장소로 향했다. 집에서 거리는 약 10분 정도. 애초에 스프링 트레이닝을 위해 잡았던 집인 만큼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반갑네. 나는 제프 클라크라고 하네.”

“최수원입니다.”

제프 클라크.

1987년에 데뷔해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11시즌을 뛰었던 선수로 선수 시절에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지도자로는 상당한 두각을 드러냈다. 선수 생활을 끝내고 코치로 전업하면서 대학원에서 스포츠 생리학을 전공했는데 많이들 선택하는 루트이긴 했지만, 많이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효과를 볼 수 있는 루트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프 클라크는 선수보다 그쪽으로 더 큰 재능이 있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을 기준으로 제프 클라크는 메이저에서 총 3개의 팀 감독을 경험했고 우승도 네 번이나 차지한 명감독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시대를 좀 잘 만난 감독 중 하나인데, 과거 감독에게 요구되던 수많은 능력들이 프런트로 귀속되고 현재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결국 ‘선수의 매니징’인 시대에서 그는 정말 선수들의 컨디션을 귀신처럼 파악했다.

물론 그게 뭐가 대단한 능력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대단한 능력인데 기본적으로 선수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약간 아프다고 솔직히 아프다고 말하는 선수는 드물다. 현재 조건이 별로 좋지 않은 선수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빅리그에서 뛰는 것은 그 자체로 기회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스몰 토크가 오갔다.

제프 클라크가 나의 등을 몇 차례 더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말한 것처럼 몸을 아주 잘 만든 것 같군. 게다가 영어도 상당히 괜찮고. 뭐, 중요한 순간에야 통역을 쓰면 된다지만 아무래도 선수들끼리 대화하려면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게 좋으니까. 막 가족처럼 끈끈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경기 할 동료들인데 말이 아예 안 통하면 본인이 더 괴로운 법이거든. 아, 그러고보니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군. 우선 라커룸부터 안내받고. 오늘 훈련은 여기 수석코치인 해롤드가 담당할걸세.”

“······.”

제프 클라크 뒤에 서 있던 거인이 묵묵하게 손을 내밀었다.

해롤드 파머. 선수 시절 커리어만 보면 제프 클라크보다 훨씬 좋은 남자다. 투수로 메이저에서 17년을 뛰었고 2500이닝에 통산 140승을 달성했다.

스프링캠프의 라커룸은 팀의 라커룸과는 상당히 달랐다.

라커룸의 크기 자체는 오히려 조금 더 컸지만, 초반에 이걸 사용해야 하는 사람의 숫자가 거의 3배다. 덕분에 심한 경우에는 하나의 라커를 셋이서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것도 커리어나 위상등을 적절하게 고려하기 때문에 베테랑들의 경우 이 복작복작한 공간에서도 혼자 좋은 자리에 라커를 두 개씩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팀의 경우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그러했다.

“반가워.”

흑발에 구릿빛 피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에이스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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