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애리조나(1)
등 번호 0번.
결코 흔한 숫자는 아니다. 애초에 야구의 등 번호가 타순으로 시작했음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100년 전 일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0번은 아예 전례가 없는 번호도 아니다.
당장 야구에서 최초로 등 번호를 사용했던 양키스만 하더라도 2019년에는 애덤 오타비노에게 0번을 내줬고,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세 명이나 더 0번을 달았다.
물론 지난 10시즌 동안 네 명의 선수가 거쳐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딱히 대단한 활약을 보였던 선수는 없었다. 처음 0번을 달았던 애덤 오타비노도 양키스와 3년 27mil의 계약을 했지만 2년 뛰고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됐고 이후로 제일 오래 뛴 선수도 3시즌도 채 못 뛴 게 전부였다.
하지만 동시에 10시즌 동안 네 명이나 이 등번호를 달았다는 것은 이 등번호가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0번은 양키스의 마지막 싱글넘버이기 때문이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M&M, 빌 디키와 요기 베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전설적인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양키스의 오랜 감독 잔혹사를 끊어낸 위대한 조 토레. 그리고 그 조 토레와 함께 양키스의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냈던 뉴욕의 연인 No. 2 데릭 지터.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야구의 신까지.
양키스의 1번부터 9번까지는 야구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로 가득했으며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그 번호들은 모두 영구결번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뇨,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징성을 생각하면 양키스 입장에서도 오히려 기꺼운 제안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양키스에서 등번호 0번을 사용하던 선수는 후안 크리스는 올해 26살이 된 양키스 팜 출신의 선수다. 한때는 BA 100위 안쪽에 들어가는 유망주로 고작 3년 차에 콜업이 된 적이 있을 정도의 재능이었다. 하지만 한 번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한 이후로 그 성장세가 완전히 꺾여 이제는 최대 백업 포수 정도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후안 크리스에게 뭔가 선물이 지급 되는 것도 다 협상하신거죠?”
“네, 최 선수 이름으로 해서 구단 차원에서 적절한 보상이 나갈 겁니다.”
“좋네요.”
마린스에서 뛰던 당시에는 사실 등번호에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79번도 그냥 남는 번호라서 받았던 거니까.
그리고 그건 메이저리그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난 등번호에 크게 미련을 갖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지금 상황은 어차피 돈에 상한이 걸린 상황이라서 돈 외에 다른 뭔가를 잔뜩 뜯어내지 않으면 그게 손해라고 느껴진달까?
양키스가 유니폼 뒷면에 이름을 새기지 않는 건 유명하다. 뭐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긴 한데, 사실 내가 볼 땐 그냥 예전에 하던 거 굳이 바꾸지 않는 야구 특유의 꼰대성과 양키스는 특별하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애초에 등번호라는 것 자체가 100년 전 양키스에서 처음 사용할 때는 그냥 타순을 알려주던 숫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건 처음 시작이 어땠느냐보다 그것이 전승되어 온 시간 동안 쌓인 의미와 역사가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양키스의 등번호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11번이랑 0번 중에서 좀 고민을 했다. 싱글넘버도 의미있지만 아무래도 11번은 1번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투수 가운데 첫 번째 투수가 받는 번호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11번에 얽힌 여러 가지 사정들.
그리고 아무래도 0번이라는 ‘마지막’ 싱글 넘버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내 선택은 0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들에서 인터뷰 요청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습니다. 메이저급 쇼는 아니지만 그 아래 정도는 되는 쇼에 게스트 요청도 몇 건 들어왔고요.”
“일단은 모두 거절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임스 밀러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치르지 않은 나에게 야구 관련 쇼도 아니고 일반 토크쇼 출연 제의가 온다는 것 자체가 내가 KBO에서 거둔 성적과 양키스라는 팀의 이름값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달랐지만 제임스 밀러 역시도 나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역시 굳이 이런 자그마한 토크쇼에 나가 인지도를 올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아, 다만 YES 네트워크 쪽 방송은 몇 개 출연하셔야 합니다. 물론 스튜디오까지 가실 필요는 없고 일단은 훈련 영상과 질답 몇 개 정도로 합의를 봤습니다.”
“네, 뭐 그 정도야. 어차피 내일까지는 뉴욕에서 훈련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안에 끝내는 거로 하죠.”
그리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워싱턴 형제의 피칭랩에 간접 홍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어쨋거나 YES 네트워크면 경기당 평균 25만 가구 정도는 시청하는 제법 큰 채널이었으니까.
***
YES 네트워크의 편집팀 직원인 스티브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메리 이거 봐봐. 그림이 상당히 괜찮지 않아?”
한국에서 온 유망주라고 했던가?
사실 처음 프로필 사진만 봤을 때는 그리 호감 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뭐랄까? 조금 게이스럽다고 해야 할까? 21세기 미국의 상남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는 게이스럽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임을 고려해볼 때 곱상한 최수원의 외모는 분명 마이너스 요소였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 나오는 모습은 확실히 달랐다.
“뭐야? 얘 왜 이렇게 뚱뚱해진거야?”
“어? 뚱뚱하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직 여기저기 좀 부족한 곳들이 눈에 띄는구만.”
다만 같은 팀 직원인 메리의 소감은 조금 달랐다. 그가 담당하는 부분은 KBO 시절 최수원의 하이라이트 부분으로 그 영상 속 최수원은 정말 모델 뺨치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최근 훈련 영상과 인터뷰 속 최수원의 몸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너무 거대했다.
미학적으로 봤을 때 최근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스키니한 남자에서 스티브 같은 근육 바보들이 좋아하는 근육 돼지 쪽으로 조금씩 이동해가는 상태랄까?
두 사람이 최수원의 달라진 몸매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댔다. 이렇듯 영상을 통해서 몇 달을 스킵한 수원의 몸은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영상 속 최수원의 훈련 모습이 끝나고 이어지는 짧은 인터뷰.
첫 질문은 그가 양키스를 선택한 이유에 관한 질문이었다. 일종의 답정너에 가까운 질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많은 선수가 이 답정너에 가까운 질문에 정해진 답이 아닌 엉뚱한 답을 내뱉곤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최수원은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아, 왜 양키스를 선택했냐고요? 글쎄요. 그게 질문 거리가 될까요? 양키스잖습니까. 뉴욕 양키스. 야구 선수에게 선택권이 있고 그 선수가 뉴욕 양키스를 오는데 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정말이지 정답이라는 단어 말고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가장 완벽한 모범 답안이었다.
인터뷰어의 질문이 이어졌다.
“여기 최수원 선수의 리포트가 있습니다. Hit는 80. Power는 75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정말 특이하다고 할 만한 점은 Arm이 55라는 점입니다. 사실 최수원 선수의 경우 속구 구속이 100마일을 훌쩍 넘어가는 투수인데요. 이런 이해하기 힘든 점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 부분도 과연 양키스의 스카우트들이 능력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네?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의 Arm을 그렇게 평가한 부분이 대단하다고요?”
최수원의 설명이 시작됐다.
“이 숫자들은 제가 가진 최대한의 능력치가 아니라 스카우트들이 생각했을 때 제가 경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치입니다.”
“어······. 그게 무슨 차이죠?”
“간단합니다. 저는 선발로 등판해서 공을 던질 거고. 그 외에 일루수나 지명 타자로 올라가겠죠.”
“아!! 그러니까 결국 일루수로 그라운드에 올라가더라도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는 어깨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전제한 숫자다. 뭐 그런 말씀이시군요.”
“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숫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이게 더 현실에 가까운 숫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레포트 작성하신 분은 상당히 능력이 있는 스카우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할 때 한 가지 좀 틀린 점이 있긴 합니다.”
“그게 어떤 부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인터뷰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라면 그 시선이 인터뷰어에게 고정된다. 어쩔 수 없다.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답을 하는 것은 너무 일반적인 버릇이니까.
하지만 최수원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이미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였기 때문일까? 그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카메라로 옮겨갔다.
질문을 하는 것은 인터뷰어지만 그것은 사실 이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을 대신하여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저는 저 스스로 힘보다 기술이 더 훌륭한 타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리포트를 작성한 스카우트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power에 75점을 주고 hit에 80점을 준 걸 보면 말이죠. 하지만 틀렸습니다. 제 hit가 80점인 건 그냥 20-80 스케일에서 최고점이 80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제 타격에 점수를 매긴다면 기존의 20-80 스케일 대로라면 hit와 power 모두 80점. 제 마음대로 점수를 매긴다면 hit는 85점. power는 80점 정도로 매기는 게 타당하겠군요.”
“······.”
잠깐의 정적.
인터뷰어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영상을 편집하던 이들은 굳이 그 잠깐의 정적을 편집하지 않았다. 아니, 고작 15분짜리 영상에 3초가 넘어가던 그 시간을 오히려 미세하게 늘리기까지 했다.
“하하······.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네요.”
“글쎄요. 이게 그냥 자신감일지 명확한 자기객관화일지는 이제 몇 달만 지나면 확실히 알 수 있겠죠. 양키스를 사랑하는 팬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양키스의 마지막 0번 선수가 데뷔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암전.
짧지만 굵었던 화제의 신인에 대한 영상이 YES 네트워크를 통하여 공개됐다. 그리고 그야말로 패기 그 자체로 보이는 인터뷰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에 양키스에 그 신인 인터뷰 봤어? 한국에서 뛰다 온 그 녀석.”
“어, 당연히 봤지. 이거 어린놈이 어디 독립리그에서 좀 날렸다고 자신감이 너무 과다한데?”
“한창 그럴 때지. 작은 리그라고는 하지만 73홈런 타자라잖아. 세상이 막 자기 거 같고. 자기가 세상의 주인공 같고. 근데 보기 좋잖아. 저 땐 저런 패기가 있어야지. 안 그래?”
“하긴, 아시안들은 좀 대체로 얌전한 게 흠인데. 얘는 인터뷰 하는 거 보니까 그럴 일은 없어보이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시안이 얌전하다니. 대체 언제 적 이야기하는 거야. 요즘 메이저에서 뛰는 아시안 중에서 얌전한 아시안이 어딨다고.”
“아, 하긴 디트로이트에 그 미친놈도 같은 코리안이지?”
그리고 그 가운데 몇몇은 최수원이라는 선수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그 훈련에서 보여주는 피칭이 제법 쓸만하게 보였으며 심지어 타격 능력이 그 피칭보다 오히려 훌륭하다는 평가 덕분이었다.
“스완 얘 넥플에 다큐가 있는데?”
“그러게 한국에서 탑스타였다더니 별 게 다 있네.”
뉴욕 시민들의 관심. 물론 아직까지는 딱 거기까지였다. 글로벌 OTT의 다큐멘터리가 순위권으로 역주행하는 그런 일까지는 없었다.
“이거 반응 괜찮은데 한 편 더 찍어보죠?”
“스완? 걔 이미 플로리다로 갔다는데?”
“어차피 플로리다 스프링 트레이닝 대비해서 보낼 팀 있잖아요. 몇 명만 더 일찍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적어도 뉴욕 양키스의 오래된 팬들. 야구를 하지 않는 겨울에 양키스의 경기 하이라이트와 선수들의 근황 등에 대한 방송까지 다 챙겨 보는 골수 팬들에게 최수원이라는 이름은 다음 시즌에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이름으로 확실하게 못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