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57화 (257/305)

257화. 내 사전에 두번째 마린스는 없다(5)

“하하하. 걱정하지 마. 어차피 뉴욕 시민들도 이런 찌라시를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심지어 제대로 본인이 찍힌 사진을 가져다 대도 안 믿는 경우가 있을 정도인데 이건 누가 봐도 스완 너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잖아.”

잭 워싱턴이 크게 웃었다.

“뉴욕 기자들이 극성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상인 것 같네요.”

“한국이야 SNS에 떠도는 말들이나 적당히 조합해서 기사로 올리는 수준이잖아. 뉴욕의 파파라치들과 찌라시들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다고. 거기에 비교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기레기에 뭐 역사와 전통까지 나올 일인가 싶긴 했지만 확실히 굳이 누군지 모를 동양인의 측면 사진까지 저화질로 첨부한 것이 기레기 짓에도 성의가 있어 보이기는 했다.

“그나저나 아직 뉴욕이랑 계약한 것도 아니고. 제가 뭐 메이저를 뛴 것도 아닌데 이런 찌라시라니. 좀 놀랍긴 하네요.”

“뉴욕이잖아. 미국에서도 야구의 인기가 좀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 뉴욕에서 만큼은 NFL보다 MLB 아니겠어?”

그래, 확실히 뉴욕은 뉴욕이다. 특별한 건 인정해야겠다. 시간을 되돌아 오기 전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9년을 뛰면서 MVP 2위만 몇 번을 할 정도로 인지도 높은 선수가 됐음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세 번째로 2위 했던 해에는 진짜로 밤새 술 마시고 떡이 돼서 집에 갔음에도 기사 한 줄 나지 않았었다.

“아무튼 뉴욕 팀들 가운데 하나와 계약을 할 거라고 하니 속이 좀 편하네.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아직도 장사가 잘 안되는 겁니까?”

“어휴, 말도 마라. 제임스 코퍼레이션이 우리 지분 49%를 헐값에 후려쳐놓고는 딱히 손님을 물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생들이랑 대학생들 봐주는 거로 간신히 임대료 내고 밥값이나 하고 있는 거지.”

“제가 다니는 피칭랩이라고 홍보 하시지 않았어요?”

“했지. 당연히 했지. 근데 우리 피칭랩이잖아.”

내가 유명한 건 타격이고 딱히 나에게 피칭을 가르쳤다고 영업에 크게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스읍······. 그거 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인데요?”

“그러니까 빅리그에서는 투수로도 두각을 좀 드러내자. 옆에서 아주 꼼꼼하게 살펴줄 테니까.”

사실 워싱턴 형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생이 좀 꼬였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지금 벌써 잘 나가기 시작할 시점이다. 제임스 코퍼레이션의 지분 투자를 받은 게 문제였으려나?

LA에서 뉴욕까지.

나흘 동안 혼자 훈련을 해왔지만 확실히 이렇게 옆에 인스트럭터가 딱 붙어서 받는 훈련은 또 다르긴 달랐다. 단순히 몸을 푸는 것조차도 도구를 써서 혼자 푸는 거랑 이렇게 옆에서 도움을 주는 건 달랐으니까.

한바탕 운동을 끝내고 잭 워싱턴이 나에게 물었다.

“계약 체결되면 바로 플로리다로 갈 거지?”

“네, 그래야죠. 뉴욕은 운동하기에 좀 춥잖아요.”

“그렇지. 게다가 기자들도 좀 극성이라 여러 가지로 신경도 쓰일 거고.”

“아니, 진짜 뉴욕 선수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선수들이 다 너 같지는 않지. 그리고 그만한 인지도를 갖게 되면 휴식일에는 뉴욕에 있는 게 아니라 햄튼으로 가잖아. 그 이번에 집값만 1억 6천 2백만 달러했다던 바로 거기 말이야.”

“1억 6천 2백만이라니. 가격을 너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나도 언젠가 그런 데 살아보는 게 꿈이니까. 젠장, 여기 스튜디오 낼 때만 하더라도 나도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가능할까?

솔직히 잭이 어지간히 크게 성공을 한다고 해도 2천억짜리 집에 사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살 수 있을 거에요.”

“그럴까?”

“당연하죠. 햄튼이라고 뭐 집이 전부 1억 달러 넘기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거기도 싼 집은 있겠죠.”

“아무리 싸도 최소 팔백만은 할걸? 적당히 괜찮은 집이면 천만은 다 넘길거고.”

“제가 다니는 피칭 랩의 사장님인데 그 정도는 벌어야죠. 메이저리그 수억 달러씩 받는 선수들이 줄줄이 고객으로 들어올건데요.”

“어휴, 진짜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다.”

호텔, 피칭랩, 호텔, 피칭랩.

오직 훈련만으로 보내는 며칠의 시간이 지나갔다.

***

[메츠? 양키스? 과연 최수원 선수를 품에 안는 팀은 누가 될까?]

[뉴욕의 화려한 밤거리. 곳곳에서 속출하는 최수원 선수의 목격담!!]

[충격!! 최수원의 미국 진출이 섣부른 이유!! 최수원의 고교 시절 은사 Y씨 ‘최수원은 게으른 천재. 한국에서 충분히 더 기량을 쌓은 이후 진출 했어야 했다.’]

[박동혁 해설 위원 ‘완전히 헛소리. 최수원 선수는 지금 훈련에 매진 중.’]

“수원아 너 지금 한국에서 장난 아니야. 아니, 우리 이달 말에 스프링 캠프 출발하는 기사 냈는데 기자들이 그건 묻지도 않는다니까. 죄다 너랑 관련된 인터뷰만 하는데 어휴······.”

“메이저리그잖냐. 그리고 애초에 마린스 스프링 캠프 출발하는 건 대단한 기삿거리도 아니잖아. 매년 하는 일인데 뭐.”

“뭐래? 직전 시즌 통합우승팀의 스프링 캠프인데 당연히 대단한 기삿거리지.”

“어이구, 그래 참 대단하네.”

“그나저나 이거 너 반박 기사는 안내냐? 정훈 선배님한테 들어보니까 환락의 밤은커녕 매일 훈련만 하고 있다면서.”

안 그래도 며칠 전 광란의 밤 기사가 처음 떴던 날 정확하게 1시간 후에 한국에 번역이 된 기사가 떴고 그걸 읽은 정훈 선배에게 바로 전화가 걸려 왔었다.

올바른 유흥은 선배에게 배워야 하는 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뉴욕에 오겠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그 기사 뜬 게 고작 한 시간 정도 됐는데 광란의 밤 보내던 내가 갑자기 호텔 방에서 선배 전화 받는 게 말이 되냐고 답해줬었다.

“요즘 계약 문제들로 에이전시가 좀 바빠서 한국 언론까지는 신경을 잘 못 쓰는가 보네. 근데 나 훈련하는 거 기자들이 와서 사진도 많이 찍어가고 그랬는데도 그런 이야기가 계속 도는 거 보면 진짜 참 한국 기자들도 어지간하네.”

“매일 훈련만 한다고 하는 기사보다 그게 더 자극적이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댓글로 예전에는 SNS 짜깁기 기사가 관련 자료도 없이 진짜 카더라로 무성의 했는데, 지금은 번역 기사라서 성의는 있다고 그러더라.”

“그래 봐야 성의 없는 쓰레기냐. 성의 있는 쓰레기냐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훈련을 하루 종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래저래 파파라치들이 사진을 찍어대는 게 괜히 신경 쓰여서 어디 돌아다니기도 좀 그랬다. 특히나 팀이 아직 결정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덕분에 훈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렇게 호텔에서 사람들과 통화 하거나 적당히 영화, 드라마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근데 그래서 지금 어떻게 얼마나 진행된거야? 메츠야? 아니면 양키스야?”

“글쎄다. 일단 제임스가 계속 협상 중이기는 한데. 몇 가지 사소한 부분들만 잘 조율되면 될 것 같아.”

“보니까 지금 SNS에 앤서니가 너한테 자기 팀 오라고 러브콜 하는 영상도 떴던데.”

“앤서니 볼피?”

“어. 그 양키스 유격수 있잖아.”

앤서니 볼피라면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양키스의 유격수로 데릭 지터의 후계자 소리를 듣는 선수다.

사실 데릭 지터가 2014년에 은퇴한 이후로 정말 수많은 선수들이 데릭 지터의 후계자 소리를 들으며 데뷔했지만 엔서니 볼피는 그 가운데서도 좀 특별한 편에 속했다. 2019년 1라운드 30번으로 드래프트 된 양키스의 로컬 보이 출신으로 데릭 지터 이후 가장 어린 나이에 데뷔한 양키스 선수였으니까.

게다가 성적도 나쁘지 않아서 25년 시즌과 27년 시즌에는 올스타에도 출장했다. 물론 양키스라는 팀빨을 좀 받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긴 했지만, 내가 있던 미래에서는 뭐 데릭 지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6년 동안 40이 넘는 war을 쌓고 은퇴한 준수한 선수였다. 물론 제2의 데릭 지터라는 평가는 결국 허황한 이야기였지만 아니, 애초에 비교 대상이 그 데릭 지터인 것 자체가 좀 가혹한 일이다.

“근데 뭐 어디 SNS에 나 오라고 러브콜 한 선수가 앤서니 볼피 뿐이겠냐. 양키스에 메츠에 다저스에. 솔직히 요새는 그냥 팔로워 늘리려고 내 이름 올리는 거 아닌가 싶은 수준이지.”

“하긴 나도 요새 SNS에 사진 올릴 때 해시태그에 네 이름 꼭 넣잖아. 어제 먹은 점심 사진에 네 이름 넣으니까 좋아요가 4천개 달리더라.”

“아니, 니 점심 메뉴 사진에 내 이름은 해시태그를 왜 다는 건데.”

“좋아요가 4천개가 달리니까? 그리고 그냥 니 이름만 단 건 아니야. 그 바로 뒤에 베스트 프렌드도 꼭 넣는다고. 아, 나 이제 운동 나갈 시간이다. 아무튼 팀 정할 때 고민되는 거 있으면 꼭 연락하고. 나중에 또 보자.”

뉴욕을 기준으로는 늦은 밤이었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아직 오전이다.

마린스의 스프링 캠프 시작까지 삼 주 정도의 시간이 남은 상황에서 그래도 개인 훈련을 꾸준히 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하루 뒤.

내 앞에 서류 네 부가 놓였다.

“양키스와 메츠의 최종 조건입니다. 이건 한국어 번역본이고요. 아무래도 양키스 쪽 조건이 메츠보다는 조금 박합니다. 특히 클럽하우스에 관련된 부분은 선수단의 전통이라며 프런트에서 터치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거라며 상당히 완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이건 솔직히 좀 놀랐다.

사실 금액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한선이 그어진 만큼 다른 여러 가지 부분에서 편의를 얻어낼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근데 클럽하우스 라커룸 자리부터 해서 비행기 자리까지 디테일하게 받아낼 줄이야. 더 놀라운 점은 메츠는 그런 조건까지 다 수용을 해줬다는 점이다. 과연 어메이징······.

“아뇨, 충분히 고생하셨습니다.”

이 조건들을 받기까지 사흘. 나는 충분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래서였을까? 결정은 빨랐다.

메츠의 조건들은 좋았다.

하지만 난 메츠에게서 KBO 향기를 맡았다.

구단 자체가 수익이 되는 것이 아닌 구단주의 포켓 머니로 운영되는 구단.

과연 마린스는 브레이브스보다 좋은 팀이었나.

두 팀을 모두 뛰어본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브레이브스가 돈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마린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팀이었을 것이다.

“양키스로 가죠.”

***

[뉴욕 양키스. 아시아에서 온 슈퍼맨의 선택을 받다!!]

[치열했던 경쟁의 승자는 결국 뉴욕 양키스!!]

[스티브 코헨 ‘그는 자신의 선택이 아주 커다란 실수였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 아니, 깨닫게 해주겠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브라이언 캐시먼의 손을 맞잡았다.

“자, 사진 찍겠습니다.”

보통 FA 계약 같은 거 하면 많이 찍는 구도의 사진.

나를 가운데 두고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과 에이전시인 제임스 밀러가 양쪽에서 유니폼을 쫙 펼친 채 카메라를 향해 크게 웃었다.

이름이 쓰이지 않는 핀 스프라이트에는 오직 숫자만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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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시즌.

내가 뛸 팀과 나의 등번호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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