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52화 (252/305)

252화. 겨울

사실 마린스의 우승은 이미 반쯤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4경기 516타석 364타수 145안타에 홈런만 74개. 0.398/0.554/1.091. 이게 어디 사람의 기록입니까? OPS만 1.0을 넘어가도 MVP급이라고 봐야 하는데 이번 시즌 최수원 선수는 장타율이 1.0을 넘어서 1.1에 육박했습니다. 최수원 선수의 타격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도 어지간한 팀의 클린업이에요.”

이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0.199/0.277/0.545면 이번 시즌 제 슬래시라인과 엇비슷하긴 하죠.”

“그런데 그런 선수가 심지어 투수까지 했습니다. 159.6이닝에 평자책이 2.93. 이닝 숫자가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리그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성적입니다. 이런 선수가 있는데 우승을 못 한다? 세상에 그런 팀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반쯤 예견이 돼 있던 일이라고 해도 그게 무려 ‘마린스의 우승’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던 수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35년.

그 얼마나 긴 시간인가. 세대가 바뀌고 사상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제가 학교에서 배울 때 일제 강점기가 35년이라길래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실감이 안 갔었거든요. 근데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이거 엄청 길어요.”

1993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에게 마린스의 우승이란 공상의 영역이었다. 아니, 사실 2027년 현재 93년생 정도면 아이도 아니다. 이미 만으로 서른넷인데 아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마린스 우승을 본 사람이 사십대 후반이 돼서 다시 마린스 우승을 보는 기분이란 과연 어떠할까?

[부산 마린스!! 우승의 경제 효과. 약 2조 4천억으로 추정!!]

[단 세 경기의 한국 시리즈!! 부산이 들썩였다!!]

국제 경기 때나 나오는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경제 효과’가 언론을 통해 송출되고 마린스 우승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멤버들은 연일 방송으로 불려 나갔다. 특히 은퇴를 확정지은 캡틴 이규만은 요즘 유행하는, 하지만 그만큼 성공하기 힘든 스포테이너의 길에 매우 무난하게 합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규만의 성향이 사실 연예계 쪽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마린스 우승이 갖는 화제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최수원 선수는 지금 뭐 하고 있을지가 참 궁금하네요. 이규만 선수는 종종 연락하고 지내시죠?”

“네, 단톡방에 안부 정도는 꾸준히 올리고 있습니다.”

“아, 우승멤버끼리 단톡방이 있으신 건가요? 꽤 시끄럽겠네요?”

“전체방이 있고, 투수방이랑 야수방이 있는데 전체방은 좀 공지 같은 거 주고 받는 느낌이고 야수방이 살짝 시끄럽죠.”

하지만 이렇게 스포테이너로 착착 성공의 길을 걷고 있음에도 이규만은 종종 사직 야구장이 그리웠다. 프로 데뷔 이후로 23년. 초등학교 때 처음 야구공을 쥔 이후로는 33년이라는 매우 긴 세월 동안 질릴 정도로 야구를 했음에도 그곳이 그리웠다.

“그나저나 이규만 선수도 언젠가는 지도자로 다시 야구계로 복귀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어이고, 종혁 씨 그거 너무 질문이 일러요. 보통 은퇴하면 한 1, 2년은 야구장 쳐다 보기도 싫거든. 근데 이게 또 묘해서 몇 년 지나면 다시 슬금슬금 생각이 나. 그러면 이제 다시 돌아갈 때가 된 거지. 그 때 팀에서 불러주면 지도자 하는 거고. 아니면 나처럼 아무도 안 찾아줘서 해설하는 거고. 뭐 그런 거지.”

이규만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복귀할 것 같습니다. 일단 내년에는 미국에 연수를 가기로 했거든요.”

“아니, 이렇게 바로요? 잠깐 쉬는 기간도 없이?”

한창 스포테이너로 주가를 올릴 수 있는 시기였다. 우승 단물이 좀 빠지면 그때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주변에 많은 이들이 그렇게 조언했다.

하지만······.

우승까지 무려 35년이 걸렸다.

하지만 이 우승이 과연 마린스의 우승이었을까?

0.398/0.554/1.091. 이런 타자가 KBO 역사에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이규만은 야구를 사랑했다.

그리고 마린스 또한 그만큼 사랑했다.

그가 꿈꾸는 것은 최수원이 없더라도 우승할 수 있는 팀.

그래서 먼 훗날 누군가가 더 이상 OPS 1.645는 칠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러 돌아왔을 때 이규만 자신처럼 영광스러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팀 정도는 만들어두고 싶었다.

“인생 2막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은퇴한 늙은 선수. 하지만 지도자로는 아직 많이 젊은 이규만이 활짝 웃었다.

***

2027년 12월.

메이저리그 윈터 미팅이 열렸다.

30개 메이저리그팀과 120개 마이너리그팀의 구단주와 단장 기타 임직원들. 사무국의 임원들과 자신을 어필하려는 선수의 에이전시들. 그리고 구단에 취업하려는 구직자들과 이 광경을 취재하려는 언론인들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샌디에이고의 힐튼 호텔로 모여들었다.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설득은 좀 먹히던가요?”

“일단 최종적으로 고려하는 후보군에는 저희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 시즌 성적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고······. 그래도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가 지속적으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쪽을 최대한 공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국인 선수의 성공 여부에는 현지 적응도 큰 영향을 미치니까요.”

“우리의 전력보강 플랜에 대해서도 충분히 어필 했습니까?”

“네, 그 부분은 아주 흡족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2027 윈터미팅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당연히 최수원이었다.

정확히 10년 전.

2017년 윈터미팅의 최대 화두는 오타니 쇼헤이였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그의 투타겸업에 대하여 몹시 회의적이었다.

‘하위 리그에서나 가능한 퍼포먼스.’

‘그가 일본에서 이룬 기록은 존중한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수준이 다르다. 결국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변경된 포스팅 룰과 국제유망주 규칙에 의거하여 고작 포스팅피 2천만 달러. 그리고 연 50만 달러 수준의 저렴한 가격에 그를 데리고 올 수 있음에도 메이저 구단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제시한 투타겸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2월 초 윈터미팅 당시 그의 행선지는 에인절스를 비롯한 7개 팀으로 좁혀진 이후였다. 그래, 고작 7개 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2017년 윈터미팅의 최대 화두는 오타니 쇼헤이였다.

그리고 2027년 현재.

당시 투타겸업이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던 이들은 이제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

심지어 오타니 쇼헤이의 경우 기본적으로 2,000만 달러라는 포스팅피를 닛폰햄에 지불해야 한다는 작은 장벽이 존재했다. 빅마켓에게 2,000만 달러야 아무렇지 않은 금액이지만 스몰마켓 팀들에게 2,000만 달러는 유망주에게 부담 없이 질러볼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수원의 경우 그런 장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18년 포스팅 시스템 개정 이후로 포스팅피는 그 선수의 보장 금액을 기준으로 책정되기 때문이다.

즉 어느 구단이건 최수원을 영입하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의 크기는 오타니 쇼헤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고 투타겸업에 대한 리스크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게 평가되는 상황이다.

“지금 저희는 2027 윈터미팅이 열리는 샌디에이고 힐튼 베이프런트에 나와 있습니다. 올해 윈터 미팅의 경우 단연 최수원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덕분에 정말 많은 현안들이 뒤로 밀린 상황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현안들이 뒤로 밀렸죠?”

“일단 30개 구단 가운데 무려 17개 구단이 지난 7월 이후 국제유망주 계약을 단 한 건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최수원 선수를 잡기 위해서는 국제유망주 계약금 전액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13개 구단은 최수원 선수를 포기한 거라고 봐도 될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3개 구단 가운데 4개 구단은 이미 패널티로 국제유망주 계약금에 제한이 걸린 상태이고 나머지 구단들 가운데 다수도 계약금 400만 달러 정도는 최수원 선수에게 일종의 보너스일뿐이니 포기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말린스와 애슬레틱스는 오히려 이걸 기회로 다른 구단들이 놓친 국제유망주들을 수집하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시즌 FA 자격을 얻은 도미닉 루카스나 앤드류 구리엘 제이크 페레즈 같은 선수들이 아직까지 팀을 정하지 않은 것도, 그리고 그 예상 금액이 시즌 초를 크게 상회하는 것도 모두 최수원 선수의 영향이라고 봐야할겁니다.”

“그 이유는요?”

“저희는 최수원 선수의 조건 가운데 ‘우승에 지속적으로 도전 가능한 팀’이라는 조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언론에서는 지난 KBO의 2025년 시즌이 최수원 리그였던 것처럼 이번 MLB의 2027년 스토브리그 역시 최수원 리그라 부르는 실정이었다.

‘과연 최수원은 어느 팀으로 갈 것인가.’

물론 야구계는 보수적이며 미국의 야구계는 한국보다 오히려 더 크게 보수적이다. 그렇기에AAAA급 리그 평가를 받는 NPB도 아닌 AA 수준에 불과한 KBO를 폭격했다고 최수원의 실력이 MLB에서도 MVP급일거라고 판단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올스타급은 되지 않을까?”

“뭐, 당장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19살에 AA를 그렇게 폭격했으면 포텐셜은 최소 올스타급이라고 봐야겠지.”

FA 선수를 기준으로 현재 WAR(Wins Above Replacement) 1의 가치는 약 1,300만 달러. 하지만 최수원의 경우 투타겸업 선수였고 이는 로스터 한 자리의 창출을 의미했으니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최수원은 국제유망주 규약을 따라야 하는 처지이며 계약 역시 마이너 계약이다. 적어도 3년은 최저연봉으로 써먹을 수 있는 올스타급 선수라는 의미다. 소프트캡이라고는 하지만 제법 단단한 샐러리 규정을 갖고 있는 메이저리그에서 올스타급 선수 하나를 최저연봉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의미는 절대 작지 않다.

그렇다면 그 작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슈퍼 을(乙) 최수원은 지금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자면 KBO에서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최수원은 수많은 광고와 방송 출연 제의를 뿌리치고 이미 진즉에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구단들과 컨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뇨, 현재 저희는 최수원 선수의 대리인을 통한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겨울.

시즌을 끝낸 선수가 길게 휴식하고 몸을 정비하는 시기.

부산 마린스 35년 만의 우승이라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한 최수원은 이미 달성한 기록을 자랑하는 대신 다음 스텝을 위하여 묵묵히 땀을······.

“220lb!!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가능하다고 그랬죠?”

“그러게요. 이게 진짜 되네.”

아니, 묵묵하게 고기를 섭취하고 있었다.

최수원.

마침내 100kg까지 증량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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