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한국 시리즈(16)
“아니, 언니. 마린스는 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 우리 최수원 선수가 저만큼 했으면 응? 좀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은 해줘야지. 안 그래요?”
“그냥······. 마린스잖아.”
박은진이 쓰게 웃었다.
아주 오랜 시간 피닉스의 팬이었던 박은진은 이세희의 저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언니들. 진짜 이 오빠가 은진 언니 남자 친구에요? 되게 잘생겼다.”
“어, 아주 애틋하게 죽고 못 사는 그런 트루 러브지. 요즘 은진 언니 우리 미국 진출 안하냐고 자꾸 묻는 거 다 저 오빠 때문이잖아.”
“왜요? 저 오빠 미국 가요?”
“어, 뭐 메이저리그인가? 미국 간다고 하더라. 돈도 엄청 벌 거라던데? 막 천억, 이천억. 이렇게.”
“네? 천억이요? 언니 남자친구 진짜······. 와······. 언니 너무 부럽다. 이 정도면 그냥 미국 짐싸서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자리에 유일하게 아직 데뷔하지 못한 동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박은진이 손을 휘저었다.
“아니, 남자친구는 무슨. 그냥 동창이라니까. 동창.”
“에이, 언니. 동창은 저도 있거든요? 그리고 세상에 어느 동창이랑 메신저 하는데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해요.”
“맞아요. 저번에는 글쎄 우리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대학 행사 뛰었던 그 날에 난 졸려 죽겠는데 화상통화 할 꺼라고 화장을 고치더라니까요.”
“와, 진짜 그 정도면 사랑이네. 사랑.”
동생들의 재잘거림에 박은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도 천억이라는 숫자에 충격을 받은 그 아이는 멍한 표정으로 천억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천억이면······. 우리 회사 시가총액이 천칠백억이니까······.”
“세정아, 넌 아직도 그 천억 타령이야? 그거 거의 최소치라니까. 들어보니까 최소한 일억달러고. 진짜 삼사억달러도 거뜬할거라고 하더라.”
“네? 사, 사, 삼사억 달러요? 잠깐. 그러니까······. 오늘 환율이 1342원이니까······. 맙소사!! 오천삼백육십팔억?”
“와, 뭐야? 세정이 너 계산 되게 빠르다.”
세정이 박은진을 바라보며 강하게 물었다.
“은진 언니. 저 오빠 언니 남자친구 아니라고 그랬죠?”
“어······. 어.”
“진지하게 남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야!! 강세정!! 이게 아직 데뷔도 못 한게. 아주 발라당 까져가지고?”
“언니, 지금 데뷔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 아무래도 이상형을 만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데뷔는 다음 생애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지금 자세히 보니까 저 오빠 생긴 것도 좀 제 스타일이네요. 제가 미국 따라가서 내조 잘하겠습니다.”
티격태격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동생들을 바라보며 박은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 그래, 미국이다. 무려 비행기를 타고도 여기서 14시간 반이 걸리는 먼 곳이다. KTX를 타고 세 시간 거리인 부산도 너무 멀어 쉽게 볼 수 없었는데 미국은 과연 어떨까?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박은진의 그런 고민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로.
-뻐엉!!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도 호쾌하여서 은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야!! 강세정!! 어떡할 거야!! 너 때문에 은진 언니 울잖아!!”
“언니, 울지 마요. 우리도 더 성공해서 미국 진출하면 되지.”
“맞아!! 이번에 우리도 어? 태국에 콘서트 하러 가잖아. 그렇게 차근차근 늘려나가는 거지.”
***
세상에는 종종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건 일부러 짰다고 해도 믿기 힘든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이다.
하지만 지구에는 70억의 사람이 살아간다. 그리고 70억명의 사람들이 부대끼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에서 말하는 ‘상식’이란 것도 결국 100번 중에 99번. 1,000번 중에 999번 정도의 일에 불과하다. 그걸 고려해보면 100번 중에 1번. 1,000번 중에 1번의 일이라는 건 어쩌면 기적이 아니라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 물론 사람이 시간을 거슬러서 되돌아온다는 건 1,000번 중에서 1번이 아니라 1조 번을 돌려봐도 한 번도 생기지 않을 일이니까 기적이 맞다.
그리고 그런 기적과 비교하자면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내가 선발로 등판했고, 또 하필 그 경기에서 내가 각성한 것처럼 미친 듯이 공을 잘 던져서 지금까지 안타를 하나도 허용하지 않은 것 정도는 기적 축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딱!!!
[쳤습니다!! 조유진!! 우익수의 키를 살짝 넘어가는 조유진의 적시타!! 3루의 서경준은 여유롭게 홈으로!! 2루의 이주혁!! 멈추지 않습니다!! 홈까지!! 홈까지!! 홈에서!!]
“세이프!!”
또한, 2루에 있던 이주혁이 저걸로 홈까지 들어온 것도 그냥 이주혁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서경준, 이주혁, 조유진의 연속 안타. 이건 어쩌면 기적이 아닐까?
확률을 따져봤을 때 어쩌면 내가 오늘 경기에서 퍼펙트할 확률보다 더 낮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도 앞서 규만 선배가 1루까지 목숨 걸고 달린 게 나름대로 자극이 되긴 된 모양이다.
[8회 말!! 조유진의 2타점 적시 안타!! 마린스가 순식간에 2점을 추가하며 이제 점수는 4:0!!
대기 타석에 있던 강라온이 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아, 브레이브스 투수 교체!! 투수 교체입니다.]
[살짝 늦은 감이 없잖아 있는 타이밍입니다.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이요.]
[장야오쉰 선수 내려가고, 어? 최민혁!! 최민혁 선수가 올라옵니다.]
[지난 4차전에서 선발로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최민혁 선수. 고작 이틀을 쉬었을 뿐인데 불펜으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뭐, 오늘 경기 패배하면 내일은 없는 거니까 나쁘진 않은 선택 같습니다. 어차피 7차전에서 시리즈는 끝이 나니까요. 게다가 필승조들 역시 지난 2, 3, 4차전에서 연속으로 동원됐으니······. 하지만 이럴거면 한번 더 타이밍이 아쉽네요. 애초에 이닝 시작부터. 하다 못해 안타 하나 허용했을 때부터라도 최민혁 선수를 사용했으면 더 좋았을 거거든요. 박유성 감독이 하위타선이라고 너무 방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1할이라고 그랬었지.”
“네?”
“아니, 내가 타석 올라가기 전에 너랑 이야기 하고 올라간 거랑 그냥 조용히 올라간 거랑 거의 1할 정도 차이 난다며.”
“아, 네. 그랬죠.”
이정훈이 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솔직히 좀 불안하긴 불안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미신 같지만 실제로 한 시즌 정도 꾸준히 반복되면 일종의 루틴이라고 봐야 했다. 나한테 말 걸고 타석 나가면 방망이 붕붕 휘두르는 루틴.
“그래서 어느 팀을 갈 예정이냐?”
“네? 갑자기 이 타이밍에 뜬금없이 그런 걸 물으신다고요?”
“이 타이밍이니까 묻는 거야. 그래도 이번 시즌 너랑 제일 가까웠던 게 나잖냐. 뭐, 나도 이 개떡 같은 팀에 네 덕분에 약간은 정이 붙었고. 덕분에 어쩌면 나 다음 FA 때도 마린스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어······, 음······. 그게 그러니까······. 근데 정말 아직 뭐 정해진 게 없어요. 후보야 좀 있지만 아직 그냥 후보일 뿐이고요.”
“그러면 큰 곳으로 가라. 돈도 제일 많이 주고. 이왕이면 대도시. 뉴욕 양키스나 LA 다저스 같은 곳으로. 넌 그런 곳이 어울려.”
“노력해보겠습니다.”
-딱!!!
[삼구 째!! 잡아당긴 타구!! 유격수의 키를 살짝 넘어갑니다!!]
“나중에 놀러 갈 테니까 물 좋은 곳 많이 알아놔라. 혹시라도 어? 성공했다고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알겠냐?”
그야말로 사망플래그로 딱 좋은 멘트였다. 야구로 치자면 깔끔하게 삼구 헛스윙 삼진 정도 당하고 돌아오는 느낌이랄까?
1루에 있던 쪼유가 2루까지.
강라온이 1루에 무사히 안착했다.
주자 1, 2루.
마운드의 최민혁이 부드러운 마린스의 마운드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몇 번이나 발끝으로 마운드를 문질렀다.
타석에 이정훈이 섰다.
198센티의 투수와 176센티의 타자.
처음 만났을 때 투수는 나의 우승에 도움이 될 몇 안 되는 든든한 도우미였고, 타자는 팀 내에서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면서 소꿉장난하던 것들보다 더 도움이 안될 것 같던 참으로 경박하기 짝이 없는 문제아였다.
그리고 9개월.
든든하던 도우미는 강력한 적으로 마운드에 섰고, 경박하기 짝이 없던 문제아는 이번 시즌 나와 제일 죽이 잘 맞던 동료로 타석에 섰다.
대기 타석에서 최민혁의 공을 관찰했다.
-뻐어엉!!!
“스트라잌!!”
본래의 역사에서도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투수로 성장하는 최민혁이다. 마린스라는 억제기조차 억누르지 못한 재능이라는 뜻이다.
그런 재능이 특급 유망주 잘 키우기로 소문난 브레이브스를 만났다. 게다가 나도 몇 차례 상대해보면서 크게 도움이 됐던 학폭 조창혁 선생이 선배로서 직접적인 도움을 줬을 것이다.
앞서 강라온에게 안타를 맞았던 것은 그냥 몸이 덜 풀려서 생겨난 ‘사고’였던 것처럼 그의 피칭이 이정훈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8회 말 4:0. 주자는 1, 2루.
앞선 이정훈의 사망 플래그.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최민혁.
기적과도 같았던 서경준, 이주혁, 조유진, 강라온의 연속 안타.
그리고 대기 타석에서 대기 중인 나.
익숙한 클리셰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운수 좋은 날.
삼중살.
경기는 승리했지만, 그의 타석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부우웅!!!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존을 빠져나가는 슬라이더가 실로 깔끔했다. 내가 알던 최민혁의 슬라이더가 아니었다. 4차전에서 보여줬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이건 어쩌면 나라도 좀 긴가민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 번째.
-딱!!
파울.
그리고 네 번째.
또 파울.
볼카운트는 여전히 0-2.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이정훈이 잠시 헬멧을 고쳐 썼다. 그 사이로 보이는 머리가 덥수룩한 것이 내가 처음 만났던 이정훈의 스타일과는 조금 달랐다.
다섯 번째.
이정훈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노력이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것처럼 훈련은 성적을 담보할 수 없다. 때때로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성공할 때도 있고, 뺀질거린 선수의 성적이 빼어날 때도 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고, 프로야구 역시 원래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는 이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훈련하는 이는 훈련을 한다.
지난 1년.
이주혁도, 조유진도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이정훈도 있었다.
자기가 42억짜리 선수라고 간식도 제일 많이 샀고 프로 야구 선수는 TV 나오는 사람이니까 외모 관리도 자기 관리의 일종이라며 매주 한 번씩 가던 미용실을 두 달이 다 되도록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물론 그게 대단한 일이라는 건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그 정도는 다 한다.
2군에 가보면 정말 침식을 잊고 훈련에만 몰두하는 애들도 널렸다. 이 악물고 훈련하던 애들이 다 야구를 잘할거라면 독립야구단에서 야구하던 애들은 전부 프로가 돼야 했다.
근데 이정훈은 자기 말마따나 42억짜리 선수였다. 그래, 이정훈은 그렇게 술 마시러 돌아다니고 뚜껑 열리는 스포츠카 뽐내면서도 4년 42억짜리 계약을 받은 30세의 외야수다.
-딱!!
그러니까 서경준, 이주혁, 조유진의 연속 안타는 기적이라도 이 안타는 기적까진 아니었다. 이건 42억짜리 외야수가 올해 마지막 경기에서 드디어 42억 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뿐이다.
한국시리즈 6차전.
시리즈 스코어는 3:2.
8회 말 4:0.
주자는 만루.
과연 브레이브스는 여기서도 밀어내기 볼넷을 선택할까?
[아!! 브레이브스의 덕아웃 움직이지 않습니다.]
야구공이 날아왔다.
앞서 이정훈의 타석에서 미리 하나 지켜보지 못했다면 헷갈렸을 슬라이더다.
-뻐엉!!
초구 볼.
분명 아슬아슬한 승부였음에도 사직 구장에 가득 찬 관중들은 아낌없는 야유를 쏟아냈다. 마운드의 최민혁이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아냈다.
트레이드로 팔려나갔던 21살의 젊은 투수.
팀에서 가장 기대받았던 유망주가 얼마 전까지 자신을 응원하던 팬들에게 야유를 받는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두 번째.
바깥쪽 낮은 코스.
과연 최민혁이었다.
그런 야유 속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공을 뿌렸다.
-뻐엉!!
2구 연속 슬라이더.
관중들의 야유가 한층 더 커졌다.
세 번째.
조금 전보다 많이 몰린 코스.
몸쪽 깊숙한 곳에서 스트라이크 존 안쪽을 스쳐 지나갈 슬라이더였다.
한국시리즈 6차전.
만루에 볼카운트 2-0. 관중들의 아낌 없는 야유 속에서 21살짜리 투수가 흔들린 결과물이었다.
-딱!!!
그리고 그것이 19세.
내가 KBO에서 상대한 마지막 볼이었다.
[35년!! 마린스 35년 만의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