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한국 시리즈(14)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짜증?
아니다, 이건 짜증보다는 갑갑함이 더 어울린다.
사실 방망이 한 번 휘두르지 못 하고 경기가 끝나는 것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것도 야구라는 경기의 일부고 사실 타자 하나를 무조건 내보낸다는 건 상대팀 입장에서는 터무니 없는 수준의 피해를 감수하는 일이었으니까. 100%출루라는 건 결국 OPS가 1.0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래. OPS가 무려 1.0이다.
솔직히 이번 시즌의 나 정도 되니까 OPS가 1.645씩 되는 거지. 보통 리그 MVP정도 되야 간신히 OPS가 1.0 왔다 갔다 한다. 보통 1.1을 넘어가는 OPS면 아예 리그를 폭격했다고 봐야했고 1.2 넘어가면 그건 그냥 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시즌을 찍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1871년 이후 메이저리그 156년 역사에서도 OPS 1.1 넘긴 경우는 150번이 채 되지 않고 1.0의 경우도 500번이 조금 넘어가는 수준에 불과하다.
심지어 1.2? 메이저리그 역사상 1.2이상의 OPS를 달성한 선수는 고작 열다섯 명. 달성 횟수도 35회에 불과하다.
심지어 출루와 장타 가운데 더 가치 있는 건 출루율이다. 뭐 GPA처럼 출루율에 1.8의 가중치를 둘 정도는 아니더라도 출루만으로 OPS가 1.0이 된다는 건 실제 득점에 기여하는 비중이 그냥 OPS 1.0보다 훨씬 높다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다.
문제는 그렇게 야구가 진행됐음에도 우리가 지난 3차전과 4차전에서 패배했다는 점이었다.
[자 마린스와 브레이브스의 시리즈 6차전. 여기는 사직, 사직 야구장입니다.]
[오늘 선발로는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지난 1차전 첫 번째 타석 이후로 모든 타석에서 볼넷으로 출루하던 최수원 선수!! 그 출루 행진이 멈춘 게 바로 지난 경기였죠?]
그래, 솔직히 말해서 3, 4차전 패배도 패배인데 바로 지난 경기에서 오래간만에 신나게 방망이 휘둘렀다가 시원하게 헛스윙 삼진당했던 게 이 더러운 기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20타석이나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했으니 타격감이 많이 흐트러질 만했습니다. 아마 브레이브스 덕아웃도 점수가 4:0에 주자가 없던 상황만 아니었다면 거기서 승부를 지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마운드의 투수가 에이스 조창혁 선수였다는 점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죠. 사실 승부처도 아닌데 굳이 에이스의 자존심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으니까요. 덕분에 조창혁 선수는 최수원 선수와의 마지막 승부를 삼진이라는 좋은 결과로 마무리 하게 됐습니다.]
[방금 그 말씀은 KBO에서의 마지막 승부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군요.]
그래, 조창혁이 나한테 좀 호구 잡힌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빅리그에 가서도 솔리드한 3선발급 정도는 되는 투수다. 20타석 연속 볼넷 같은 걸로 타격감이 흐트러진 내가 삼진을 당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참 어제 경기도 브레이브스 입장에서는 뼈아픈 경기였어요. 만약 고설민, 태지완, 박재혁 선수가 있었더라면 거기서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그대로 승부를 굳혀서 상황을 매우 유리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4차전의 최민혁 선수가 없었더라면 3:1의 몰린 상황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 전에 불펜이 무너진 마린스가 정규시즌 1위에 실패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가정들이 지금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곳 부산!! 사직 구장에서 이번 시즌 마린스의 우승을 견인한 최수원 선수가 또 한 번 공을 던진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시리즈 6차전.
스코어는 3:2. 이왕이면 7차전에 3:3 상황이 조금 더 극적이긴 했겠지만, 그건 월드 시리즈 정도로 미뤄두자.
부산에서 두 경기, 서울에서 세 경기.
선발 출장도 있었고 휴식일 없이 모든 경기에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는 아주 좋았다. 뭐, 매일 방망이 들고 나가서 방망이 한 번 안 휘두르고 1루에 걸어 나가는 일상이었으니 몸 상태가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가 없었다.
지난 1, 2차전에는 하시던 일이 너무 바빠서 미처 내려오지 못했던 아버지도 오늘 경기는 보러 직접 내려오셨다. 서울에서 두 번 정도 같이 밥을 먹은 알렉산더 맥도웰 녀석과 테이블석에 나란히 앉으셨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녀석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은진이는 오늘 방송이 있어서 못 온다며 크게 아쉬워했다. 벌써 녀석과 알게 된 지도 3년이 넘었는데 본래라면 데뷔도 제대로 못하거나 이름 없는 아이돌로 스러졌을 녀석이 나의 따끔한 조언으로 자기 밥벌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한 느낌이다.
그 외에도 진우 선배나 여러 고등학교 선배, 동료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록 표가 너무 비싸서 직관은 못 왔지만, 시청률에 공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봤을 때 이 인간들 시청률 집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타석에 브레이브스의 1번 타자로 강호창이 올라왔다.
시리즈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7번 타순이었는데 어제 경기 맹활약을 하더니 어느새 1번 자리를 꿰찼다.
[사실 브레이브스 박유성 감독의 경우 타선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선수단 운용이 좀 믿음에 가까웠거든요. 그런데 이번 한국 시리즈는 상당히 유연하게 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1차전에 믿음으로 투수에게 재량권을 줬다가 1:0으로 패배한 탓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단기전에서는 저런식으로 운용하는 게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야잘잘이고 올놈올이라지만 1년간 쭉 이어지는 정규시즌 경기와 달리, 이런 토너먼트에서는 그 기량이 올라오는 타이밍이 경기가 끝난 이후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몸이 근질근질했다.
서울에서 있었던 경기에서는 1루에 걸어 나가서 조금 달리거나, 아니면 서 있다가 돌아오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1루 응원단장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마음대로 방망이 한 번 휘둘렀던 타석에서는 또 결과가 좋지 못했다. 게임도 아깝게 클리어에 실패했을 때 가장 더 하고 싶어지는 거고, MVP도 2위만 몇 번씩 해줘야 1위가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그래, 나는 지금 야구가 매우 하고 싶었다.
***
오랜 인연이었다.
뭐 썩 유쾌한 인연은 아니었다. 녀석에게도 그리고 안병영 자신에게도 말이다.
“새끼. 진짜 인기 많네.”
어디로 고개를 돌려봐도 보이는 것은 79번 최수원뿐이다.
이해할만하다. 어쩌면 안병영 자신도 화면 너머로만 최수원을 볼 수 있었더라면 지금 79번 유니폼 하나 정도는 사서 입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단순히 녀석이 대단한 선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녀석의 플레이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프로에 입단한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최수원이었다.
“아, 네. 제 후배 맞습니다. 뭐 신입생 때부터 대단했죠. 선배 대접이요? 음······. 뭐 나쁘진 않았는데 그 나쁘지 않은 게 영 기분 나쁜 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면······.”
안병영이 슬램덩크에서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단연 서태웅일 것이다. 이유는 심플하다. 그냥 재수가 없다.
‘북산을 선택한 이유요?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워서요.’
그래.
최수원 놈은 그런 서태웅을 닮았다.
‘중앙고에 온 이유요? 음······. 감독님이 집 가까우니까 기숙사에서 생활 안 해도 된다고 하셔서요.’
누군가는 목숨 걸고 하는 야구가 그냥 공놀이인 것 같았다. 심지어 그 그냥 공놀이를 반짝반짝 빛나게 잘한다. 배알이 꼴리다 못해 뒤틀릴 지경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부러워서 그에 반해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내가 가진 것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 반짝거리는 것에 흙먼지를 묻히려 했던 치졸했던 어느 머저리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야구를 했다.
그래 뭐, 어쩌면 지금 안병영 자신이 프로에 적을 둘 수 있었던 것도 최수원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돌멩이는 아무리 닦아도 보석이 될 수 없었다.
안병영 자신과 최수원의 재능이 그러했다.
한국 시리즈답게 표는 더럽게 비쌌다.
아버지가 회사 사장인 어느 놈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에게 27만 4천원짜리 암표는 정말 큰 마음을 세 번 정도 먹어야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계약금 7천만 원에 매출 3천만 원짜리 개인사업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
반짝이는 재능의 주인공은 그 쪼잔한 악당 따위는 기억도 못 할 만큼 나아갔겠지만, 그럼에도 쪼잔한 악당은 그 반짝이는 재능의 주인공을 보러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외야 끄트머리의 어딘가.
한때 바로 앞에서 공을 던지던 후배가 그야말로 까마득한 점으로 보이는 곳에서 안병영이 그를 바라봤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안병영이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아니 어쩌면 그 모습보다 훨씬 반짝이는 모습으로.
-뻐엉!!!
“스트라잌!!!”
160.7km/h
오직 선택받은 이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100마일.
최수원의 공이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선두타자는 강호창.
FA로 무려 45억을 당긴 중견수다. 안병영의 커리어가 최고로 잘 풀렸음을 가정해도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레벨.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런 타자가 길가에 무수히 널려있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돌멩이처럼 나가떨어졌다.
최수원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강호창을 바라보지 않았다.
[타석에 2번 타자 바로 어제 경기 선제 투런포를 기록했던 장찬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장찬민.
브레이브스가 자랑하는 황금의 유격수 계보 가운데 세 번째. 앞선 두 명의 유격수와 비교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앞선 두 명의 유격수들이 모두 메이저리그급임을 증명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역시 규격 외의 재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부러지고 상처 입은 재능은 그 상처를 봉합했음에도 부족했다. 한 번이라도 부러진 재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
-딱!!!
[투수 정면!! 빗맞은 타구!! 최수원 잡아서 1루에!!]
“아웃!!”
공 다섯 개로 순식간에 투아웃.
최수원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마운드에 서 있었다. 마치 몸도 풀리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러니까 얼른얼른 타석으로 나오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타석에 3번 타자.
이안 산체스가 올라왔다.
비록 한 시즌뿐이지만 메이저에서 뛰어 본 지명 타자다.
지명 타자는 그 특성상 압도적인 타격이 아니면 메이저에 생존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순수하게 타격만 따졌을 때 이안 산체스의 타격은 메이저 평균에 근접할지도 몰랐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커브.
같은 스승에게 배웠기에 알 수 있었다. 그가 2년 동안 죽어라 연마했던 저 커브의 완성도조차도 고작 두어 달 배우고 프로에서 뛰었던 최수원쪽이 더 높다는 것을.
삼자범퇴.
최수원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역시 잘하긴 잘하네.”
안병영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크게 새어 나왔다.
가까이서 볼 때는 그 반짝거리는 재능이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니 이건 대체 어디서 질투를 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타, 그리고 또 안타.
타석에 3번타자 최수원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