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한국 시리즈(13)
-뻐엉!!
“굿 볼!! 뽈 좋다!! 이대로 슬라이더 하나 더!!”
최민혁에게 마린스라는 팀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딱 1년 뛰고 부상으로 1년 재활하고 복귀해서 고작 몇 달 더 뛴 팀에 뭐 얼마나 대단한 소속감이나 애정이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끔 마린스를 생각했다.
“그거야 워낙에 팀 분위기가 다르니까. 팬들의 분위기도 좀 다르고.”
“선배도 종종 마린스 생각 나세요?”
“나야 너보다 훨씬 오래 있었으니까. 8년이면 인생의 거의 1/3인데.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지.”
그와 함께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됐던 최진웅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뭐 어쩌겠냐. 이렇게 왔으면 여기 적응해야지. 솔직히 팬들도 좀 서울 깍쟁이 느낌이고 팀 분위기도 마린스 같은 끈끈함이 떨어지는 느낌이긴 하지만 적응해야지.”
“대신 마린스 팬들보다 훨씬 덜 우악스럽고 팀 분위기도 훨씬 프리하잖아요. 훈련도 좀 체계적이고. 솔직히 선배나 저나 실력적인 부분만 생각한다면 여기가 훨씬 좋을걸요?”
“뭐 트레이닝 부분은 확실히······. 근데 난 아무리 그래도 마린스가 더 좋았어.”
“그러면 나중에 FA로 마린스 가시면 되겠네요. 선배 앞으로 3년만 더 풀로 뛰면 FA자격 얻잖아요.”
“아냐, 4년이야······. 며칠 부족해.”
“에이, 그거야 국가대표 한 번 뛰면 되죠.”
“야!!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국가대표가 뭐 어디 쉽냐?”
“글쎄요. 어차피 포수도 둘이나 셋은 무조건 뽑는 거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함께 마린스에서 브레이브스로 왔다는 인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배터리로써 함께 호흡을 꾸준히 맞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진웅과 최민혁은 마린스에서 뛰던 시절에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친해졌다.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네, 병철이야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뭐······. 쪼유 정도는 선배가 충분히 이길 수 있잖아요.”
“당연하지!!”
한국 시리즈 4차전.
[참 묘한 인연입니다. 사실 KBO에서는 트레이드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이게 메이저리그나 일본 같은 경우는 리그 자체가 양대 리그고. 특히 메이저리그는 지구도 나뉘어있다 보니까 트레이드에 대한 리스크가 비교적 적고, 심지어 윈윈도 가능한 데 반해서 KBO는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트레이드라고 해도 어느 쪽이 더 많이 가려웠느냐, 혹은 더 시원하게 긁었느냐로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나뉘어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단장님들 입장에서는 메이저리그처럼 적극적인 트레이드를 하기가 상당히 어렵단 말이죠.]
[하지만 그 어려운 경우의 수가 이렇게 한국 시리즈에서 맞딱뜨렸습니다!! 시즌 초반 트레이드를 통해 브레이브스로 팀을 옮겼던 최민혁, 최진웅 배터리가 오늘 경기 선발로 출장했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마린스에 자리 잡은 박재혁, 고설민, 태지완 선수들은 앞선 세 번의 경기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승리에 크게 공헌을 했는데요. 과연 이 젊은 배터리는 어떨지 상당히 기대가 되는 순간입니다.]
[글쎄요······. 사실 그 트레이드는 브레이브스가 현재를 팔아 미래를 샀던 트레이드라서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지 싶습니다만······.]
[아, 지금 타석에 강라온 선수가 올라옵니다.]
KBO의 팬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마린스와 피닉스는 과연 신인을 못 ‘뽑는’걸까? 아니면 못 ‘키우는’걸까?
10억 5천만 원짜리 유망주 최민혁이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153.9km/h.
그것은 11월의 쌀쌀한 날씨. 1회 초 첫 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공이었다. 실제로 최민혁은 브레이브스에 와서 미세하게 공이 더 빨라졌다. 최고 구속이 확 늘었다기보다는 저점이 높아지고 더 단단해졌다는 것에 가까웠다.
프로필에 따르자면 197cm에 110kg.
애초에 피지컬 자체가 남다른 선수다.
“뭐, 프로에 왔으면 당연히 구속도 늘고 체력도 늘어야죠. 열아홉이면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나이이기도 하고. 가장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훈련받을 수 있는 프로에 왔는데 구속 떨어지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과거 브레이브스의 어느 피지컬 코치가 했던 인터뷰가 한 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했던 브레이브스의 코치 본인도 사실 반쯤은 자랑삼아서 했던 이야기였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 가운데 브레이브스의 묘한 분위기를 그 이유로 생각했다.
당장 성적을 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경기에 이기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고 프로까지 다다른 선수라면 그 승부욕 역시 비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브레이브스는 그 승부욕 못지 않게 자신의 ‘성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얼핏 생각하면 그 두가지는 함께 가는 게 아니냐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투수가 당장 성적이 잘 나오려면 코어 운동을 하고 기진맥진할 게 아니라 공을 어떻게 잡고 손가락에 어떻게 힘을 분배하는 지를 연구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여긴 결국 거쳐 가는 곳이라고 그랬지?’
조창혁의 그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길게 봐라. 여기서 네 커리어가 끝나지 않는다. 진짜 엘리트 선수에게 브레이브스는 목표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의 마인드라기 보다는 셀링 클럽에서 뛰는 이들의 마인드였다. 하지만 동시에 유망주들을 육성하는데 효과적인 마인드이기도 했다.
특별히 더 강해진 건 아니었다.
시즌을 치르는 중에 몸이 급격히 더 커질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민혁은 애초에 에이스의 포텐셜을 지닌 투수였다. 변화구는 조금 부족했지만 평균 153km/h에 달하는 구속은 마린스의 테이블셰터들을 꽁꽁 묶어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야 땅볼 아웃에 이어서 외야 뜬공 아웃.
‘아, 근데 미안하지만 넌 좀······.’
그리고 자연스러운 자동고의사구. 사람들의 야유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아니, 근데 여기 우리 홈이잖아.’
최수원이 익숙한 자세로 1루에 걸어 나갔다.
이어지는 4번 노형욱.
지난 2차전과 3차전 경기에서 노형욱의 타격감이 특별히 나빴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잘 맞은 타구가 잡혔고 심판의 판정이 좀 좋지 못했다. 그래, 운의 영역이다. 하지만 야구라는 것은 참 오묘해서 행운이 계속되면 그게 좋은 타격감으로 연결되는 일이 왕왕 있는 것처럼 불운이 계속되면 타격감의 저하로 연결되는 일도 종종 있다. 오늘 노형욱이 그러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크게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잔루 1루. 마린스의 1회 초 공격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물론 최수원을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얘를 카운트하는 건 좀 그렇고, 이 정도면 유사 삼자범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최민혁이 당당한 걸음으로 덕아웃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와······. 근데 이거 대체 뭐냐? 여기 서울 맞지?’
분명 경기장은 이제 좀 익숙해져가는 고척이었다.
그런데 내용물이 어째 좀 달랐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마린스의 유니폼뿐이다.
“저기 저 자리가 지금 백만 원이라더라.”
“내일 경기는 백만 원 주고도 못 산다고 그러던데요?”
무려 35년 만의 우승 도전.
신입사원 때 마린스 우승을 본 사람이 정년퇴직을 했을 긴 세월이다. 브레이브스 팬들도 한국 시리즈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외야석이 20만원에 테이블석이 100만원을 호가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최민혁은 아주 약간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려간 마운드 위로 그보다 1년 늦게 마린스에 입단했던 백하민이 올라왔다. 불과 한 끗 차이. 트레이드 당시 단장끼리 이야기가 조금만 달랐어도 지금 두 사람의 위치는 정반대였을지도 몰랐다.
백하민이 마운드 위의 흙을 몇 차례 밟았다.
아무래도 고척의 마운드 흙 경도가 다른 구장과는 조금 달랐던 만큼 그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은 듯싶었다.
그렇게 몇 차례 마운드를 밟은 그가 모자를 고쳐 썼다. 타이밍도 좋게 그가 잠깐 모자를 벗었을 때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어트렸다.
“와, 진짜 미모 실화인가?”
여기가 아이돌 공연장도 아니건만 조금 전, 최민혁이 공을 던질때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대포 카메라들이 경기장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새끼 저거 아무리 봐도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
“왜? 부러워?”
“아뇨, 제가 부럽긴 왜 부럽습니까? 오히려 하민이가 절 부러워해야죠. 어? 투수가 저처럼 크고 단단해야지. 원래 투수는 사이즈에요. 사이즈.”
그리고 마운드의 백하민이 최민혁의 그 말을 온 몸으로 부정하는 것 같은 피칭을 선보였다. 148에서 151을 오가는 구속. 시즌을 치르는 동안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슬라이더까지. 다만 바로 어제 디에고 로드리게스를 두들겼던 브레이브스의 타선은 매서웠다.
-딱!!
백하민의 공은 만만치 않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삼진, 안타, 진루타.
투아웃에 주자 2루.
브레이브스의 4번 타자인 이안 산체스가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순식간에 0:2.
백하민이 고척의 담장을 한 번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마운드에 똑바로 섰다.
그 자세는 방금 홈런을 맞은 투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잔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과연 마린스는 유망주를 제대로 못 ‘뽑는’것인가? 아니면 못 ‘키우는’것인가.
마린스를 떠나간 역대 최고액이었던 투수 유망주 최민혁은 한층 더 단단한 피칭을 보여주었다. 아마 그는 그 단단한 육체를 더 튼튼하게 갈고 닦아 언젠가는 이 브레이브스라는 ‘과정’을 넘어 진짜 ‘목표’에 이르게 될 지도 몰랐다.
마린스에 남았던 또 다른 투수 유망주인 백하민 역시 한층 더 단단해졌다. 다만 그 단단함은 최민혁과는 조금 달랐다. 최민혁의 그것이 육체의 단단함이었다면 백하민의 그것은 마음의 단단함이라고 봐야 했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피닉스랑 마린스는 투수 유망주를 잘 뽑지도 못하고 잘 키우지도 못하지. 근데 이게 좀 묘한 것이. 가끔 그걸 뚫고 나오는 투수가 있어. 아, 물론 진짜 어려워. 역대급 재능 정도는 돼야 그게 가능할 만큼 어렵지. 근데 그 가혹한 환경에서 두들겨 맞았는데도 그걸 뚫고 나온다? 다른 건 모르겠고 멘탈 하나는 거의 해탈한 부처님 수준일걸?”
시리즈 4차전.
백하민은 1회에 투런 홈런을 맞았음에도 흔들림 없이 6이닝을 2실점으로 막아내며 자신의 몫을 다했다.
“역시 공 단장!! 내가 어? 공 단장 선수 보는 눈 믿고 있었다고!!”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오늘 최민혁은 무려 7.1이닝 동안 고작 1점을 내주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피칭을 보여줬다.
[점점 치열해지는 한국 시리즈!!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시리즈 스코어 2:2!!]
[“이게 야구냐?” 최수원 한국 시리즈 4경기 19타석 1타수 1홈런 18볼넷!!]
그렇기에 그날 밤 백하민의 베갯잇은 또 한 번 축축하게 물들었다.
[시리즈 5차전, 마린스 7:6 신승(辛勝)!! 이제 결과는 다시 부산으로!!]
[마린스 김대철 감독 “35년 만의 우승. 팬들에게 꼭 안겨 드리겠다.”]
한국 시리즈 스코어 3:2.
그리고 무대는 다시 부산.
2027시즌이 최수원에 의한, 그리고 최수원만을 위한 시즌이었음을 증명할 가장 완벽한 무대가 준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