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46화 (246/305)

246화. 한국 시리즈(11)

그 거대한 파울홈런을 보는 순간 박유성 감독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모험?

모험이라는 건 실패했을 때 잃게 될 것과 성공했을 때 얻을 것들을 면밀하게 계산하고 덤벼들어야 한다. 무지성으로 ‘가즈아’하는 건 모험이 아니라 도박이다.

그리고 박유성 감독은 자신이 지금 하려던 것이 바로 그 ‘도박’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도박의 결과가 실로 끔찍한 파멸로 이어지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투수 최수원과 타자 최수원.

둘 중 누가 더 무서운가.

만루에서 타자 최수원과의 승부를 피하고 투수 최수원에게 2점을 뽑아내는 것과 만루에서 타자 최수원을 정면 승부하고 투수 최수원에게 1점을 뽑아내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어려운 일일까? 답은 너무 뻔했다.

타격감이 잔뜩 올라온 최수원이 상대라면 만루건 뭐건 무조건 그냥 고의사구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왜?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배리 본즈의 다음 타자인 브렌트 메인도 좋은 선수지만, 그는 본즈도 제프 켄트도 아니라고. 마찬가지다. 노형욱도 좋은 선수였지만, 그는 최수원도 전성기의 이규만도 아니다. 그래, 그냥 그뿐이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오늘 경기가 한국시리즈라는 점이다.

심지어 6회 말에 0:0.

자동고의사구는 너무나도 큰 부담이다.

‘야오쉰아, 미안하지만 짐 좀 나눠 들자.’

조금 복잡한 사인들이 오고 갔다. 페이크 사인들 가운데 몇 번째 사인이 진짜라는 신호와 페이크 사인들. 그리고 진짜 사인과 또 페이크 사인들.

장야오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 새끼. 드디어 정신을 차렸네.

솔직히 그냥 자동 고의 사구 해주는 게 더 좋긴 하겠지만······. 그래, 만루에서 최대한 까다롭게 승부해보려다 고의사구 하는 거랑 아예 승부를 포기해버리는 거랑은 또 팬들이 받는 느낌이 다르겠지. 덕아웃에 가해지는 부담도 확실히 적어질거다. 물론 그 댓가로 장야오쉰 자신을 향한 팬들의 평가도 좀 박해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한글은 읽지도 못하는 자신이 악플을 받는 게 더 나을거다.

‘감독님, 대신 재계약 때는 힘 좀 써주셔야 할 겁니다.’

두 번째.

장야오쉰이 공을 뿌렸다.

***

예감이라는 게 있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 느낌 같은 거긴 한데, 단순한 망상은 아니고 뭔가 한 가지를 오래 한 사람이라면 이성으로 따지기 전에 오랜 기간동안 몸에 쌓인 빅데이터가 내리는 본능적인 무언가라서 제법 적중확률이 높다.

아, 물론 그런 거치고는 벌써 오늘 경기만 몇 번을 빗나가긴 했지만 그건 이 마린스라는 팀이 고작 30년 야구 짬밥 정도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내 예감에 비춰봤을 때 지금 저 양반. 승부 포기했다. 벌써 느껴지는 각오가 다르다. 초구를 던질 때까지만 해도 뭔가 사즉생의 비장한 각오였다면 지금은 안도를 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뻐엉!!

존에서 멀찍이 빠지는 공.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관객석에서 야유는 나오지 않았다. 앞선 공이 나름대로 승부를 하려던 공이었으니 그냥 빠진 공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듯싶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직’ 나오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뻐엉!!

두 번째.

이번에도 상당히 멀찍이 빠지는 공.

자동 고의사구로 안 내보내는 걸 보면 대충 승부하는 척이라도 해서 면피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 공이 저렇게까지 빼는 건 역시 예전에 내가 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공을 장타로 연결했던 적이 있어서일까?

-우우우우우

2구 연속 빠지는 공.

그것도 상당히 멀리 빠졌다. 당연히 사직 구장에 야유가 울려퍼진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방망이를 휘둘러서 무력 시위를 해볼까 했지만 참았다. 아무튼 오늘은 한국 시리즈고 0:0의 상황에서 공짜로 1점을 주겠다는 데 그걸 막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 장야오쉰 선수의 밀어내기 볼넷!! 0:0의 팽팽한 경기가 여기서 깨집니다!! 점수는 0:1!! 마린스가 1점을 앞서나갑니다.]

[4구 연속 바깥쪽 빠지는 공이라니······. 이건 뭐, 사실상 고의사구라고 봐야죠. 그게 덕아웃의 지시였건 투수의 의지였건 간에요. 처음에는 승부할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의 파울 폴대를 맞출 뻔한 파울홈런을 보고 마음이 바뀐 것 같습니다.]

[확실히 만루에서 최수원 선수를 상대하는 건 어려운 점이 있긴 하죠.]

[자, 이렇게 되면 노형욱 선수를 지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뒤를 따라 나오는 형욱 선배의 표정이 평안했다.

언제였더라? 아마 올스타전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때 형욱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이제는 화도 안 나더라.”

“네?”

“아니, 만루에서 너 볼넷으로 내보내는 거. 처음에는 나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천하의 노형욱인데. 만루에서 점수를 1점 공짜로 줘가면서까지 최수원 대신에 나를 상대한다고? 라는 느낌이었거든.”

솔직히 그거 무시가 아니라 그냥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동방예의지국의 자랑스러운 건아로서 차마 위로 띠동갑에게까지 건방지게 굴 수가 없었다.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다 알아.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네가 대단한 거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어서 입이 아주 근질거리는 모양인데. 하여간 넌 인마, 얼른 메이저 가서 겸손이라는 단어를 좀 배울 필요가 있어. 아무튼 네가 이렇게 미친놈처럼 방망이를 휘둘러 주니까 상대적으로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하하······.”

메이저에 가도 딱히 나에게 겸손을 가르칠만한 투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멋쩍게 그냥 웃었다.

“진짜 궁금하다. 솔직히 너 보고 있으면 전성기 규만 선배님 정도 포스가 보이거든. 난 진짜 타자 이규만의 팬으로써. 전성기의 규만 선배님이 마린스에 안 남고 그냥 메이저로 진출했다면 과연 어땠을지 너무 궁금하거든. 너를 보면 그게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랑 규만 선배에게서 비슷한 포스가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원래 팬심이라는 건 이성의 영역 밖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이해했다.

“아, 물론 화가 안 난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서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최거노가 자주 나와줘야 너도 방망이 휘둘러 볼 기회가 좀 많이 생길 테니까.”

형욱 선배가 타석에 섰다.

과연 최거노를 보여줄 수 있을까?

마운드의 장야오쉰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빠른 공.

형욱 선배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다. 체인지업을 머리에서 지우고 싱커와 슬라이더만 생각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딱!!!

하지만 아쉽게도 좋았던 건 타이밍뿐이었다.

낮은 타구 각.

일단 빠르게 2루로 달렸다. 타구 각은 낮았지만, 대신 타구의 속도가 굉장히 빨랐으니 충분히 내야를 뚫을 가능성도······.

[2, 3루간!! 매우 빠른 타구!! 장찬민!!!!!! 장찬민의 멋진 다이빙 캐치!! 장찬민이 노형욱의 타구를 잡아내며 6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끝이 납니다!! 박동식 위원님 이번 이닝 어떻게 보셨습니까.]

[두 번의 기습 번트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허를 찌르는 훌륭한 공격이었습니다. 이건 마린스 덕아웃을 칭찬해야죠. 다만 충분히 대량실점이 나올만한 위기 상황이었는데도 장야오쉰 선수 매우 훌륭하게 1실점만을 내주며 위기를 잘 넘겼거든요. 솔직히 0:0 상황이라 점수를 내준다는 결단을 내리기 힘들었을 텐데, 거기서 밀어내기 볼넷을 선택하면서까지 최수원 선수를 피했단 말이죠? 결론적으로 이후 추가실점 없이 이닝을 잘 마무리 했구요. 결과적으로 ‘마린스의 공격은 위협적이었지만 치명상까진 아니었고, 브레이브스는 치명상은 피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입었다.’ 뭐 그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네, 마린스 쪽에 살짝 유리해지기는 했지만 승부가 결정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브레이브스가 역전할 수 있다. 뭐 그렇게 해석이 되는군요.]

[아무래도 몇 번 말씀 드렸지만 투수 최수원은 타자 최수원만큼 압도적인 선수는 아니니까요.]

형욱 선배의 타구가 안타가 되지 못한 건 그냥 운이 없던 거다. 찬민이 형은 햄스트링이 나간 이후로도 여전히 좋은 타자였지만 절대 좋은 유격수는 아니었다. 그런 찬민이 형이 열 번 시도하면 아홉 번은 실패할만한 수비에 성공했으니 이건 운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1:0.

덕아웃에 돌아와 헬멧을 벗고 모자를 썼다.

방금 전까지 전력으로 달려서 그런지 몸이 따끈따끈하다.

7회 초.

감독님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조금 전에 기습 번트 두 번 성공시킨 것에 고무가 된 건지 조금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뿌듯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마치 우주 최고 명장이라도 된 것 같은 눈빛으로 나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쏘아 보냈다.

‘수원아 믿는다.’

그대로 글러브를 챙겨서 마운드로 걸어 나갔다.

대충 찾아본 이론에 따르자면 시즌 중에 5일 휴식 루틴을 아무리 철저히 지켜도 투수의 몸은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즌 초반의 맥시멈 체력을 100이라고 한다면 시즌을 거치는 동안 그 맥시멈이 서서히 깎여나가서 시즌 막판쯤 되면 맥시멈 85쯤 되는 체력을 갖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다시 100으로 되돌릴 수 있느냐? 답은 간단하다.

조직이 완전히 재생할 수 있는 충분한 휴식, 즉 보름 이상의 충분한 휴식이다.

지난 3주.

물론 비시즌처럼 완벽하게 휴식한 건 아니다. 그렇게 쉬어버리면 회복되는 대신 몸이 좀 굳어버리니까. 적당한 컨디셔닝은 필수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100을 모두 회복했다고 보긴 힘들다.

숫자로 말하자면 94정도?

선두타자는 조금 전 열 번을 시도해도 한 번 간신히 성공할까 말까 한 수비를 멋지게 성공시킨 행운의 사나이 장찬민.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공격이 따라오는 법이다. 라는 격언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찬민이 형이 타석에 섰다.

몸은 여전히 따끈따끈했다.

내가 오늘 9이닝을 다 던질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1회부터 160이 넘는 공을 던질 때는 그런 생각으로 던진 거니까.

그러니까 딱 이번 이닝만.

이제 남은 체력을 모조리 다 쏟아붓는다는 느낌으로.

-부웅!!!!

“스트라잌!!”

[초구!! 헛스윙 스트라이크!! 구속은 161.9!! 161.9가 찍혔습니다!!]

[와, 진짜 대단합니다. 아니 1회 초부터 100마일을 던졌는데 지금 7회인데 여전히 100마일을 던지고 있어요. 심지어 오늘 경기에서 타자까지 소화하는 상황인데 말이죠. 정말 제가 살면서 이런 선수가 한국에서 나올 거라고는!! 심지어 마린스에서 뛰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투구수가 7회 초인데도 아직 82개로 상당히 적은 만큼 체력적으로 좀 여유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찬민이 형이 전광판의 숫자를 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 번 웃었다.

두 번째.

-딱!!!

162.4km/h의 더 빠른 공.

놀랍게도 찬민이 형의 방망이가 이걸 따라왔다. 물론 당연히 밀렸다. 내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파울.

볼카운트 0-2.

찬민이 형의 약점이 95마일 이상의 공을 던지는 투수가 구사하는 체인지업이라는 건 공을 던지는 나도 알고, 지금 타격을 준비하는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찬민이 형도 체인지업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141km/h의 빠른······, 아니 느린 체인지업!! 헛스윙 삼진입니다!! 최수원 선수의 삼구삼진!!]

하지만 원래 약점이라는 건 염두에 두건 뭐건 안되니까 약점인 거다. 애초에 95마일 이상의 공이 약점인 양반이 억지로 기어를 100마일짜리 공에 맞추려고 삐거덕거리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87마일짜리 체인지업을 칠 수 있을리 만무하다.

브레이브스에서 가장 강한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정말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낸다는 느낌으로 7회 초, 마운드를 불태웠다.

[최수원!! 7이닝 2피안타 무실점!!]

[‘브레이브스는 홈런왕이 무서워?’ 최수원!! 6회 말 0:0 상황에서 밀어내기 볼넷!!]

[그야말로 파죽지세!! 마린스 쾌조의 2연승!!]

[공수 겸장의 이도류. 혼자서 야구하는 최수원? 최수원의 압도적인 활약 속 어딘가 조금 찝찝한 마린스의 1:0 승리.]

[브레이브스 박유성 감독 ‘최수원은 어려운 타자. 만루에서도 과감한 승부를 지시할 수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