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45화 (245/305)

245화. 한국 시리즈(10)

결정이란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는 책임이라는 것이 따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결정에 자신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미래가 달려있다면 그 결정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박유성 감독의 현재 상황이 그러했다.

내리느냐, 그대로 가느냐.

정규시즌이었다면 볼 것도 없다. 무조건 그냥 가는 게 맞다. 사실 지금도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그냥 가야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 점수라도 내준다면? 단기전의 특성을 이해 못 하는 머저리가 될 수 있다.

위장이 쓰려왔다.

KBO의 포스트시즌은 특히 한국시리즈는 정규시즌 1위 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시리즈 업셋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최소한 플레이오프, 혹은 준플레이오프나 와일드카드결정전까지 토너먼트 경기들을 거치고 온 팀과 3주간 푹 쉰 팀의 전력에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브레이브스 역시 그러했다.

지난 1차전에서 조창혁이 워낙에 호투를 해준 덕분에 불펜에 약간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이제 6회 말 원아웃인데 벌써 불펜을 가동한다? 그것도 필승조를? 정말 괜찮을까?

“일단 한 박자 끊자.”

그럴 때 가장 쉬운 선택은 역시 유예다.

이번에 팀에 새롭게 합류한 중국어 통역을 데리고 마운드로 향했다.

“괜찮습니다. 두 타자 연속 기습 번트는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지만요.”

장야오쉰의 신색은 태연했다.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건 다행이다.

심지어 태연함을 넘어서 박유성 감독에게 이런 제안까지 했다.

“다음 타자인 강라온은 좀 까다롭긴 한데······. 볼넷을 줘도 상관없다는 자세로 최대한 까다롭게 공을 줘보고. 그러다가 만루가 차면 차는 대로 이정훈에게 병살을 유도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저 친구한테 두들겨 맞아서 외야로 공이 날아가는 건 상상하기가 좀 힘들어서요.”

물론 이정훈이 장타력이 아예 없는 타자인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2루타도 가끔 치고, 홈런도 한 시즌에 서너 개 정도는 만들어낸다. 하지만 확실히 한 시즌에 열 개 정도 홈런을 쳐내는 강라온에 비하자면 확률적으로 훨씬 낮다. 오늘 경기 역시 앞선 타석에서도 병살과 내야 땅볼로 물러나기도 했다.

박유성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길.

“감독님 괜찮을까요? 너무 위험한 모험이 아닐지······.”

“조 코치. 원래 강자와 약자의 싸움이라는 게 그래. 강자는 안전한 정석만 꾸준히 밟아가면 돼. 실수만 안 하면 당연히 이기는 거야. 근데 그런 강자가 깜짝 전략까지 성공을 시킨다? 후······. 약자 입장에서는 답도 없는 거지. 그러니까 약자는 모험을 해야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하고 무난하게 지는 것만큼 최악은 없으니까.”

제법 멋진 말이었다고 박 감독은 자평했다.

‘스읍······.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를 따라오는 코치가 머리를 갸우뚱 하긴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타석에 강라온이 올라왔다.

자동고의사구는 아니었다.

매우 까다로운 공들.

강라온이 그 공들을 골라내고 방망이를 휘두르고 다시 골라냈다.

볼카운트 3-1에서 다섯 번째 존에서 조금 많이 빠지는 공.

물론 보더라인에 걸치게 던질 의도였지만 최악의 경우 존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밖으로 빠지는 걸 생각하고 던져서 그런가 처음 의도보다 많이 밖으로 빠졌다.

-뻐엉!!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만루.

타석에 이정훈이 올라왔다.

양손에 알렉산더 맥도웰의 싸인볼을 하나씩 쥐고 있던 오규환 씨와 그 친구가 원 아웃 만루 상황의 이정훈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아, 여기서 또 이정훈이네.”

“그러게, 강라온이 뭔가 한 건 해줬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는데.”

“아니, 기습 번트만 연달아 두 번을 성공했는데. 또 초구 병살타 각인데.”

“김대철도 생각 있으면 대타 쓰지 않을까? 원 아웃에 만루잖아.”

“대타 누구? 권혁주? 김훈? 정지운? 한교철? 야. 다 글렀어. 마린스 뎁스 얇은 건 세상이 다 아는데 대체 누굴 대타로 쓰냐. 그래도 이정훈이 낫지.”

“아니, 그래도 장타력은 권혁주가 조금 더 낫지 않나?”

“낫기는. 개뿔. 그냥 이정훈이 병살만 안 치기를 기도하······. 야, 근데 잠깐만.”

“왜? 뭐?”

앞선 두 번의 타석을 통해 장야오쉰은 확신했다.

이정훈은 까다로운 타자지만 자기가 칠만한 공을 던져주면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리고 그 방망이에는 장야오쉰 자신의 싱커를 제대로 두들길만 한 정교함도, 그렇다고 억지로 날려 보낼만한 힘도 없다.

초구.

대놓고 복판에서 꿈틀거리는 싱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모두 땅볼로 연결되어 병살과 내야 땅볼 아웃을 끌어낸 공이었다.

그런 말이 있다.

세 번째 타순을 조심하라. 실제로 세 번째 타순부터 타자들의 타격 성적은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괜히 선발이 어려운 보직이 아니다.

그런데 이정훈만한 타자에게 3타석 연속으로 같은 공을 던진다?

이정훈이 방망이를 꾹 쥐었다.

지난 타석에서 내야 땅볼로 물러나고 짧게 최수원과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야, 수원아. 저거 싱커 진짜 답이 없던데?”

“선배, 저 오늘 선발 투수인데요.”

“에이, 어차피 막 예민하게 굴고 그러는 타입도 아니잖아. 평소에도 이렇게 대화 했으면서 뭐 새삼스럽게 그러냐.”

“후······. 뭐 그건 그렇죠.”

“아무튼 뭐 방법 없을까? 아니 분명 칠만한 공 같은데 이상하게 결과가 안 좋단 말이지.”

“칠만한 공 같은데 결과가 안 좋으면 답은 뻔한 거 아닐까요?”

“그게 뭔데?”

“그거야 당연히······.”

-뻐엉!!

“스트라잌!!!”

[초구, 바깥쪽으로 살짝 꺾여 들어가는 145.4km/h의 빠른 싱커!! 이정훈이 일단 하나 지켜봅니다.]

“칠만한 공인 척하지만 사실은 칠만한 공이 아니었던 거지······.”

볼카운트 0-1.

그냥 가만히 서서 공 하나를 보낸 주제에 마치 대단한 뭔가를 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태가 실로 위풍당당했다.

“그래!! 인마!! 어? 공 하나 정도는 좀 지켜 보고? 어? 근데 스트라이크를 그냥 또 그렇게 보내면 아, 이정훈 저 새끼 저거 진짜 답답하네.”

“대철아!! 제발 진짜 잘 좀 하자. 차라리 돌멩이를 가져다 둬도 너보단 낫겠다. 그 돈 받아먹으면서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믿음의 야구 하고 있으면 속이 편하냐?”

물론 그 위풍당당함과 별개로 관중석에서 나오는 반응은 썩 그리 좋지 못했다. 당연히 이정훈은 그 반응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바로 어제 역전 홈런포를 쳐도 오늘 병살타를 치면 쌍욕이 날아오는 게 야구장 민심이다. 11년 짬밥은 그런 것 신경 쓰기에 충분히 많았다.

두 번째.

공이 날아왔다.

타석에서 자세히 관찰했더니 테일링이 확실히 미쳤다. 비디오 자료나 대기 타석에서 보던 것과 또 다른 맛이 있다.

물론 그렇게 관찰을 했다는 건 당연히······.

-뻐엉!!

“스트라잌!!”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볼카운트 0-2.

멀뚱히 서서 스트라이크만 두 개를 헌납한 이정훈을 향하여 사직 야구장의 성난 관중들이 질타를 퍼부었다. 여기에는 앞선 타석에서 초구 병살타, 초구 내야 땅볼 아웃으로 물러난 것에 대한 원망도 함께였다.

하지만 이정훈이 올라오자마자 불평을 늘어놓던 오규환씨와 그 친구는 오히려

“야, 규환아. 이거 진짜 네 말처럼 될 수도 있겠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어? 이정훈이 대국적인 안목으로 깔끔하게 삼진을 당해주면!!”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이정훈 선수!! 여기서 헛스윙 삼진!!]

[장야오쉰 선수!! 원아웃에 주자 만루 상황에서 삼구삼진으로 일단 한 고비를 넘어 섰습니다.]

[이정훈 선수, 오늘 영 타격감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자, 하지만 이걸로 마린스팬들에게는 정말 기대되는 상황이 찾아 왔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브레이브스 팬들에게는 정말 보기 싫은 장면이죠. 6회 말. 0:0 상황!! 투아웃 만루. 타석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선발 투수로 출장해서 지금까지 6이닝 무실점. 앞선 두 타석 모두 자동고의사구로 출루했던 최수원 선수!! 드디어 방망이를 휘둘러 볼 기회입니다.]

[글쎄요. 전 이 타이밍에 자동고의사구가 나올 확률도 아예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네? 한국 시리즈. 6회 말. 0:0 상황에서 밀어내기 고의사구라고요?]

[아니,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솔직히 확률만 따져본다면 여기서는 그냥 1점으로 막는 게 싸게 먹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74홈런 타자 아닙니까. 앞선 1차전에서도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 홈런을 날렸고요. 이 정도면 솔직히 규격 외라고 봐야죠.]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아······.”

시큰거리는 위통에 인상을 찌푸린 박유성 감독이 자신도 모르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한숨을 흘려보냈다.

‘아니, 내가 그래서 너무 위험한 모험 아니냐고······. 이정훈이 그냥 방망이 안 휘두르면 최수원 타석에서 2사 만루인 건데.’

나름대로 미래를 내다봤던 조 코치가 투덜거림을 속으로 삭이며 박유성 감독에게 속삭였다.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그러면 최초 플랜대로 그냥 고의 사구로?”

“조 코치. 너 미쳤어? 한국 시리즈에서 6회 말에 0:0인데 만루에 자동 고의 사구로 점수를 내주면. 어? 그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분석팀에서 최수원 분석했던 자료대로 볼 배합 보내.”

“그러면 투수는 그냥 장야오쉰으로 계속?”

“······.”

박유성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은 본래 머리를 너무 많이 쓰거나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최대한 머리를 쓰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지금의 박유성 감독 역시 그러했다. 그의 머릿 속에 남은 것은 조금 전 마운드를 방문했다 돌아올 때 조코치에게 했던 자신의 멋진 이야기였다. 그래, 약자는 모험을 해야 한다.

“그래, 약자는 모험을 해야지.”

박유성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6회 말.

투아웃에 만루.

이제 수원의 차례였다.

“야, 내가 대승적 결단으로 양보한거다.”

하여간 그 놈의 대승적 결단은·····. 최수원이 병살타 안 치고 삼진으로 물러난 게 양보라는 이정훈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타석으로 걸어갔다.

자동고의사구?

아니면 승부?

사실 뭐가 됐건 상관 없었다.

전자도 충분히 임팩트는 넘쳤고, 후자는 그 넘치는 임팩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줄 자신이 최수원에게는 충분했다.

마운드의 장야오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양반도 참, 말년에 고생이 많아.’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본래의 역사에서 최수원과 한 팀으로 뛰던 시절에는 그래도 막판에 KBO 우승 반지도 끼고 돈도 제법 쏠쏠하게 벌다가 은퇴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뭐, 내가 이 시간으로 되돌아와서 잘 풀린 사람이 있다면 좀 꼬이는 사람도 있는 법 아니겠어? 내가 그것까지 일일이 다 어떻게 해줄 수는 없지.’

[아, 덕아웃의 사인이 나오지 않습니다!! 6회 말. 0:0. 투아웃에 만루!! 브레이브스가 최수원 선수와의 승부를 결정했습니다.]

타석에 선 최수원에게서 Baseball의 향기가 물씬 풍겨났다.

‘빌어먹을······.’

장야오쉰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장야오쉰이 야구공을 움켜쥐었다.

CPBL의 공인구와는 조금 다른 공.

그래, 원래 인생이라는 건 종종 가장 피하고 싶던 일도 맞닥뜨리고 그러는 게 인생이다.

초구.

몸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146.1km/h 가장 좋은 싱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던진 공이었다.

-딱!!

거대한 파울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폴대를 스쳐지나갔다.

‘아······. 시발 인생 진짜······.’

장야오쉰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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