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44화 (244/305)

244화. 한국 시리즈(9)

흔한 이야기였다.

오래 뛰었지만, 칭찬보다는 욕을 더 많이 먹었다.

열심히 해도 딱히 팀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고, 당연히 좋은 플레이에 칭찬은 따라오지 않았다. 가끔 관련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댓글에는 연봉을 들먹이며 돈값 못한다는 댓글만 가득했고 심지어 FA 때는 욕심이 많아서 싸인을 안 한다며 제 주제에 50억 요구가 말이 되냐는 글이 가득했다.

그래, 안다.

모두가 다 그런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린스의 팬이라는 것은 단수가 아닌 각자의 의견을 가진 개인의 집합이며 그 댓글이라는 것 역시 그들의 총의가 아니다. 마린스 팬 가운데 누군가는 분명 강호창이라는 선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의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고 시커먼 악의는 너무나도 쉽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으니 마린스에서 보낸 12년의 세월 끝에 강호창에게 남은 것은 30억도 아까운 선수라는 여론과 그 여론을 등에 업고 네 주제에 40억에 옵션 10억이 어디냐고 말하는듯한 프런트였다.

-우우우우우

경기장에 야유가 가득했다.

그래, 뭐 마지막 이별에서 섭섭함을 참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인터뷰했던 건 자신의 잘못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1년 내내 야유를 받을만한 정도였나.

모르겠다.

─강호창 어쩌냐? 마린스 탈출하자마자 바로 우승각. ㅋㅋㅋ.

─어쩌면 강호창 본인이 우승 억제기였을수도.

야유하는 이들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저 야유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데 화를 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저 저들을 더 기쁘게 해줄 뿐이다.

냉정하게.

마치 저 야유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나의 지난 선택에 후회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강호창 자신이 떠난 마린스는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마운드의 최수원이 투수판을 밟았다.

답은 너무 명확했다.

최수원.

마린스에 나타난 백마 탄 초인. 그래, 최수원은 말 그대로 백마 탄 초인이다. 그러니 강호창이 생각할 때 마린스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최수원이 나타난 것 뿐이다. 그렇기에 강호창은 후회하지 않았다.

백마 탄 초인 혼자만의 힘으로 올라선 자리는 그가 떠난 이후 결국 다시 내려와야 할 자리일 테니까.

“스트라잌!!”

159.9km/h의 속구.

바깥쪽으로 많이 빠지는 공이었다. 하지만 속았다. 아니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최수원의 공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특별했다. 올드하게 말하자면 기합이라고나 할까? 최수원의 공에는 그런 것이 담겨 있다.

강호창이 고개를 저었다. 앞선 이닝, 사직 구장에서 보기 드문 호수비를 하고 받은 것이 탄식과 야유였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오늘 너무 감상적이다.

두 번째.

빠른 공.

조금 더 빠르게 반응했다.

그러니까 앞서 보여줬던 그 빠른 공의 타이밍으로.

-부웅!!!

“스트라잌!!!”

[체인지업!! 최수원 선수의 144.9km/h의 체인지업에 강호창 선수의 방망이가 헛돌았습니다.]

[이게 참······. 144.9km/h의 체인지업이라니. 제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145km/h면 강속구 소리를 들었었는데. 정말 한국 야구의 발전이 실감이 되는군요.]

[하하, 박동식 위원님 그렇게까지 세월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최수원 선수의 특별함.]

[네, 알죠. 하지만 최근 보면 우리나라도 고교선수가 150이상 던지는 게 굉장히 늘고있지 않습니까? 저도 최수원 선수가 압도적인 천재성을 보여주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만 뭐랄까?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환경의 영향을 완전히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저만한 재능을 길러낸 한국 야구의 발전도······.]

[아, 최수원 선수가 지금 세 번째 공을 준비합니다.]

압도적이다.

강호창은 분명 평범한 선수 가운데 가장 잘 풀린 케이스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평범한 4년 45억 FA 프로 선수라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단어이긴 했지만, 아무튼 강호창은 평범의 범주에 속하는 누군가가 죽을 만큼 노력했을 때 다다를 수 있는 한계점 즈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커브에 깔끔하게 삼구삼진!!]

떠난 팀의 자신에게 야유하는 팬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단단한 각오 따윈 아무 쓸모가 없었다.

흔히들 KBO는 루키부터 일부 메이저급 선수까지 매우 다양한 스팩트럼의 선수들이 뛰는 리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AA급의 실력으로 꾸준하게 경기에 출장하여 마침내 4년 45억짜리 FA 선수인 강호창과 최수원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의 이름은 재능.

그는 최수원이 던진 속구와 체인지업. 그리고 커브를 하나도 구분할 수 없었다. 강호창이 자신의 방망이를 쥐고 덕아웃으로 쓸쓸하게 돌아갔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러니까. 강호창 저 새끼 브레이브스로 갈 때 했던 인터뷰들 생각하며 진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야.”

경기는 계속됐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삼주에 가까운 휴식. 그리고 윌리엄 형제의 극진한 케어를 받은 최수원의 몸은 만전에 가까웠다.

6회 초.

세 번째 타자인 김나라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자범퇴.

KKK.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전광판에 쓰인 숫자였다.

162.1km/h.

[와, 162.1km/h!! 지금 전광판에 구속이 162.1km/h가 찍혔습니다.]

[경기 초반에 너무 빠르게 몸을 끌어올린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만 모두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최수원 선수. 이제 투구 수가 81개째입니다만 지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 어느새 경기는 6회 말. 마운드에 브레이브스의 선발 투수 장야오쉰 선수가 올라옵니다.]

만으로 서른넷.

투수 치고 작은 사이즈인 179cm의 장야오쉰이 또 한 번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장야오쉰 선수도 지금까지 아주 훌륭하게 마린스를 막아내고 있습니다.]

[5이닝 동안 8피안타, 자동고의사구 두 개와 볼넷 두 개. 그리고 삼진도 두 개. 사실 투구 내용만 보면 훌륭하다고 말하긴 좀 애매합니다. 하지만 점수는 아직 0:0이거든요.]

[장야오쉰 선수 같은 경우 뜬공의 비율이 전체 타구 가운데 매우 적습니다. 얼핏 보면 피칭 내용이 좀 별로인 것 같은데 지금 병살만 무려 세 개를 잡아냈거든요. 브레이브스가 장야오쉰 선수를 데려올 때 기대했던 그런 피칭을 오늘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말씀드리는 순간 타석에 7번 타자 서경준이 올라옵니다.]

거대한 응원과 환호가 올해 34세의 우익수인 서경준에게 쏟아졌다. 이번 시즌 그가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조금 과한 대접이었다. 이번 시즌 그가 타석에서 보여줬던 모습은 당장 내년에 은퇴를 천명한 이규만보다도 못했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마린스 팬들에게 그는 이만한 대접을 받아 마땅한 타자였다.

3년 전.

올해 초의 강호창과 비슷했던 상황에서 그는 강호창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선택을 했었다.

“근데 솔직히 서경준도 3년 27억 돈값은 좀 못하지 않았어?”

“야, 그 이전에 헐값에 뛰었던 거 생각해야지. 게다가 지금 결과적으로는 좀 애매하지만 당시에는 시장 나가면 4년 30억 시작이던 상황이었다고. 만약 올해 서경준 없었다고 생각해봐라. 사울 로페즈가 외야 붙박이 했으면 우리 내야 백퍼 터졌다.”

어느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장 서경준은 마린스의 진골로 강호창과 달리 은퇴 이후의 인맥도 고려 대상이었으니까.

물론 지금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팬들에게 그러한 제반 사정같은 것은 알 바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강호창은 배신자고, 서경준은 팀에 충성한 선수였다는 점이다.

몇 개의 공이 오갔다.

볼카운트는 1-2.

-딱!!

제법 까다로운 공을 향하여 반 박자 늦은 스윙.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잘 맞았다. 땅볼 타구가 빠르게 1루 파울 라인을 따라서 흘렀다.

공을 던진 장야오쉰이 매우 빠른 속도로 1루를 향해 움직였다. 조금 지쳐가는 타이밍이었지만 오랜 경험으로 새겨넣은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느리게 달려나온 1루수 명진수가 공을 받아 장야오쉰에게 던졌다. 그 느린 달리기와 달리 송구 동작은 제법 부드러웠고 빨랐다.

서경준은 그렇게 느린 타자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주혁처럼 규격을 벗어나게 빠른 타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웃!!”

타석에 8번 타자 이주혁이 올라갔다.

덕아웃의 최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서경준의 아웃 때문일까? 아니면 앞으로 펼쳐질 삼자범퇴를 예감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이주혁에 조유진······. 하나가 살아나가도 강라온에 이정훈이면······. 아무래도 오늘 방망이 휘둘러보기 어렵겠네.’

볼.

그리고 파울.

세 번째.

장야오쉰이 143.7km/h의 싱커를 던졌다.

[어? 이주혁 선수의 기습 번트!!]

실력은 아니었다.

이주혁 자신도 그것을 실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천운.

그래, 천운이었다.

정말 절묘하게 3루를 따라 매우 약하게 흘러가는 타구. 3루수가 달려와 공을 잡았을 때, 그보다 훨씬 빠른 이주혁의 발은 이미 1루를 밟고 있었다.

원아웃 주자 1루.

타석에 조유진이 올라왔다.

특유의 그 상체를 잔뜩 기울인 기묘한 자세.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우스운 자세였지만 장야오쉰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니, 방심할 수 없었다.

이주혁에 조유진.

사실 최수원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제외하고 마린스에서 그가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조합이었다.

‘땅볼을 유도했는데 안타가 되는 건 투수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유명한 투수의 말처럼 장야오쉰은 땅볼을 유도하는 투수로 그게 안타가 될지 아웃이 될지는 그의 능력 밖 일이었다.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내야수의 실력. 그리고 주자의 ‘발’이었다.

그렇기에 이주혁에 조유진 조합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하면 삼진으로······.’

땅볼을 유도하기 보다는 삼진으로.

다행히 조유진은 2할 1푼짜리 타자였다. 앞선 타석 역시 삼진으로 잡아냈었다. 그러니 이번 타석도······.

-툭.

[아니!! 번트!! 조유진 선수 여기서 또 번트입니다!!]

최수원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두 타자 연속 기습 번트.

심지어 주자 1루 상황에서 나온 기습 번트였다.

번트의 위험성과 그 생산성이 숫자로 나온 현대 야구에서는 어지간하면 나오기 힘든 장면이었다. 심지어 지금 마린스의 감독이 나름대로 미국물을 먹어 본 김대철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주혁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방망이에 공이 제대로 맞기도 전에 머리가 1루로 돌아가는 조유진 역시 그러했다. 타구의 방향은 1루. 구르는 공보다 조유진이 뛰어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6회 말 0:0

원아웃에 주자 1, 2루.

그리고 1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세 번째 타순. 본래라면 깔끔하게 연속 아웃으로 끝났어야 할 것 같은 이주혁, 조유진 콤비가 보여준 뜻밖의 활약에 경기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할까요?”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이 고민에 빠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