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42화 (242/305)

242화. 한국 시리즈(7)

[160.1!! 160.1킬로미터!! 최수원 선수!! 1회 초 선두 타자를 상대로 초구 160킬로짜리 강속구를 집어넣습니다!!]

[대단합니다. 잠깐 번트 자세로 들어갔던 김나라 선수가 움찔했어요.]

[물론 최수원 선수의 경우 시즌 중반에 최고 163.1킬로까지 속구를 던진 기록이 있긴 합니다만 시즌 막판 들어서는 160이 넘는 공을 잘 보여주지 못했었거든요. 한데 오늘 경기 1회 초. 선두 타자를 상대로 초구부터 160.1!! 어제 딜튼 선수도 그렇고 마린스의 투수들이 지난 3주의 휴식 동안 정말 몸을 잘 가다듬고 온 것 같습니다. 물론 살짝 오버페이스가 아닐까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오늘 경기, 한국 시리즈거든요. 괜히 슬로우스타트 하다가 초반에 뭔가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차라리 오버 페이스 쪽이 훨씬 낫습니다.]

역시 기습 번트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 원래 브레이브스에서 뛰었던 덕분에 알고 있었다. 나라 선배는 좀 부담감이 드는 상황이 오면 종종 이렇게 기습 번트로 시작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어떻게든 1루를 밟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었다.

배터 박스 매우 깊숙한 곳.

방망이를 짧게 쥔 나라 선배가 나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상당히 촌스럽다. 그러니까 몸에 맞아서라도 나가겠다는 파이팅이다. 솔직히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 상대로 보여주긴 좀 어려운 자세다. 한국 시리즈라는 특수함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겠지.

학폭 조동혁 선생은 딱히 본받을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래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그중에 스승은 하나 있는 법이고, 개똥도 약에 쓰려면······. 아, 이건 아니다. 아무튼, 조동혁에게도 보고 배울만한 점은 있었으니 어제 나에게 보여줬던 바로 그 자세다.

두둑한 배짱.

지지 않겠다는 오기.

타자가 배터 박스 가까이 선다고?

혹시라도 몸에 공이 맞으면 어쩌냐고?

어디 맞으려면 맞아보라지.

그런 강한 마음으로 공을 던졌다.

몸쪽 높은 코스.

가장 빠른 공.

-뻐엉!!!

“스트라잌!!”

160.4km/h의 속구가 존을 공략했다. 타자가 움찔할 만큼 바짝 붙인 공이었다. 감히 방망이가 튀어나오지 못했다.

[와, 정말 기가 막힌 제구입니다. 몸쪽 높은 코스 보더라인을 스쳐 가는 160.4킬로의 강속구!! 저건 정말 자기 제구력에 자신이 없으면, 아니, 제구력에 자신이 있어도 배짱이 여간 두둑하지 않으면 절대 던질 수 없는 코스거든요. 특히 오늘과 같이 중요한 경기라면 더더욱이요. 올해 고작 열아홉 살. 최수원.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원래 운도 실력인 법. 극에 다다른 집중력이 만들어낸 결과물 정도로 생각하자.

아무튼, 이걸로 볼카운트는 0-2.

조유진이 나에게 세 번째 공을 요구했다. 솔직히 좀 뻔한 공이었다. 하지만 뻔한 레퍼토리가 뻔하다는 말이 붙을 만큼 사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높은 코스에서 뚝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볼.

-부웅!!!

“스트라잌!! 아웃!!”

저렇게 0-2로 카운트가 몰리면 타자 입장에서는 매우 초조해진다. 어지간한 공에는 방망이가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방금 커브는 떨어지는 타이밍도 코스도 완벽했다.

[헛스윙!! 삼진!! 최수원 선수!! 브레이브스의 선두 타자인 김나라를 공 세 개로 잡아냅니다!!]

[이어서 타석에 2번 타자 장찬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나라 선배와 찬민이 형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기꺼웠다.

찬민이 형의 약점은 너무 명확했다.

155 이상의 빠른 공.

그리고 그 빠른 공과 연계되는 체인지업.

초구 바깥쪽 높은 코스 158.7km/h의 빠른 공.

아, 근데 손에서 좀 빠졌다.

망할.

-뻐엉!!!

“스트라잌!!!”

하지만 뜻밖에도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줬다.

이걸 잡아준다고?

공을 보낸 타자는 당연히 놀라고, 공을 받은 포수도 좀 놀라고, 공을 던진 나도 놀랄만한 판정이었다.

솔직히 내가 지금 만약 방망이를 쥐고 선 상황이었다면 심판을 한번 쳐다봤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난 글러브를 끼고 마운드에 서 있는 상황이다.

쪼유의 프레이밍이 좋았던지 심판이 오늘 토토를 우리 팀 승리에다가 좀 걸었던지, 뭐가 됐건 나쁘지 않았다. 사실 또 이런 게 야구의 묘미 아니겠는가.

찬민이 형이 미간을 찌푸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두 번째.

바깥쪽 낮은 코스.

이건 찬민이 형이 좋아하는 코스다. 하지만 조금 전에 잡아줬던 코스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히 밖으로 빠졌다. 실로 절묘했다. 거의 신들린 커맨드다. 휘두른다면 땅볼, 혹은 운이 좋아도 파울이다.

-뻐엉!!!

방망이가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스트라이크 콜도 같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이전 높은 코스보다 더 존 쪽으로 붙었는데 이건 안 잡아준다고?

이번엔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무슨 저 심판의 존은 위아래가 뒤집힌 사다리꼴인가? 한국 시리즈같이 중요한 경기에 심판의 존이 이 모양이라니. 저런 심판 때문에 한국 야구가 발전을 못 하는 거다. 하여간 구심을 전부 AI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볼카운트 1-1.

분노와 짜증은 본래 나와 같은 유형의 투수에게는 힘이 되는 법이다. 빠른 공 하나를 더 보여주고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잡아야겠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뜨끈뜨끈하게 데워놓은 어깨는 내가 원하는 그대로 움직였다. 아주 깔끔하게 손끝으로 공을 챘다.

빠른 공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오늘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다. 그러니까 이제 이걸로 카운트 하나를 적립하고 다음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딱!!!

타자의 방망이가 속구를 후려갈겼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타구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안타다.

그리고 종종 그랬듯 나의 직감은 이번에도 빗나갔다.

하여간 수비에 관해서 만큼은 이 마린스라는 팀에서 내 직감은 도무지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당연히 내야 땅볼 아웃이나 외야 뜬공 아웃이라 예상한 타구가 어처구니없는 안타가 되는 주제에 이렇게 안타라고 직감한 공이 외야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잦았으니까.

또 이주혁이었다.

그냥 쉽게 말해서 이주혁이 또 이주혁을 했다.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부정적인 의미 말고 가끔 나오는 긍정적인 의미의 이주혁이었다.

[와, 이주혁 선수의 슈퍼플레이!! 참 멋진 수비였습니다!! 저기서 저걸 또 저렇게 잡아내네요.]

[장찬민 선수에게는, 그리고 브레이브스에게는 참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162.4km/h의 빠른 속구를 제대로 잡아당겼는데 말이죠.]

분명 오늘 컨디션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초반부터 좀 말리는 느낌이다. 찬민이 형의 경우 내가 회귀하기 전을 기준으로 95마일 이상 속구에 타율이 2할 남짓? 상대 투수가 체인지업을 제대로 던질 줄 알 경우 그 타율은 1할도 채 안 됐었다. 물론 KBO에서 그런 공을 던지는 투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스몰 샘플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본래 약점인 강속구 투수의 체인지업을 의식한 나머지 강속구에도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약점을 극복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이건 본인도 명백히 인지하고 있는 약점이었지만 은퇴할 때까지 고치지 못했던 약점이었다. 아무리 북경의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 토네이도가 생길지 모른다지만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저 양반이 인지하고 있지만 은퇴할 때까지 못 고치던 약점을 대뜸 고쳐서 나타난단 말인가.

그러니까 이건 그냥 운이다.

1할도 채 안 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그래도 몇 푼은 된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냥 그 몇 푼 확률이 맞아 떨어진 것뿐이다.

‘그래, 그냥 운이 없었······. 아니, 잠깐만. 그것도 아니지. 엄밀히 말해서 이주혁이 여기서 호수비를 할 확률은 그것보다 더 낮으니까 이건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긍정적인 마인드로 세 번째 타자를 향해 공을 뿌렸다.

노리던 곳은 바깥쪽 낮은 코스. 공이 조금 몰려서 몸쪽으로 많이 이동하긴 했지만 그래도 낮게 잘 들어갔다.

-딱!!!

높게 뜬 타구.

“마이 볼!!!”

규만 선배의 미트가 가볍게 그 타구를 받아냈다.

[초구 내야 뜬공 아웃!! 최수원이 1회 초 브레이브스의 타선을 완벽하게 막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

“오늘 수원이 컨디션 되게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게. 확실히 최수원은 100마일짜리 공이 팍팍 나와야 뭔가 좀 되는 느낌이야.”

“그거야 최수원 투구가 레파토리는 단조로운 주제에 좀 공격적이니까. 공의 위력으로 찍어 누르는 피칭인 건데 그거 떨어지면 좀 그렇지. 시즌 초중반에 한참 잘 나갈 때도 완전 한복판에 속구 던지는 경우 진짜 많았었잖아.”

“맞아. 그래서 그때 인터넷에 최수원 성적 떨어지는 이유가 분석돼서 그렇다는 기사에 최수원은 애초에 분석할 게 없는 투수였는데 무슨 헛소리냐는 댓글이 베플이었잔아.”

공수교대 시간.

짧고 굵었던 최수원의 피칭에 대해서 한참을 떠들던 두 사람 중 하나가 갑자기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야, 근데 저기 저 사람.”

“저 사람? 누구?”

“아니, 우리 대각선 앞쪽에 덩치 큰 외국인.”

“아, 알렉산더 맥도웰 닮은 외국인?”

“뭐야?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근데 알렉산더 맥도웰이랑 최수원이랑 친하잖아. 진짜 알렉산더 맥도웰 아닐까?”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거기도 지금 한참 월드 시리즈 진행 중인데 알렉산더 맥도웰이 대체 왜 나타나냐? 그거 끝나면 신인왕도 받아야 할 텐데.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한국 왔다고 치자. 그러면 지금 기사 뜨고 어? 난리 나야지. 당연히 알렉산더 맥도웰은 주변에 보디가드 줄줄 달고 다녀야 할 테고.”

“그런가?”

“애당초 알렉산더 맥도웰은 초관종이라서 SNS 엄청 열심히 한다고. 한국 왔으면 어? SNS에도 자기 한국 왔다고······.”

“뭐야? 왜?”

“미친······.”

“아니, 뭔데?”

오규환 씨가 조용히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는 알렉산더 맥도웰의 어깨너머로 방망이를 쥔 등 번호 79번의 타자 최수원이 있었다.

“씹······. 이거 뭐야? 알렉산더 맥도웰이 한국을 왔는데 왜 인터넷에 기사 한 줄이 없어? 심지어 자기 SNS에 대놓고 사진을 올렸는데?”

“한국 기자들은 알렉산더 맥도웰 팔로우 안 했나 보지. 그리고 요즘 한국 시리즈에 월드시리즈로 걔들도 바쁠 테니까.”

“그런가? 아, 맞다. 오규. 너 토익 900점 넘기지 않았었냐?”

“어, 넘기긴 넘겼었지. 근데 그건 왜······. 설마? 야, 미쳤냐? 그거 다 까먹은 지가 언젠데. 벌써 15년도 년 전이잖아.”

“그래도 하던 가닥이 있을 거 아니야. 나보다는 낫겠지.”

그리하여 그 날. 오규환 씨는 KBO 공인구에 내셔널리그 신인왕의 사인이라는 매우 희귀한 사인볼과 본래 79명밖에 안 되던 SNS에 1079명의 팔로워를 얻을 수 있었다.

#알렉산더맥도웰 #한국시리즈2차전 #메이저리그신인왕확정적 #Alexandermcdowell

경기가 계속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