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41화 (241/305)

241화. 한국 시리즈(6)

사직 경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 한 111번 버스. 어렵사리 표를 구한 사람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막 오늘 선발 투수가 최수원이라고 발표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기대하지 못했던 행운이다.

“야, 규환아. 근데 왜 수원이가 오늘 선발인 거냐?”

“왜? 싫어?”

“싫겠냐? 당연히 좋아서 그러지. 사직 표 구하는 것만 해도 더럽게 힘들었는데, 브레이브스는 비인기 구단이라더니 표 구하기가 어째 사직보다 더 힘드냐?”

“그게 브레이브스 팬들이겠냐? 서울 사는 마린스 팬이 몇 명인데. 당장 우리 큰할아버지네만 하더라도 3대가 마린스 팬이야. 게다가 수원이 개인 팬도 좀 많냐? 이제 내년에 메이저로 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러면 이번 등판이 수원이 한국에서 하는 마지막 등판이니까 그거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거지.”

“그러면 3차전에 수원이 등판 보려고 샀던 사람들은 피눈물 좀 흘리겠네?”

오규환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근데 좀 하드코어한 팬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을걸?”

“엥? 어떻게 그걸 예상을 해?”

“우리 2선발 용병이 디에고잖아. 디에고 로드리게스.”

“그게 왜?”

“디에고가 작년에 어디에서 강했는지 몰라?”

“야, 그걸 어떻게 모르냐. 아주 마린스만 만나면 날아다녔는데.”

“아니, 마린스는 빼야지. 누가 됐건 마린스 만나서 못 날아다닌 애를 찾는 게 더 힘들잖아. 그리고 내 질문은 ‘누굴 만나면’이 아니라 ‘어디에서 강했느냐’잖아.”

사실 오규환 씨의 말과 달리 작년 엘리츠에서 뛰었던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마린스에게만 특별히 더 강했던 건 사실이다. 거의 마린스 담당 일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작년과 올해 모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도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전체적인 숫자를 보면 그리 특출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형태가 조금 이질적이다.

“그러니까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홈에서는 그냥저냥인데 원정에서 날아다녔다. 뭐 이 말이네?”

“어, 작년이랑 올해, 디에고가 브레이브스랑 총 다섯 경기 했거든. 그중에서 세 경기밖에 원정이었는데, 물론 샘플이 너무 작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또 세 경기가 다 괜찮았거든.”

“야, 근데 디에고는 구위도 구위인데 사실 좀 땅볼 유도하는 투수 아닌가? 그리고 고척은 인조잔디라서 땅볼 투수한테 불리한 거 아니야?”

“그게 그러니까······.”

***

나의 시리즈 2차전 선발 등판 소식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조금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겠지만 사실 팀 내부적으로는 이미 다 이야기가 돼 있던 부분이었다. 내가 괜히 1차전에 일루수가 아니라 지명 타자로 출장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뻐엉!!

“굿 볼. 몸 상태 좋은데?”

“당연하지. 어제 방망이 한 번 휘두르고 아주 푹 쉬었는데. 지금 체력이 아주 200프로다.”

조유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뻐엉!!

“그래그래, 근데 200퍼센트인 건 잘 알겠는데. 지금 첸졉도 너무 200퍼센트로 힘있게 들어온다.”

“그러게. 오늘 이상하게 체인지업이 좀 잘 안 떨어지네.”

“뭐, 이상한 일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첸졉만 몇 개 더 던져보고 마무리하자. 오늘 피칭은 항상 하던 것처럼 속구랑 커브 위주로 가는 걸로 하고.”

“오케이.”

한국 시리즈에서 쪼유 녀석과 배터리라니.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는 고2 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뭐, 친밀함의 정도로 따져도 이전의 삶에서 열여섯부터 서른넷까지 19년을 알고 지낸 것보다 지금 4년을 알고 지낸 것이 더 친하지 않을까?

“난 가끔 이게 좀 꿈 같이 느껴지더라.”

“뭐가?”

“아니, 그렇잖아. 수원이 너야 프로 가는 게 당연한 유망주였지만 난 그게 아니었으니까. 근데 이렇게 2라운드로 프로에 온 것부터 해서 1년 차에 주전 포수 자리 따내고. 심지어 한국 시리즈에서 공까지 받고 있으니까.”

쪼유의 눈빛이 쓸데없이 촉촉했다.

“야, 그거 하지 마라.”

“뭐?”

“그 눈 촉촉하게 하는 그거. 아니, 진짜 누가 보면 뭐 어? 우리 우승이라도 이미 한 줄 알겠네. 물론 우승이야 당연히 할 거긴 하지만. 아무튼 벌써부터 감상에 젖고 그러지 말라고. 어? 너 그거 알지? 이거 영화 같은 거였으면 사망 플래그인거. 슬램덩크도 이러다가 ‘그 사진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이런 거 뜨잖아. 물론 우린 절대 안 그럴 거지만.”

“그래, 한국 시리즈 우승이 뭐 대수라고. 우리 이미 고등학교 다닐 때 우승해봤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한국 시리즈 우승이랑 고등학교 전국대회 우승은 좀 다르지. 심지어 마린스인데. 이 정도면 솔직히 메이저리그 빅마켓 구단의 월드시리즈 우승보다는 난이도가 높은 거 아니냐? 아니다. 어쩌면 스몰마켓팀 우승만큼 난이도가 높을지도······.”

“그래? 그러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일 어려운 마린스 우승부터 클리어 하고, 나중에 메이저에서 배터리로 또 같이 우승하면 되겠네.”

“글쎄다. 메이저에서 우승도 지금 같아선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 앞에 ‘배터리로’ 부분이 좀 어렵지 않을까? 일단 그건 네가 메이저에 진출해서 주전 포수가 되는 매우 험난한 과정이 필요하잖아.”

“새끼. 하여간 로망이 없다니까. 이런 순간까지 꼭 그렇게 팩트로 사람을 패야겠냐? 나도 나 메이저 못 가는 거 알아. 인마.”

어째서였을까?

그래, 어쩌면 조유진이 말했던 것처럼 ‘이런 순간’이라서 나도 좀 감성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쪼유, 난 분명히 어렵고, 험난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 안 했다.”

“어?”

“몰라. 나 명상 좀 하러 간다. 타격 연습 똑바로 하고 이따 보자.”

“야, 잠깐. 잠깐만. 지금 그러면 나도 메이저 갈 가능성 있다고 말한 거냐? 나 영어 공부 시작해야 하는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가서 타격 연습이나 시작해라.”

“뭐야 최수원.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거야?”

“아, 좀 꺼져. 나 오늘 선발이라고.”

“그래, 좀 어렵고 험난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메이저리거가 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이 몸. 이만 꺼져주도록 하지.”

장담한다.

쪼유 저거 이제 나중에 방송 인터뷰에서도 저거 떠들고 다닌다. 백프로 확실하다.

***

[사직 구장에서 펼쳐지는 마린스와 브레이브스, 브레이브스와 마린스의 한국 시리즈 2차전. 2027년 KBO 최강의 팀을 가리는 시리즈의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저는 캐스터 이주형. 그리고 어제 경기에 이어 오늘도 저와 함께 해설을 도와주실 박동식 위원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동식입니다.]

[어제 1차전 경기 같은 경우 양 팀 에이스의 이름값에 걸맞은 명품 투수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2차전 경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박동식 위원님 어떻게 보십니까.]

[어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어제 경기 딜튼 도일리 선수의 피칭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물론 조창혁 선수도 매우 잘 던지기는 했습니다. 특히 지난 16일에 준플레이오프 첫 번째 경기에 등판하고 고작 18일 사이에 네 번째 등판을 하는 터프한 일정을 소화한 것 치고는 말이죠. 아마 KBO보다 훨씬 일정이 터프한 메이저 스카우트들도 굉장히 인상 깊게 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조창혁 선수의 경우 이번 시즌을 끝으로 포스팅을 통한 메이저 진출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으니 아주 좋은 쇼케이스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조창혁 선수 입장에서 그 쇼케이스가 패배로 끝난 것은 참 아쉽겠습니다만 사실 조창혁 선수가 내준 점수는 고작 1점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 1점도 뭐 피할 수 없는 사고였죠. 상대가 최수원 선수 아니었습니까. 아무튼 이야기가 조금 돌았습니다만, 어제 경기만 보자면 전 두 에이스 가운데 딜튼 도일리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조창혁 선수의 칭찬을 그렇게 하셨는데요?]

[그거야 터프한 일정임에도 잘 해냈다. 뭐 그런 개념이고요. 사실 이 피칭이라는 게 투수도 중요하지만 상대하는 타자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긴 휴식이라는 건 사실 가끔 실전 감각 측면에서 독이 되기도 하거든요. 전 지금 마린스에게 좀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제 조창혁 선수의 호투 상당 부분이 거기에 기댄 면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딜튼 도일리 선수는 한참 타격감이 올라온 브레이브스의 타선을 꽁꽁 묶었고, 조창혁 선수는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마린스 타자들의 타격감이 좀 많이 떨어진 상태라 호투할 수 있었다. 뭐 그런 말씀이신가요?]

[실제로 조창혁 선수의 경우 원래 최고 160까지 던지는 리그 최고 수준의 강속구 투수인데 어제 경기 159를 넘긴 공은 딱 한 번. 최수원 선수에게 잘못 들어갔던 빈볼뿐이었고. 전체적으로 156km/h 전후로 구속이 형성됐거든요. 시즌 30경기. 거의 200이닝을 던지고 포스트시즌에 그렇게 또 던졌으니 지칠 수밖에 없죠.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전 오늘 경기의 집중할만한 부분은 어제 경기를 통해서 마린스의 타선이 얼마나 타격감이 살아 났느냐. 그리고 최수원 선수가 과연 마운드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1회 초.

마운드에 최수원이 섰다.

시즌 초중반 KBO 최초의 퍼펙트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였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몇 경기에서 무너지며 한때는 평균자책점이 3점대까지 무너지기도 했었다.

전문가들이 분석하기로는 투타겸업이 가져오는 체력적인 부담. 그리고 첫 프로 시즌이라는 경험적인 문제가 겹친 기복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지난 3주간의 휴식이 최수원 선수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가장 큰 관건이겠군요. 그런데 어제 그 첫 타석 홈런으로 봐서는 컨디션이 상당히 좋다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글쎄요, 전 타자 최수원은 마라톤을 뛴 직후에 타석에 서서 홈런을 날린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말 그대로 논외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피칭이라는 것이 단순히 오래 쉬었다고 더 잘 던지는 것도 아니라서요. 아, 지금 타석에 브레이브스의 1번 타자. 어제 경기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던 김나라 선수가 올라옵니다.]

“자자, 다들 어제 패배는 잊어버리고 오늘 경기에만 집중하자. 원정에서 1승1패하고. 홈 돌아가서 3연승 해서 깔끔하게 시리즈 가져가면 되는 거야.”

경기가 시작되기 전 박유성 감독의 말을 곱씹었다.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어제 패배를 잊자더니 그 말 끝나기도 전에 오늘 이겨서 1승 1패 가져가자는 말로 패배를 다시 상기시킬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래, 감독도 지금 똥줄 타겠지. 내년에 창혁이가 메이저를 가고 찬민이도 FA로 풀리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김나라 본인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브레이브스는 가장 좋은 선수는 잡지 못한다. 모그룹의 ‘지원금’에 의존하는 KBO의 기형적인 행태에서 발생하는 거액의 FA 이적료는 구단 자체의 수익금만으로 흑자를 봐야 하는 브레이브스라는 ‘기업’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잡는 선수는 적당히 좋은 선수. 혹은 포스팅으로 메이저에 진출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그러니까 브레이브스에서 밖에 뛸 수 없는 선수들로 한정된다.

김나라는 전자였다. FA자격은 얻을 만큼 꾸준하지만, 시장에서 평가하기를 4년 20억 내외. 시장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40억까지는 절대 갈 수 없는 선수다.

김나라는 거의 무조건 브레이브스에 남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 역시 이번 우승의 기회가 너무 소중했다.

‘어떻게든 1루에 나가기만 해보자.’

브레이브스는 강한 2번을 사용한다.

장찬민.

4년 전에 햄스트링이 나가는 그 부상만 없었다면 앞선 브레이브스의 유격수들처럼 메이저리그를 충분히 노려볼만한 선수다. 부상 이후로도 여전히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타격을 뽐내는 타자로 일단 출루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장찬민이 해결해줄 것이다.

마운드에 최수원이 와인드업했다.

‘그래, 나가기만 하자.’

초구.

벼락처럼 뽑혀나오는 최수원의 공에 맞춰 기습 번트를!! 번트를······. 그러니까 기습 번트를 대려고 했는데······.

-뻐엉!!!

“스트라잌!!!”

그건 번트를 대기에는 너무 빠른 공이었다.

160.1km/h

11월.

쌀쌀한 날씨.

그리고 1회 초. 선두 타자를 상대로 초구.

대뜸 100마일짜리 속구가 존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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