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한국 시리즈(5)
역시 조창혁, 곤조 하나는 확실하다.
저 녀석이라면 같은 코스로 이번엔 제대로 좋은 공을 던질 줄 알았다. 솔직히 나라도 그랬을 거다.
물론 나라면 저렇게 홈런을 두들겨 맞는 대신 멋지게 헛스윙을 끌어냈겠지만.
그라운드를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0:1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에게 이정훈이 다가왔다.
“와, 수원아.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에이, 뭘 이런 걸로 놀라고 그러십니까. 제가 대뜸 홈런 날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며칠 쉬고 타석에 들어갔다고 못 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조창혁이 사과한 거 말이야.”
“아, 그거요? 근데 그거야 뭐, 실투였으니까요. 보니까 좀 당황한 것 같던데요?”
“야, 아무리 실투라고 해도 짬밥이 거의 10년 차이인데. 보통 눈짓이라도 해주면 땡큐지. 모자까지 벗어주는 게 어디 흔한 일이냐? 그것도 조창혁이?”
사실이다. 실제로 KBO에서는 빈볼에 맞은 타자가 투수가 아무런 제스쳐가 없어서 벤치클리어링을 일으켰는데 알고 보니 던진 투수가 후배가 아니라 선배였고 타자는 바로 다음 날 그 투수를 찾아가 사과를 한 일도 있다.
“흔한 일은 아니죠. 근데 솔직히 저기 저런 몸매도 흔한 몸매는 아니잖아요.”
“몸매라고? 그게 무슨······. 아······.”
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필상으로는 분명 194cm에 110kg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 구장 내에 웨이트 트레이닝장 체중계에 올라간 거 슬쩍 봤는데 몸무게가 128kg이더라.
절대 프로필 상 키와 체중을 속인 게 아니다. 시즌 초에는 진짜 그랬다. 평범한 투수의 체격이었다. 그런데 한국 밥이 입에 맞았는지 식사량을 늘리더니 몸에 근육이 쑥쑥 붙어서는 어느새 저렇게 더 커졌다.
특히 대단한 부분은 6개월 만에 18kg을 증량한 몸인데 배에 출렁이는 게 거의 없다. 팔다리도 두껍고 몸과 목도 너무 두꺼워서 194cm인데도 멀리서 보면 그렇게 키가 커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 내츄럴 본 레슬러. 딜튼의 이야기다.
“확실히 무섭긴 하겠다.”
“저도 딜튼이 우리 팀인 게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창혁이 나한테야 두들겨 맞는 동네북이긴 했지만 좋은 투수인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래 역사에서 녀석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빅클럽 기준으로 솔리드한 3선발 소리 들을 만큼 제법 활약도 했다.
사실 솔리드한 3선발 이러면 그리 대단한 느낌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이저 30개 팀 가운데서 적어도 50, 60번째 정도는 되는 투수여야지 솔리드한 3선발 소리 듣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충 KBO 하위권 팀의 2번째 용병 투수 정도는 되는 느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그 말인 즉.
-뻐엉!!
“스트라잌!! 아웃!!”
예상 밖의 홈런, 혹은 예상했던 홈런을 두들겨 맞고서도 곧바로 노형욱 정도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울 만한 기량을 보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JaJa!! 파이ting!!”
그래, 분명 시작은 영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본뜻과 전혀 상관없이 한국어 표현의 하나가 돼버린 파이팅을 딜튼이 매우 강렬하게 외쳤다.
“다녀올게.”
오늘 나의 역할에 수비는 없었다. 다른 모든 선수들이 자기 글러브와 미트를 챙겨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참는다. 이걸 참은 정도로 성적이 떨어지는 건 이미 8년쯤 전에 경험해봤기에 이 근질거림을 컨트롤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덕아웃 펜스에 몸을 기대고 최대한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과 마음을 함께 했다.
딜튼이 공을 뿌렸다.
그것은 100만 달러를 받는 에이스에 어울리는 피칭이었다.
시즌 초반 엘리츠의 선발 투수인 제이크 보어의 공을 보고 이런 대화를 딜튼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170만 달러짜리 공이란 말이지?”
“어, 작년 최동원상 수상자. 작년을 기준으로는 KBO 최고의 투수였지.”
“별 거 아닌데?”
“글쎄. 연말에도 딜튼 네가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네. 만약 그렇다면 너도 내년에 마린스에서 지금보다 훨씬 큰 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7개월.
이번 3주간의 컨디셔닝 훈련 가운데 딜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120만 달러.”
“어?”
“그 녀석이 170만짜리였으면 이번 시즌 나는 120만짜리 투수였다고.”
“뭐야? 딜튼 왜 그렇게 겸손해진거야?”
“겸손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야. 참고로 스완 너는 73만이다.”
“뭐야, 내가 딜튼 네 절반밖에 안 된다고? 그거 기준이 너무 이상한 거 아니야? 나 그래도 평자책이 2.93이잖아. 넌 2.98이고.”
“나보다 30이닝이나 덜 던졌잖아. 게다가 여기서 선발로 풀시즌을 치러보니까 알겠더라. 왜 제이크 보어가 그런 공으로 170만 달러나 받는지.”
딜튼은 이렇게 말했다.
굳이 메이저에서 통할만한 공을 결정구로 갖지 않아도 괜찮다.
그보다는 KBO에서도 통하지 않을 만한 실투를 최대한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즌 내내, 다른 선수들은 KBO의 널널한 일정으로 뛰더라도 혼자서 MLB급 일정으로 뛸 수 있는 체력을 갖추는 것도 좋다. 즉, S급의 구위와 A급의 체력보다는 S급의 체력과 A급의 구위가 더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제이크 보어 쪽이 나보다 낫지. 뭐랄까? 분배를 정말 잘 하는 느낌이랄까? 필요 없는 데서 힘을 슬쩍 빼는데, 그거 어설프게 따라하면 진짜 제대로 두들겨 맞는 거거든.”
“야, 잠깐만 너 그때 엘리츠전에서 제이크 보어랑 맞대결 때? 맞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정규시즌만 따지자면 제이크 보어쪽이 더 좋은 투수였던 거 인정. 근데 어차피 KBO는 골든글러브건 최동원상이건 포스트시즌 경기까지 포함이라며.”
그래, 한 시즌을 통으로 보면 제이크 보어는 170만 달러짜리 투수였고 딜튼 도일리는 120만 달러짜리 투수였다.
하지만 딱 한 경기. 만약 두 투수가 모두 최고의 상태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한 경기라면 어떨까?
정답은 간단하다.
제이크 보어는 단 한 번도 빅리그에서 풀 시즌은커녕 반 시즌도 뛰어본 적이 없는 투수다. 그리고 딜튼 도일리는 어찌 됐건 꾸역꾸역 빅리그에서 거의 풀 시즌에 가깝게 치러봤던 투수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153.7km/h의 하이패스트볼.
3주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가다듬은 마린스의 1선발 용병 딜튼 도일리가 자신의 맥시멈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
7회 초.
덕아웃에 앉아있던 조창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싯팔······. 이거 완전히 조진 것 같은데?’
조창혁은 약속을 지켰다.
4회 말과 6회 말에 어마어마한 야유를 감내하며 최수원에게 자동고의사구를 시전했다. 솔직히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피칭 자체도 완벽에 가까웠다.
간헐적인 안타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 자동고의사구 2개를 제외한다면 고작 2출루. 그래, 오늘 조창혁은 6이닝 1실점 2피안타(1피홈런) 1볼넷에 무려 9삼진으로 매우 훌륭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오늘 그의 피칭이 고작 18일 사이에 무려 네 번째 등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피칭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뚝 떨어지는 141.3km/h의 빠른 슬라이더. 딜튼 도일리 선수 또 삼진입니다. 벌써 이번 경기 열 번째 삼진!!]
[오늘 딜튼 선수 저 공이 특히 좋아요. 지금 브레이브스에서 저 공을 제대로 공략 해내는 타자가 없습니다.]
[딜튼 도일리 선수. 지금까지 6.2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을 단 한 번도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브레이브스의 2출루 모두가 실책에 의한 출루였어요.]
[사실 저렇게 경기를 풀어나가는데 실책이 나오면 멘탈이 흔들릴 법도 하거든요. 그런데 딜튼 도일리 선수.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참 대단합니다.]
지난 7개월.
딜튼이 한국에서 뛰는 그 기간 동안 피칭 레퍼토리 면에서 가장 발전 한 것은 슬라이더였다. 하지만 딜튼 도일리라는 투수에게 더 커다란 발전은 역시 멘탈리티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번 시즌.
최수원은 총 62실점을 하는 동안 52자책을 기록했다. 그리고 딜튼은 64자책을 하는 동안 79실점을 했다. 사실 15점 정도면 마린스의 엉망이었던 수비를 생각해보면 그래도, 실점과 자책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리그에서 그보다 큰 차이를 보이는 투수도 무려 셋이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원래 실책이라는 것은 기록관에 의해 결정이 나는 부분이고 딜튼 도일리는 이 부분에서 몇 번이나 손해를 봤다. 기록관을 제외한 나머지 전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실책만 감안하더라도 무려 3점.
그리고 딜튼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무려 2.98의 평자책을 기록했다.
시즌 초반, 팀의 에러에 크게 흔들리던 딜튼 도일리는 이제 없었다.
늘어난 체격만큼이나 단단해진 마음이 그를 지탱했다.
-딱!!!
4회 어처구니 없는 공을 놓쳤던 이주혁이 달렸다.
옷 위로도 볼 수 있는 딜튼의 튼실한 대흉근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끔 샤워할 때 거울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광배는 또 어떠한가.
공을 놓친 그에게 올라잇를 외쳐주던 딜튼의 얼굴은 그야말로 흉신악살 그 자체.
한 번만 더 공을 놓치면 뼈와 살을 발라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었다.
안전하게 원바운드로 공을 받는 대신 이주혁이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한 범위.
[이주혁 몸을 날려 봅니다만!! 아!! 조금 멀었습니다!!]
[커버를 나온 이정훈이 안전하게 공을 처리합니다. 주자는 1루에서 세이프. 투아웃에 주자 1루. 점수는 1:0. 마린스가 1점 앞서고 있습니다.]
“alright, alright”
저것이 정말 괜찮다는 말일까? 아니면 괜찮게 만들어주겠다는 말일까?
딜튼이 이어지는 타자를 삼진으로 또 잡아냈다.
그렇게 1:0이라는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7회 말.
조창혁은 또 다시 호투했다.
그는 투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인 KKK를 선보였다.
‘제발 밥 값 좀 하자. 새끼들아. 어?’
하지만 야구에서 투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는 경기의 양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법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상대 투수 역시 마찬가지로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날에는 더더욱.
딜튼 도일리는 무려 8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전광판의 점수를 그 숫자 그대로 고정 시켜 버렸다.
투구 수 117개.
삼진 12개. 1피안타.
8이닝 무실점
1차전 경기를 결정지은 것은 1회 초, 조창혁이 가져갔던 단 한 번의 기회.
그러니까 최수원이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던 바로 그 홈런이었다.
[한국 시리즈에도 여전히 뜨거운 최수원의 불방망이!!]
[경기를 결정지은 최수원(4타석 1타수 1안타 1홈런 3볼넷)의 1회 초 솔로 홈런포!!]
[양 팀 합계 삼진만 무려 28개!! 한국 시리즈 1차전을 뜨겁게 달군 명품 투수전!!]
[한국 시리즈는 내가 책임진다? 1차전 결정타 최수원!! 2차전 선발 투수로 낙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