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한국 시리즈(3)
약간은 걱정을 했다.
혹시라도 입국장을 통과하는 데 너무 많은 기자와 팬들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한국에서 야구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라는데······.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건 좀 곤란한데. 지금이라도 보디가드를 고용해야할까? 하는 그런 걱정. 그리고 그런 걱정은 입국장을 통과하는 순간 완벽하게 싹 사라졌다.
휑했다.
아니, 물론 입국장에는 각자의 지인을 찾는 이들이 많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가 걱정했던 언론이며 팬들 따위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슬쩍 선글라스를 내렸다.
마스크도 벗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택시를 잡아탔다.
선글라스를 쓴 아저씨가 조금 촌스럽지만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 온 걸 환영해요. 목적지가 어디?”
“사직, 사직 스타디움으로 부탁합니다.”
“오, 설마 한국 시리즈?”
“네, 친구가 꼭 보러 오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요.”
“친구가 야구팬인가봐요?”
“야구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친구죠.”
“그래도 진짜 친한 친구분인가 보네요. 이번 한국 시리즈 표 구하기 정말 힘들 텐데. 특히 부산 홈 경기라면 더더욱이요.”
“아, 대충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마린스가 보스턴 레드삭스. 아, 보스턴 쏘리. 필라델피아 필리스 같은 팀이라면서요.”
“필라델피아 필리스도 미국에서 제일 근본 있는 팀인가보네요?”
“아, 네. 뭐······.”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대화였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이건 선물.”
“알렉스? 이거 설마 알렉스 로드리게스?”
“아뇨, 그 아저씨 은퇴한지가 언제인데 그거 새 공이잖아요. 알렉산더 맥도웰 사인입니다. 나중에 알렉스 로드리게스 사인볼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가치일 거예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그러면 경기 재밌게 보세요.”
***
한국의 골든글러브가 얼마나 공신력이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매우 오래전부터 논란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입을 타기 시작했던 이 문제는 작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논란이 됐다는 이야기는 결국 오랫동안 꾸준히 누군가는 문제를 제기해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 역사가 무려 30년.
사람들은 여전히 골든글러브 투표에 많은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래도 1990년대에 외국인 용병에게 ‘너 MVP 받았으니까 골든글러브는 쟤 주자.’ 따위의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꼴은 사라졌다. 어디 그뿐인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을 했으니 정규시즌에 좀 부진했어도 골글 하나 정도는 챙겨줘야지. 같은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아, 물론 이건 국가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더 이상 활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골든글러브였지만 선수들 가운데는 이것을 커다란 명예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이것을 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마린스의 용병 투수 딜튼 도일리 역시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골든 글러브가 미국의 골드글러브처럼 단순히 수비만 보는 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와, 딜튼 너 이러다가 골든글러브 타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할 때는 자신의 어설픈 땅볼 처리를 놀리는 불쾌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국의 골든글러브라는 것이 일종의 ‘최고 투수상’이며 최동원상은 골드글러브와 필딩 바이블 어워드 같은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는 노골적으로 골든글러브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한국의 골든글러브는 포스트시즌 성적까지 다 포함이 된다 이거잖아.”
“뭐, 예전에도 말해준 것처럼 엄밀히 말하자면 포스트시즌 성적이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임팩트가 강하니까.”
“그래? 좋았어!!”
KBO 역사상 최강은 확실한 투수, 홀로 1:5의 싸움도 너끈한 전직 아마추어 레슬러. 딜튼 도일리가 자신의 글러브를 챙겨 들었다.
1회 초.
사직에 사람이 그득한 광경은 이제 너무 흔한 광경이었다.
커다른 응원.
귀를 찌르는 앰프 소리.
야구보다는 프로레슬링시합에 가까운 강렬한 무언가가 마운드에 선 딜튼 도일리를 강타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매우 좋았다.
야구도, KBO도. 그리고 이 마린스라는 팀과 이 팀을 응원하는 저 열정적인 팬들도.
[자, KBO리그. 대망의 한국 시리즈. 시리즈 1차전 경기. 여기는 사직. 사직 야구장입니다. 지금 마운드에는 부산 마린스의 에이스죠? 딜튼 도일리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이번 시즌 30경기에 등판해서 14승 7패. 193.1이닝 79실점 64자책. 평자책은 2.98. 경기당 평균 이닝 소화가 거의 6.2이닝. 정말 엄청난 이닝 이터의 면목을 보여줬습니다.]
[네, 맞습니다. 마린스를 보면 불펜의 뎁스가 좀 얇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펜에 과부하가 덜 걸렸던 건 역시 딜튼 도일리 선수의 공로가 톡톡했다고 봐야겠죠.]
[타석에는 1번 타자 김나라. 이번 시즌 2할9푼7리의 타율. 그리고 7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도 8경기 모두 출장해서 43타수 14안타. 0.325의 타율을 보여줬던 만큼 브레이브스의 팬분들이라면 이번 타석 역시 기대를 해봐도 좋을거라고 생각 합니다.]
워낙에 근육이 많은 덕분에 길지만 길어보이지 않는 딜튼의 몸이 움직였다.
몸쪽 꽉 찬 코스.
153.7km/h
-뻐엉!!
“스트라잌!!”
[와우, 153.7킬로!! 초구부터 거의 154에 가까운 공이 나왔습니다. 이번 시즌 딜튼 도일리 선수가 던진 가장 빠른 공이 그러니까······.]
[지난 엘리츠 전에서 던졌던 154.8km/h의 공이 최고 기록입니다.]
[와, 그러면 1회 초부터 자신이 던졌던 가장 빠른 공과 고작 1킬로 차이 나는 공을 던진 거네요. 이거 딜튼 도일리 선수 컨디션이 아주 좋은 모양인데요?]
[네, 사실 경기 전에도 미리 말씀드렸었습니다만 마린스의 경우 거의 3주에 가까운 시간을 푹 쉬었거든요. 이 경우 타자들의 타격감은 좀 걱정이 됩니다만 투수는 몸을 추스르기 정말 좋은 시간이에요. 보통 포스트시즌 같은 단기전이 투수놀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 마린스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 말씀드리는 순간 제 2구!!]
-따악!!!
한가운데 살짝 높은 코스 154.1km/h.
물론 노린 건 아니었다. 그냥 제구가 빗나갔을 뿐.
하지만 타자 방망이가 완전히 밀렸다.
타구가 파울 라인 밖으로 힘없이 굴렀다.
그리고 제3구.
-부웅!!!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슬라이더.
[딜튼 도일리!! 삼구삼진!! 정말 깔끔한 슬라이더였습니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딜튼 선수가 한국에 와서 가장 많이 발전 한 걸로 저 슬라이더를 꼽았거든요.]
[맞습니다. 사실 마린스의 김진규 코치도 현역 시절에 슬라이더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기억이나네요.]
[아, 그러고 보니 위원님. 현역 시절에 김진규 코치님께 상당히 약했었죠?]
[자, 타석에 2번 타자인 장찬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딜튼의 인터뷰는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한국에 와서 슬라이더가 많이 좋아졌다. 뭐랄까? 이 나라는 일종의 장인정신? 뭐 그런 게 남아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슬라이더로 별의별 이상한 묘기를 다 부렸다.
같은 투수가 종무브먼트. 횡무브먼트. 심지어 타이밍까지 조절하는데 물어보면 그 세 개가 전부 슬라이더란다. 그러니 그 많은 슬라이더 가운데 딜튼에게 딱 맞는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뻐엉!!
“스트라잌!!”
[초구 스트라이크!! 참 절묘한 코스였습니다.]
[아, 근데 그러고보니 장찬민 선수. 바로 작년까지 마린스 소속이었죠?]
“생각해보면 찬민이 점마도 참 불쌍타······. 1년만 딱 더 참지. 그랬으면 그렇게 바라던 우승도 가능했을 낀데.”
“무슨 헛소리고. 점마 나가면서 주둥이 턴 거 기억도 안나나? ‘우승 할라믄 마린스로는 답이 없습니다?’ 와, 내 진짜 속에서 천불이 났는데. 오늘 아주 일년 묶은 체증이 훅 내려가는 기분이다. 딜튼아!! 찬민이 점마 고마 확 뽀사삐라!!”
-딱!!
장찬민이 두 번째 속구를 잡아당겼다.
2, 3루간으로 흐르는 제법 어려운 코스.
오늘 경기 2루수로 출장한 사울 로페즈가 몸을 날려 타구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세 그대로
-톡
가볍게 던진 송구를 이규만이 받아내며 투 아웃.
경기장이 끓어 올랐다.
““와아아아아아아!!!””
그 분위기 그대로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삼자범퇴.
딜튼 도일리가 콧김을 내뿜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삼진 두 개를 포함한 삼자범퇴. 오늘 딜튼 도일리 선수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선발 투수만 따진다면 브레이브스의 조창혁 선수 역시 만만치 않죠. 아니, 성적만 보면 훨씬 훌륭합니다. 이번 시즌 30경기 등판 16승 4패. 197.2이닝. 평자책이 고작 2.69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역시 3주를 푹 쉬었던 딜튼 선수와 달리 최근 2주 동안 상당히 고된 일정을 이어왔다는 부분이겠습니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 그리고 플레이오프 1차전과 4차전에 등판해서 총 20.1이닝을 던졌는데 오늘 딱 나흘을 쉬고 다시 등판했습니다.]
[브레이브스 입장에서는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에이스다. 뭐 그런 거죠. 아무튼 올해를 끝으로 메이저리그 도전을 천명한 조창혁 선수. KBO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즌. 우승이라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지. 타석에 마린스의 강라온 선수가 올라옵니다.]
비록 경기는 없었지만, 훈련은 쉬지 않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 물론 그게 컨디셔닝 위주의 훈련이긴 했지만 꾸준한 청백전을 통해서 감각을 유지했다.
-딱!!!
[1루쪽 파울 타구!! 내야 관중석으로 들어갑니다.]
강라온의 시선이 전광판을 스쳤다.
149.4km/h
조창혁의 최고 구속이 160까지 나온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무리 1회 초에 첫 타자라고 해도 매우 느린 구속이다.
지친게 분명했다.
한국 시리즈라는 큰 경기에 1차전 선두 타자로 나왔으니 기선을 제압하겠다.
그 강력한 마음을 담아서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강라온 선수,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헛스윙 삼진!!]
강라온이 쓸쓸하게 물러났다.
“수원아, 딱 기다려라. 내가······”
최수원이 이정훈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
“선배, 제가 지난 1년 동안 쭉 지켜봤는데, 선배 저한테 큰소리 치고 나가셨을 때 타율이랑 그냥 나가셨을 때 타율이 거의 1할은 차이 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파이팅!!”
“어, 어?”
덕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이정훈이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의 조창혁이 공을 뿌렸다.
파울, 볼,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볼.
그리고.
-부웅!!!
156.7km/h.
이전보다 3km/h가깝게 훅 올라간 빠른 공에 헛스윙 삼진.
“이러면 이제 그 기록 1할 밑으로 떨어진 거냐?”
“아뇨, 여전히 1할은 넘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근데 그런 게 있으면 시즌 중에 미리 이야기를 해줬어야지.”
이정훈이 투덜거리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3km/h의 차이.
비록 결과는 헛스윙 삼진이었다지만 이정훈이 타석에 올라가기 전에 말을 끊은 보람이 충분히 있었다.
[자, 1회 말. 투아웃. 타석에 3번 타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최수원.
경기장이 가장 크게 끓어오르기에 그 등장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