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한국 시리즈(1)
기본적으로 야구는 로컬 스포츠다. 이게 얼마나 로컬이냐면 메이저리그 MVP를 수상한 선수가 WBC에 출장해서 좀 활약했다고 SNS 팔로워 수가 3배로 뛰는 일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MLB의 경우를 보면 팀만 30개에 워낙에 경기 숫자도 많다 보니 자기가 응원하는 팀 경기가 아니면 아예 보지 않는 게 보통이다. 아니, 솔직히 자기 팀 경기를 다 챙겨보기도 빡세다.
그런 판국이니 당연히 저기 외국 어딘가, 독립리그인지 아니면 프로리그인지 모를 곳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보통이라면 관심도 주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심지어 야구 관련 전국 토크쇼나 현재 가장 핫한 신성이 SNS를 통해 열심히 떠들어댄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역시 74라는 숫자가 주는 임팩트는 조금 남달랐다.
“74홈런? 홈런을 74개를 쳤다고? 얼마 전에 62개인가 넘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던 것 같긴 한데······.”
“멀티 홈런을 밥 먹듯이 했다더라. 심지어 한 시즌 경기 수도 144경기밖에 안 되는데 그나마도 114경기밖에 안 뛰었다고 하더라고.”
“아니, 근데 대체 리그 수준이 얼마나 엉망이길래 고작 114경기에 74홈런을 친다는 거야?”
“글쎄, TV에 평론가들 말로는 AA보다는 조금 낫고, AAA보단 못한 수준이라고 하던데?”
“그래? 그래도 그 정도면 남미 쪽 리그들이랑 비슷한 수준인 거 아니야?”
“물론 투수 수준은 AA보다 낮을 수도 있다고는 하던데. 근데 너 그 녀석 이제 열아홉인 거 알지?”
“뭐? 열아홉? 그러면 메츠에 알렉산더 맥도웰 그 미친놈이랑 동갑이라고?”
“어, 걔들 친구라고 하던데? 알렉산더 맥도웰이 SNS로 매일 떠든다잖아. 라이벌이니 뭐니 하면서.”
“아니, 근데 그러면 대체 왜 빅리그로 바로 안 오고 거기서 뛰고 있는 거래?”
“뭐라더라? 무슨 국제유망주 규칙이 어쩌고 하던데. 아무튼 내년에는 바로 올 거라고 하더라고. 지금 그래서 구단들이 돈 싸 들고 난리 났다던데?”
“그러면 우리 팀이 데려올 수 있으려나?”
“글쎄, 작년에 머레이 안 잡았으니까 페이롤에 여유는 좀 있을 텐데. 진짜로 걔가 맥도웰급이면 3억 달러는 줘야 하지 않을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에 발도 한 번 안 밟아봤는데 3억은 아니지.”
“야, 알렉산더 맥도웰이 AA에서 뛰면 74홈런 칠 수 있을 것 같아? 심지어 얘 투타겸업으로 159이닝인가 소화했다는데?”
“아, 맞다. 걔 투타겸업이었지. 근데 거기 리그 투수는 좀 수준이 낮다며.”
“그건 그런데 또 애매한 부분이 재작년까지 필리스에서 뛰었던 Lim이랑 평자책 0.1점 정도밖에 차이 안 난다고 하더라고.”
“아, Lim이 지금 거기서 뛰는 거야? 근데 Lim은 이제 나이가 있잖아. 필리스 말년에도 그리 좋지 못했는데 그것보다 0.1이나 높으면 피칭은 아직 메이저에서 던질 레벨은 아니지.”
“그래도 나이가 열아홉인 걸 감안하면 메이저에서 뛸만한 재능이 있는 건 확실하다고 봐야지. 19살에 AA에서 리그에이스급으로 던진 건데.”
과연, 그냥 자기 팀 야구만 챙겨 보는 평범한 팬들답게 국제 유망주에 관한 규칙이며 저기 물 건너 KBO에서 최수원이 소화한 이닝이며 평자책 등등 틀린 이야기들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이제 최수원이라는 선수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직 미국에 발도 붙이지 않은 최수원의 인지도가 벌써 로컬을 넘어 전국 단위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좋은 말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경기를 좀 자세히 살펴봤는데 이거 좀 구린내가 심하게 나더군. 처음에는 ‘아니, 무슨 에러가 이렇게 많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하고 봤는데. 마지막 이닝에서 확신했지. 어떻게든 기록 세워보겠다고 타석 찬스 주려고 이러는구나. 그 경기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거야.
─나도 봤어. 솔직히 좀 어이가 없던데? 찾아보니까 그 선수들 그래도 평균적으로 연봉 10만 달러씩은 받는 선수들이더라고. 좀 말이 안 되잖아. 10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그런 플레이를 한다니 말이야. 안 그래?
─그래, 뭐 그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516타석 364타수에 74홈런을 폄훼할 수는 없어.
─타석을 그렇게 대놓고 조작을 하는데 홈런이라고 조작을 못 할까. 내가 알기론 거기 리그 승부조작 사건도 종종 발생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야?
─어쩐지. 솔직히 74홈런은 좀 말이 안 되는 숫자이긴 했어.
─이봐. 멍청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멍청한 티 좀 내지 마. 손가락 있으면 가서 10년 쯤 전에 아웃카운트 10개씩 주던 홈런 더비에서 대놓고 치라고 던져주는 배팅볼에 홈런이 몇 개나 나왔는지 좀 찾아보라고. 어? 그러면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갈테니까. 게다가 스완의 마지막 경기 멀티 홈런 상대가 누군지 알아? Lim이야 Lim. 사이 영 2위까지 했던 그 Lim.
시즌 마지막 칰꼴라시코가 워낙에 대단했던 탓일까? 몇몇 사람들은 그 경기 자체가 조작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KBO가 지난 20년 이내에 승부조작만 무려 두 번이나 터진 리그였던 덕분에 그 말에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다.
─맙소사······. 조작이라니. 너희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린스랑 피닉스는 원래 그런 팀이야. 너희가 봤던 그건 마린스 피닉스 이번 시즌 하이라이트만 봐도 몇 번은 나오는 플레이라고.
─헛소리하지 마. 그래, 야구 하다 보면 실수 할 수도 있지. 하지만 한 경기에서 그렇게 많은 에러를 범한다고? 평균 10만 달러 이상을 받는 프로팀 선수들이? 그것도 두 팀 모두? 우리 고등학교 야구팀 애도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연발하지는 않아.
─근데 너희는 지금 왜 여기서들 싸우고 그러냐? 어차피 스완 내년에 빅리그로 올 거잖아. 그러면 결과 나올 거 아니야?
뒤늦게 레딧에서 벌어진 이 논쟁에 대해서 알게 된 한국 팬들이 찾아와 해명을 했지만 아쉽게도 마린스와 피닉스의 그 불가사의한 경기력을 이해하기에 그들은 너무 상식적이었다.
─아니, 진짜 마린스 다른 경기를 좀 보면 이해할 수 있다니까?
***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제법 긴 휴식이 주어졌다.
무려 3주.
다만 주어진 휴가는 나흘이 전부였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쉬고 훈련을 시작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보는 눈이라는 것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 다들 엄한 짓들 하지 말고. 나흘간 그냥 집에서 푹 쉬고 돌아와라. 몸 회복하라고 주는 휴가니까 이상한 거 하지 말고.”
“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가.
하지만 선수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휴가였다. 물론 KBO의 경우 매주 월요일에 휴식일이 있으니 주7일 근무는 아니긴했지만 그렇게 휴식일인 날에도 훈련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원정이 겹치다보면 휴식일이 휴식일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뭐, 시즌이 끝나고 3개월 정도 푹 몰아서 쉬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야구 선수는 절대 워라밸이 좋은 직업은 아니다.
“야, 최수원 휴가 때 뭐 할 거냐?”
“글쎄? 마사지 받고, 컨디셔닝 훈련 좀 하고. 그럴 생각인데 왜?”
“아니, 서울 올라갈 거면 같이 올라가자고 하려고 그랬지.”
“쪼유 너 서울 올라가려고?”
“어, 모처럼 휴가인데 부모님 얼굴도 좀 보고. 애들도 좀 보고. 그래야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쪼유 네 성적에 그런 걸 하고 싶냐고 잔소리를 할 뻔했지만 다행히 속으로 삼킬 수 있었다. 사람이라는 게 계속 조이기만 한다고 더 조여지는 게 아니다. 의외로 잠깐 풀었다가 다시 조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래, 복귀 늦지 말고. 어디 나가서 술은 절대 마시지 말고. 괜히 술 마시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너 진짜 가루가 될 수도 있으니까.”
“걱정 하지마. 가서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애들 얼굴만 보고 내려 올 거야.”
***
대전.
피닉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마린스에게 패배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규시즌을 4위로 마무리했고 준플레이오프 직행에 실패했다. 타격은 매우 컸다. 임광형이라는 1선발 카드를 사용했고, 필승조까지 줄줄이 사용했는데 경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피닉스 팬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하지만 피닉스 팬들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런 최악의 결과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게 몇 년 만의 가을야구냐?”
“2018년에 했었으니까 딱 10년 만이네.”
“그래도 우리 10년에 한 번 텀으로 가을 야구를 하긴 하네.”
그들은 무려 10년 만에 가을 야구에 진출했다는 사실 자체를 즐겼다.
-딱!!!
KBO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기본적으로 4위 팀에게 매우 유리했다. 2015년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만들어진 이후 무려 12년 동안 5위 팀이 업셋으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연전 모두 홈에서 치르고 심지어 2경기 중 한 경기라도 비기면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이건 업셋을 당하면 그것 자체로 대단한 진기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
[7회 초 원아웃, 박동석의 쓰리런!! 점수는 이제 11:4. 재규어스가 무려 7점을 앞서 나갑니다.]
[오늘 재규어스의 타선이 상당히 매섭습니다.]
[투수진도 그렇고 재규어스. 오늘 집중력이 매우 좋습니다. 본인들도 오늘 경기가 벼랑 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피닉스는 아무래도 지난 마지막 경기에 불펜도 그렇고 야수들 체력도 너무 많이 소모한 여파가 조금 크지 않나 싶습니다.]
그야말로 결정적인 쓰리런이었다.
7회 초. 8:4의 스코어까지도 자리를 지키며 피닉스를 열렬히 응원하던 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할 수 있어. 아직 공격 찬스가 두 번이나 남았잖아.”
어떻게든 오늘 경기를 보기 위해 최대한 스케줄을 정리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직관을 할 여력은 나지 않았던 박은진이 TV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재규어스는 7회에 석점을 더 추가하며 무려 14:4라는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점수 차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점수 차이만큼이나 대전 피닉스파크에 빈자리가 점점 늘어갔다.
1차전.
16:5 패배.
하지만 그 무참한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피닉스의 팬들은 바로 이튿날 이어지는 2차전에 꾸역꾸역 참가했다.
비록 어제 경기는 패배했지만 여전히 더 유리한 것은 피닉스였다. 그래, 2차전에 이기지 않아도 좋다. 비기기만 해도 준플옵에 진출하는 것은 피닉스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12년 역사에 업셋은 없었다.
그리고 약속의 7회 초.
피닉스파크를 찾은 어린 팬이 눈물을 흘렸다.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박은진도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울었다. 물론 어린 팬의 눈물이 슬픔이었다면 박은진의 눈물은 빡침이라는 차이는 있었다.
그들은 생각했어야 했다.
대전 피닉스는 마린스와 함께 KBO에 새로운 기록을 담당하는 팀이라는 것을.
[서울 재규어스!!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시작한 이래 최초 업셋!! 준플레이오프 진출!!]
그렇게 누군가의 눈물과 누군가의 환희 속에서 포스트시즌이 계속 진행됐다.
144번째 경기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피닉스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아무 힘도 못 쓰고 패배했던 것처럼 준플레이오프 역시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모든 힘을 쏟은 재규어스가 아무 힘도 못 쓰고 3:0으로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이렇게 되면 마린스한테는 좀 유리하려나?”
“뭐가?”
“아니, 브레이브스가 거의 전력 그대로 보존한 채로 플레이오프 올라 온 거잖아. 그러면 한국시리즈에 누가 올라오건 간에 만신창이일 확률이 높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