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우승 이후(8)
10월 초.
시간은 저녁 11시 23분.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계절이었다.
조유진의 등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긴장?
아니, 불안이다.
‘이거 이대로 경기 끝나면 무슨 일 벌어지는 거 아니야?’
차라리 한 71홈런 즈음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필 73 홈런. 그 역사적인 숫자를 다시 쓴 것이 문제다.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속으로 그 73이라는 숫자가 경신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신기록이라는 건 항상 매력적인 법이기도 했고.
오민엽이 타석에 섰다.
KBO의 골든글러브가 MLB의 골드글러브와 다르다는 사실은 이미 야구팬이라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굳이 따지자면 KBO의 골든글러브는 MLB의 실버슬러거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작년 KBO의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은 실버슬러거보다 골드글러브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0.261/0.354/0.371.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방망이를 휘둘렀던 유격수인 엘리츠의 오형원보다 OPS가 0.08이나 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타격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혹은 ‘영양가’라는 것이 가득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득점권에서 더 강한 타자, 승부처에서 더 강한 투수 등은 허상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스몰샘플의 오류이며 애초에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숨겨둔 힘을 그런 순간에만 폭발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모든 일에는 종종 예외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적어도 작년부터 올해까지의 오민엽은 그 ‘예외’에 속하는 남자였다.
“이거 아무리 봐도 나 나중에 마린스에서 공로패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네?”
“아니, 재작년에는 마린스랑 맞대결에서 내가 활약해준 덕분에 마린스가 수원이 데리고 갔잖아. 아마 그때도 마린스 팬들은 나 무지하게 응원했었는데. 지금은 또 이렇게 내가 뭔가 해주기를 응원해주고 있잖아. 안 그래?”
“하하······.”
“그런 의미에서 공로패 대신에 윈윈이나 좀 하자. 어차피 마린스는 지금 1승 더하는 거 별 의미도 없잖아. 너도 최수원이랑 동창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 깔끔하게 한가운데 속구로 하나 가자.”
“하하, 듣던 대로 농담이 참 짓궂으시네요.”
“어? 농담 아닌데. 순도 백프로짜리 진심인데.”
마운드의 박재혁이 와인드업했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전가의 보도.
149.1km/h의 커터가 날아왔다.
-뻐엉!!
“스트라잌!!”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저 선배 오늘 공이 왜 이리 좋다냐.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두 번째.
비슷한 코스 비슷한 공.
-뻐엉!!
이번에는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골라낸 게 아니었다.
이 코스로 이렇게 오는 공은 쳐봤자 앞선 두 타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드는 공에 스트라이크.
그리고 네 번째 파울.
다섯 번째 또 파울.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의 긴장감이 점점 고조됐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1-2.
박재혁이 여섯 번째 공을 던졌다.
가운데로 상당히 몰린 실투.
항상 원하는 코스로 공을 넣을 수는 투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심플한 진리 아래에서 오민엽이 끈질기게 기다려온 공이었다.
-딱!!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박재혁은 어째서 자신이 무려 66.1이닝을 던지는 동안 고작 14점밖에 내주지 않았는지를 증명했다. 복판에 몰렸음에도 실로 더러운 테일링이 정타를 피해 냈다.
2, 3루간 제법 빠른 타구.
강라온이 타구를 잡아냈다. 강한 스핀이 걸린 타구가 글러브 안에서 돌았다. 강라온이 침착하게 타구를 뽑아내서 1루를 향해 빠르게 송구했다.
“아······. 강라온 쟤는 이 타이밍에 왜 쓸데없이 수비가 깔끔한건데!!”
“아니, 규만이는 포구도 매일 놓쳐대면서 저건 또 왜 저렇게 잘 잡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지가 2점 홈런으로 똥을 쌌으면 어? 해결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여기서 포구 실책도 좀 하고. 어?”
거의 동시라고 봐도 무방할 타이밍.
심판의 양팔이 올라갔다.
“세이프!!”
1루 베이스를 밟은 오민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를 향해 사람들이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그래, 인마!! 너 어? 예전에 우리 이겨줄 때부터 믿고 있었다고.”
“난 솔직히 피닉스에서 오민엽 쟤랑 최으뜸이 제일 호감 가더라. 솔직히 수원이가 지금 우리 팀에서 뛰는 거 전부 걔들 덕분이잖아.”
너무나도 당연하게 챌린지 따위는 없었다.
경기장에서 인상을 찌푸린 것은 오직 마운드의 박재혁뿐. 덕아웃의 김대철 감독 역시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이스.’
타석에 3번 타자 정병철이 올라왔다.
그는 최수원의 회귀로 인하여 가장 크게 미래가 바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본래 마린스에 2025 드래프트 전체 1라운드로 뽑혀가서 무려 2042시즌까지 17시즌이나 든든하게 마린스의 안방을 지킨다. 수원의 가장 강력한 MVP 경쟁자였고, 수원이 MLB로 떠난 이후에는 세 차례나 MVP를 차지했다. 아, 물론 이규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작 MVP정도로 마린스를 우승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당연히 수원이 회귀할 때까지도 우승 경험은 전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닉스나 마린스나 도긴개긴이기는 했다. 우승까지 답이 안 보이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정병철 개인으로 보자면 마린스 대신 피닉스에 온 것은 제법 큰 행운이었다.
메이저리그 최상위 레벨을 경험하고 돌아온 투수인 임광형은 매우 훌륭한 멘토였고, 팀에 채광민 역시 그의 타격 스킬에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수원이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2027시즌의 정병철은 미래가 매우 기대되는 유망주였다. 하지만 이 바뀐 역사 속에서의 정병철은 본래 그의 포텐셜이 만개했던 2029시즌에 상당히 근접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정병철은 지금 뭔가를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 역시 충만했으니, 그것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에이스인 임광형이 어떤 마음으로 오늘 경기에 임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 모든 요소가 뒤섞이고 뒤섞여 마침내 하나가 됐다.
투 아웃에 주자 1루.
마운드의 박재혁이 1루 주자가 있건 없건, 그가 달리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크게 와인드업했다. 이전의 KBO 분위기였다면 크게 경을 칠만한 일이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주자를 신경 쓰지 않고 타자에게 가장 좋은 공을 던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이제 KBO의 팬들도 대부분 공감했으며 지금이 바로 그런 타이밍이었다.
초구는 149.3km/h의 커터.
절대 실투가 아니었다.
보더라인에 절묘하게 걸치는 매우 훌륭한 공. 그가 오늘 던진 공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만큼 잘 들어간 공이었다.
-딱!!!
볼끝은 여전히 더러웠고 그렇기에 완벽하게 두들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깔끔한 스윙에 실린 힘은 아주 약간의 오차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높게 뜬 타구가 높이 날았다.
언제나처럼 이주혁은 달렸다.
뒤로, 더 뒤로.
그의 시선이 힐끔 타구를 살폈다.
‘이거 되려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 그가 타구를 기가 막히게 예측하고 수비를 했다던가. 일단 뛰고 보는 것이지. 그렇게 이주혁의 몸은 누구보다 빠르게 담장까지 도착했다. 거기다가 그 달리던 힘을 더하여 크게 점프도 뛰었다.
쉬운 수비를 워낙 자주 실패해서 사람 같지도 않다는 평을 듣지만, 그 평 덕분인지 가끔 진짜 사람 같지 않은 수비를 성공하는 이주혁이다. 마린스의 팬들이 이거 어쩌면 혹시 성공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너무 빨랐다.
그의 글러브가 허공을 휘저었고 그것보다 미묘하게 느린 박자로 타구가 지나갔다.
[너······, 넘어갔습니다!! 홈런!!! 정병철 홈런!! 정병철의 투런 홈런입니다!! 이제 점수는 다시 13:13!! 9회 초. 투아웃!! 정병철이 여기서 또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 놓습니다!!]
이주혁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애초에 잡는게 거의 불가능한 타구이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였다면 여기저기서 욕이 좀 들릴 타이밍인데 욕 대신 칭찬과 박수가 날아왔다. 수비에 실패하고 박수를 받다니 살면서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13:13
그 숫자 속에서 피닉스의 4번 타자 채광민이 타석에 올라왔다.
이미 분위기를 탔다. 이렇게 된 이상 경기를 가져갈 수밖에 없다.
채광민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그리고 깔끔한 내야 땅볼 아웃.
채광민이 아쉬운 마음으로 연장 10회를 기약했다.
공수교대.
타석에 조유진이 올라왔다.
온몸이 삐그덕 댄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9세.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그 몸으로 무려 89경기에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그 곁에 워낙 터무니 없는 괴물이 있었던 터라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무거운 장비를 벗어 던지고 타석에 선 조유진의 표정이 참으로 비장했다.
“야, 이거 내가 끝내기 홈런이라도 치면 완전 대박 아니냐?”
“끝내기?”
“어. 끝내기.”
“쪼유 네가?”
물론 조유진 본인도 반 장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한 최수원의 시큰둥한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아주 본때를!!
-부웅!!
“스트라잌!! 아웃!!”
보여줄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결과는 어느새 깔끔한 헛스윙 삼진. 그래도 동기를 위한 명예로운 죽음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조유진이 타석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바로 그 최수원의 타석이 돌아왔다.
73홈런.
솔직히 말해서 그의 타석이 돌아온다고 해서 그가 신기록을 경신할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아니. 확률만 따지자면 경신하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린스의 팬들은 시즌 마지막 경기 팀의 승리보다 최수원의 마지막 타석을 더 기도했다. 그들이 창단 이후 45년 동안 한 번도 정규시즌에 우승하지 못했던 팀을 아직까지 응원하는 멍청이들이라서일까? 아니면 1992년 마지막 우승 이후 35년 동안 우승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21세기에 한국시리즈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팀의 가을야구 예금에 꾸역꾸역 돈을 넣을 만큼 계산을 못 하는 바보라서일까?
아니, 아니었다.
그것은 2027년. 이제 고작 열아홉 살에 불과한 저 젊은 선수가 1년 내내 보여줬던 모습에 대한 존중이었고 그가 써내려 갈 저 위대한 기록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슈퍼스타는 절대 이런 순간에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마치 날아오는 공을 박살낼 것처럼.
강하게 내딛은 앞발로 인하여 뒷발이 살짝 들릴만큼 격렬하게.
최수원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아직 몸이 엉망진창이던 그 17살에 사용했던 그 타격에 매우 흡사한 형태로.
-딱!!
그리고 그렇게 날아간 타구는 경기장에 떨어지지 않았다.
[74!!]
저녁 12시에 가까운 늦은 시간.
집에서 편히 봐도 괜찮았을 경기를 굳이 이 불편한 자리에서 굳이 이 쌀쌀한 날씨를 참아가며 경기장 앞을 지켜줬던 팬들의 곁으로.
야구 역사를 새로 쓰는 홈런볼이 떨어졌다.
사직 구장의 역대 여섯 번째 장외 홈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