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34화 (234/305)

234화. 우승 이후(7)

부담감.

긴장.

그 종류는 조금 달랐지만, 오늘 경기를 뛰는 피닉스와 마린스의 선수들이 받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보통 그러한 종류의 감정들은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어 평소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게 만들기 마련이다.

훗날 오늘 경기를 이 꼬라지로 만들었던 선수 중 하나인 a씨는 그날의 경기를 이렇게 술회했다.

“물론 평소에도 제가 종종 실수를 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 날은 뭐랄까? 경기장 전체에 팽배했던 분위기라고 할까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았습니다.”

***

8회 말.

마린스의 공격은 3번 타자인 노형욱부터 시작됐다. 최수원까지 타석에 돌아가려면 9회 말까지 간다고 했을 때 적어도 두 명은 출루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노형욱은 책임감을 느꼈다. 최수원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마린스 최고의 타자는 노형욱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큰 부담감이 실패로 연결되는 것은 마린스 선수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그건 마린스만의 일이 아니었다. 많은 엘리트 선수들이, 심지어 리그에 큼지막한 족적을 남긴 선수들조차도 부담감으로 평소 이하의 기량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노형욱은 달랐다.

-딱!!

깔끔하게 밀어친 타구가 2루수의 키를 살짝 넘겼고 노형욱은 매우 무사하게 1루에 안착했다.

“야, 좀 살살해라. 지건 이기건 어차피 1위인데. 가을야구 같이 편하게 하면 좋잖아.”

“선배님 5년 전에는 막판에 고춧가루 뿌리시면서 팬들을 위해선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너무 섭섭해 하지 말라고 하셨었잖아요.”

“크흠······. 내가 그랬었나?”

“네.”

“아, 생각났다. 너 드래곤스였지. 근데 드래곤스는 어차피 포시도 자주 나가던 팀이었잖냐. 그리고 그땐 내가 좀 어려서 혈기가 넘쳐서 그랬던거지. 뭘 잘 몰랐었어.”

“선배님 그때도 서른일곱······.”

채광민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사이 타석에 4번 타자 이규만이 올라왔다.

칰꼴라시코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홈 경기.

최수원의 홈런 신기록.

피닉스의 3, 4위가 결정 나는 시합.

워낙에 많은 이름들이 있었던 덕분에 잠시 잊고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이규만 선수의 정규시즌 마지막 타석이겠네요.]

그것은 단순히 2027시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타석은 KBO에서만 23시즌을 달려온 이규만이라는 선수가 갖는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이다.

그는 이미 은퇴 투어라는 이름으로 다른 구단 경기장들을 돌며 여러 종류의 다양한 기념행사와 기념품들을 받았다.

하지만 이 순간 사직 구장을 찾은 팬들은 그에게 그 어느 구장에서도 받지 못했던 가장 성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시작은 응원 단장이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아주 오래된 이규만의 응원곡. 그리고 그 속에서 응원단장은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이규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것은 마치 전성기 시절 이규만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환호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다시 그라운드로 걸어 나와 팬들에게 꾸벅 인사했던 것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마린스라는 팀과 함께해준 이규만에게 보내는 응원팀 나름의 깜짝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아마 일본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MLB에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마린스보다 더 많은 돈을 주는 다른 팀에 FA로 갈 수 있었을 것이며,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우승할 수 있는 어느 팀에 비슷한 금액을 받고 가는 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린스에 남았다.

매년 우승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다고 말했고 내년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말했다. 병살타로 가장 많은 욕을 먹었고 느린 발 때문에 수비 범위가 좁다고 또 욕을 먹었다.

그렇게 23년이 흘렀다.

실로 긴 세월이다. 23년 전을 생각해보자면 그 때는 지금 누구나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탄생하기도 전이었으며 집 거실의 TV들은 지금의 얄쌍한 형태가 아닌 뒤가 뚱뚱하게 튀어나온 브라운관이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대졸 사원이 회사에 입사하고 승진하여 마침내 부장을 달고 그걸 넘어 임원까지 노려볼 만큼 긴 시간.

그래,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방망이를 휘둘러온 저 늙은 스타를 향하여 사직 구장에 모인 수많은 팬들은 기꺼이 그들의 응원단장을 따라 고개를 숙였고 또 기꺼이 모자를 벗었으며 또 누군가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배웅 속에서 이규만은 자신의 타격을 준비했다.

23년 동안 이어왔던 그 자세 그대로.

마운드에 선 투수는 서규탁.

올해 21살로 지금은 마린스에서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된 최규혁과 함께 2년전 전체 1, 2번을 다투던 좌완 강속구 투수였다. 그의 이번 시즌 최고 구속은 149km/h/. 고교 시절보다 2km/h정도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빠르다.

대기 타석에서 걸어 나올 당시의 이규만은 분명 23년 차. 올해 나이 만으로 42세의 늙은 타자였다. 덩치는 여전히 컸지만, 이전과 같은 탄력과 단단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올해에도 여전히 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저 채광민에 비하자면 턱없이 부족한 타자로 실력의 하락세를 보자면 은퇴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래, 분명 그럴 터였다.

낭만을 사랑하는 누군가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했다. 만 42세의 타자가 그 한순간 전성기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역대 최고의 타자로 돌아갔노라고.

또한, 합리성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투수가 분위기에 압도된 탓에 너무 복판에 대놓고 공을 집어넣는 실투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짜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어느 사나이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했다.

저것이야말로 스타성이라고.

무려 23년 커리어의 끝을 맺는 정규시즌, 본인의 마지막 타석.

그리고 그를 사랑해온 수많은 팬이 그에게 아낌없이 존중을 표해줬다. 얼마나 부담감이 느껴졌을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큰 긴장으로 다가왔을까.

-딱!!!

이규만의 방망이가 서규탁의 초구를 후려갈겼다.

간결하고 또 아름답게.

높게 뜬 타구가 빠르게 날아올랐다.

한팔이 먼저 방망이에서 떨어지는, 최수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팔로우 스로우. 이규만이 멋들어지게 방망이를 집어 던졌다.

타구는 여전히 쭉쭉 뻗어 나갔다.

그래, 마치 중력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2루를 향해 빠르게 달리던 노형욱이 걸음을 늦췄다. 굳이 빠르게 달릴 필요가 없었다. 2루와 3루. 그리고 마침내 홈에 도착한 노형욱은 경기장의 많은 팬들이 그러한 것처럼 손뼉을 마주쳤다.

이규만이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사직의 1루.

이제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던 2루.

한때는 이곳에서 글러브를 낀 적도 있었지만, 도저히 안타로는 도착할 수 없었던 3루.

그리고 홈.

수 많은 선수가 달려 나와 그를 축하했다.

칰꼴라시코의 8회 말.

13:11이라는 점수가 이야기하듯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박수갈채는 경기장을 넘어 경기장 밖에 아직 돌아가지 않고 앉아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쏟아졌다.

가장 완벽한 마지막 타석이었다.

“스읍······. 근데 잠깐만. 이러면 나가리 아닌가?”

“뭐가?”

“아니, 지금 우리 역전했잖아.”

“그게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2점 홈런이니까 당연히 역전이지.”

“아니 그러니까. 이제 경기 9회 초에 끝나는 거잖아.”

“아······.”

경기가 계속됐다.

아웃, 아웃, 그리고 볼넷.

8회 말, 투아웃에 주자 1루.

매우 무거운 부담감을 가득 안은 채 8번 타자 이주혁이 타석에 섰다.

점수는 13:11.

여기서 그가 아웃을 당한다면······. 그리고 9회 초에 피닉스가 추가점을 내주지 못한다면 최수원의 마지막 찬스는 저 멀리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하필 왜 내 차례에······.’

앞선 타석.

볼넷을 골라낸 이정훈이 괜히 얄미울 지경이다.

‘아니야. 이주혁!! 넌 할 수 있어.’

고개를 몇 차례 휘휘 젓고 타석에 집중했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날아왔다.

압도적인 집중력. 어떻게든 여기서 공격을 끝내지 않겠다는 간절한 마음.

이주혁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초구!! 쳤습니다!!! 우중간!! 높게 뜬 타구!! 이주혁!!]

아주 큼지막한 타구였다.

그러니까 정 위치에 있던 중견수가 뒤로 열 걸음 정도 더 물러나야 할만큼 큼지막한 타구였다.

“아, 이주혁 진짜!! 투수 지금 흔들리는데 저걸 냅다 초구를 두들긴다고?”

깔끔한 외야 플라이 아웃.

피닉스의 아홉 번째 공격 찬스가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요.”

“······.”

어려운 선택이었다.

여기서 최선을 다해서 이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피닉스에게 여지를 줘야 할 것인가. 아니, 규만이는 대체 왜 거기서 홈런을 쳐서······. 물론 수원이는 이미 대기록이라는 이름으로도 부족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타이기록과 신기록은 분명 그 무게감이 다르다.

“어쩌긴 뭘 어째. 재혁이 올려야지. 어제 쉬었잖아.”

“네.”

여기선 뭐를 선택해도 욕을 먹는다. 그렇다면 경기라도 가져오는 것이 맞다.

‘비난은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이 유명한 말을 남긴 어느 명감독이 지금 받는 평가를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 마운드에 박재혁. 박재혁이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평자책이 1.90으로 리그에서 두 번째로 훌륭한 평자책을 기록한 마무리죠.]

[김대철 감독이 이대로 경기를 끝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네요.]

경기장의 분위기는 묘했다.

마운드에 올라온 박재혁 역시 그것을 느꼈다.

시즌 마지막 경기의 마지막 이닝. 심지어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홈 경기다. 게다가 구단 역사상 최초로 정규 시즌 1위로 이번 시즌을 마감하는 상황이었다.

‘아······. 미치겠네.’

경기를 관람하는 팬들이 바라는 것은 명백했다.

실점.

심지어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들의 응원도 영 시원찮다. 그래, 쟤들도 사람인데 74호 홈런이 나오는 걸 보고 싶겠지. 당연한 일이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2점을 내주면 평자책이 얼마나 오르는 지를 계산하고 올라왔을 정도이니까.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갑자기 2.14는 좀 그렇잖아······.’

이번 시즌 총 66.1이닝을 빡세게 던지면서 간신히 만들어낸 1점대 평자책을 2점대로 올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올해를 끝으로 FA인 상황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구.

148.7km/h의 커터.

-딱!!!

타자가 초구를 공략했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공략하라는 말은 일종의 격언과도 같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깔끔한 내야 땅볼 아웃.

-아······.

누구라고 특정하기 힘들었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성이 경기장에 울렸다.

“괜찮다. 괜찮아. 이제 상위 타순에서 공격 시작이잖아.”

마린스 유니폼을 입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래, 피닉스의 상위 타순과 하위 타순 공격력은 천양지차다. 분명 상위 타순이라면······.

-딱!!!

내야 뜬공 아웃.

고작 두 개의 공으로 아웃 카운트 두 개.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타자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마!!! 니 정신 단디 못 차리나.”

“맞다!! 어? 무슨 타자라는 놈들이 죄다 초구만 보고 붕붕 휘둘러 쌌노.”

“아재요. 좀 참으소. 이제 오민엽이 올라온다 안카요.”

피닉스의 2번 타자 오민엽.

그가 데뷔 이래 가장 거대한 응원을 등에 업고 타석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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