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우승 이후(6)
임광형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피닉스의 행복 수비는 워낙에 유명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때에 비하면 올해 피닉스의 수비는 양반이었다. 적어도 올해 피닉스의 투수들은 팀의 수비가 두려워서 피해 가는 피칭을 하는 막장까진 아니었으니까.
[아, 4회 말 투 아웃. 평소 정말 철벽 같은 수비를 보여주는 유격수 오민엽의 에러!! 이거 피닉스 팬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운 순간입니다.]
[워낙에 빠른 타자라서 오민엽 선수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조금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보시면 글러브 안에서 공이 아직 돌고 있거든요. 타구에 스핀이 굉장히 많이 걸렸어요.]
‘그래도 오늘은 유독 좀 빡세네.’
오늘 공이 안 좋았는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제법 좋은 편에 속했다. 삼진을 많이 잡지는 못했지만 라인 드라이브라고 할만한 타구는 그리 많지 않았고 땅볼 유도도 제법 괜찮았다.
하지만 벌써 세 번째.
그래, 고작 4회인데 벌써 세 번째다.
[4회 말 투 아웃에 주자 1루. 점수는 5:3. 타석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경기 2타수 2안타 1홈런. 현재 시즌 71개의 홈런을 기록 중입니다.]
게다가 투구 수 역시 부담이다.
아직 4이닝도 다 던지지 않았음에도 무려 76개.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건데······.’
사실 피닉스의 수비가 행복 수비로 유명하다지만 꼴린스 역시 대환장의 수비로 만만치 않은 명성을 떨치는 팀이다. 그리고 그 만남의 결과가 고작 4회 말 투아웃 상황에 투수 교체 한 번 없었음에도 경기 시간은 무려 1시간 15분을 넘어가는 현 상황이었다.
타석에 들어온 최수원이 타격 자세를 갖췄다.
‘참 아쉽다. 내가 딱 5년만 젊었더라면.’
17년 전에 어느 선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인제 와서 이런 이야기는 많이 식상하겠지만 그의 그 이야기가 17년이 지나니 좀 이해가 됐다.
마치 재촉이라도 하는 것 같은 빠른 타격 준비. 최수원의 저 타격폼은 이제 상대하는 투수에게 강한 압박감을 안겨줬다. 마치 전성기의 임광형이라는 에이스가 그 이름만으로 다른 타자들에게 압박감을 전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앞에서 임광형은 최선을 다했다.
그래, 최선을 다했다. 임광형을 상대했던 그 많은 전설적인 타자들 역시 최선을 다했었던 것처럼.
볼카운트 2-2.
그리고 임광형의 결정구.
한때 메이저리그 피치 밸류 체인지업 부문에서 1위. 모든 공을 다 했을 때도 무려 6위에 올랐던 그 체인지업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갔다. 보더라인에 절묘하게 제구되어 들어가서 종국에는 존 밖으로 살짝 빠져나갈 예정의 공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딱!!!
조금 빠르게 마중 나온 최수원의 방망이가 임광형의 최선을 두들겼다.
“하, 새끼. 진짜 인정사정 안 봐주네.”
사직의 좌측 담장 한가운데.
최수원의 시즌 72호 홈런포가 떨어졌다.
***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시즌 초반에는 임광형의 투심과 체인지업을 모션만 보고 구분이 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물론 시즌 중반에 그런 미묘한 폼을 교정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광형은 나이를 먹어가며 전성기의 기량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천재성을 지닌 투수였고 그가 지닌 천재성 가운데는 절묘한 신체 밸런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즌 3위와 4위를 가르는 중요한 경기임에도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경기 내용. 그리고 고작 4회 말임에도 80개를 넘어가기 시작하는 투구 수. 게다가 내야에서 가장 믿을맨이던 오민엽의 실책이 겹쳐진 덕분이었을까?
아마 임광형은 최선을 다해서 더 좋은 체인지업을 던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던 것 같다. 공을 던지는 팔꿈치의 각도가 약간 내려갔다.
물론 내가 딱히 임광형의 팔꿈치를 신경 써서 보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느낀 건 약간의 위화감. 뭐,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위화감마저도 낚시였을 수 있겠다 싶긴 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이성보다는 본능적인 선택 쪽이 훨씬 빨랐다.
결과는 훌륭했다. 게다가 조유진이 출루해있던 덕분에 점수까지 5:5 동점.
[시즌 72번째 홈런!! 최수원 선수. 이렇게 또 임광형 선수를 상대로 멀티 홈런을 기록합니다.]
[이걸 참, 상성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피닉스는 투수 교체 없이 그대로 갑니다.]
피닉스의 덕아웃은 임광형을 믿었다. 뭐, 5실점 가운데 자책은 2점뿐이었으니 믿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딱!!!
2, 3루 간으로 강하게 날아가는 타구. 오민엽이 이전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 어려운 타구를 매우 깔끔하게 처리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한명훈은 자신의 일곱 번째 승리를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세 번째 타순은 역시 조금 달랐던 것일까? 아니면 좋은 수비 다음에는 좋은 공격이 나온다는 속설이 맞아떨어져서였을까.
-딱!!
오민엽이 2루수의 키를 살짝 넘기는 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정병철의 안타로 주자 1, 3루.
피닉스의 4번 타자 채광민이 타석에 섰다.
***
채광민은 자신이 야구 선수 가운데서는 그래도 상위 1할에 드는 교양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취미 : 독서.
초등학교 저학년 받아쓰기를 해도 백 점을 받을 것이라 확신하기 힘든 선수놈들이 가득한 이 바닥에서 독서라니 실로 흔치 않은 취미였다. 물론 그 독서의 대상이 교양서적 같은 것이 아닌 무협지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점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활자’라는 것을 읽는 교양인이라는 점이었으니까.
무협지에서 특히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부분은 무림의 고수라는 사람들은 현실과 달리 나이를 먹을수록 약해지기는커녕 더 강해지기만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종종 어쩌면 현실 쪽이 무협보다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1루에 선 정병철이 이규만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채광민의 시선이 참 복잡했다.
채광민이 선수 생활을 해온 긴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그를 이규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했다. 뭐, 그게 싫지는 않았다. 이규만은 KBO의 역사를 통틀어 역대 최고를 논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타자였으니까.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채광민 자신이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해에 ‘채광민 드디어 이규만 넘어서나.’ 같은 기사가 뜬다거나. 그 기사에 댓글로 커리어하이가 이규만의 커리어 중에서 여섯 번째로 좋았던 해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같은 내용이 베스트에 오른다던지 하는 그런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그런 것들.
그가 좋아하는 무협지 가운데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복수를 원하는 사람에게 주인공이 최고의 복수랍시고 권한 것이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일이었다고.
몸에 좋은 거 잘 먹고. 몸에 안 좋은 건 열심히 피하고 절대 무리 안 하고 그리고 꾸준하게 운동했다.
10년, 그리고 20년. 또 1년과 1년과 1년.
채광민은 여전히 이규만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니까 반수 정도 뒤처지지만 그래도 역대 최고의 타자인 이규만에게 비빌 수 있는 동시대의 2인자. 역대로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정도 왔다 갔다 할만한 그런 타자다.
그리고 올해 이규만이 은퇴하고 또 시간이 흐른다면?
야구는 참 재밌는 종목이다. 다른 종목과 달리 매일매일 경기를 하는 데일리 스포츠로 임팩트에 못지 않게 내구성 역시 중요하다. 그렇기에 누적을 다른 어떤 종목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400홈런을 20년 만에 쳤느냐 25년만에 쳤느냐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20년 만에 400홈런을 친 타자보다 25년 만에 420홈런을 친 타자를 더 위대하게 보기도 한다.
그게 야구다. 조금 느리게 걷더라도 더 멀리 나간 이를 위대하다고 말한다.
5회 초.
노아웃에 주자 1, 3루.
이규만보다 좀 덜 위대했던 채광민이 느리지만 착실하게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딱!!!
시즌 20호 홈런.
채광민이 커리어 10번째 20홈런+ 시즌을 달성하는 순간이자 한명훈의 시즌 일곱 번째 승리가 저 멀리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마린스, 투수 교체합니다. 곽재영. 곽재영이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꽤 오랜 시간을 2군에서 보냈던 곽재영 선수. 9월 확장 엔트리로 1군에 올라온 이후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선발만 2경기를 소화했고 롱릴리프로도 세 경기 출장해서 9.1이닝을 소화했습니다. 3.64의 평자책. 시즌 막판 삐그덕 거릴 수 있는 팀에 정말 완벽한 조각이었어요.]
당연히 투수가 교체된 것은 마린스만이 아니었다.
한명훈과 달리 임광형은 두들겨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투구 수가 5회에 이미 100개를 넘었다. 피닉스의 감독은 과감하게 필승조를 가동시켰다. 오늘 경기를 꼭 잡아서 사흘의 휴식을 하고 준플레이오프로 가을 야구를 시작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8:5
물론 양 팀의 삐거덕거리던 수비는 투수를 교체했다고 극적으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투수는 많이 던졌고 타자는 많은 기회를 얻었다. 그만큼 점수는 쭉쭉 올라갔다. 하지만 피닉스는 아슬아슬하게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승부의 추를 원점에 돌린 것은 7회 말 투 아웃 상황에서 터져 나온 최수원의 2점 홈런포였다.
앞선 4번째 타석에서는 외야 플라이 아웃.
그리고 마침내 5번째 타석에서 바뀐 좌완을 상대로 투런포.
73.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현대 야구에 다시는 불가능하리라고 여기던 숫자를 다시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차분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광란’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지금 그라운드를 도는 저 남자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최수원이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래, 마치 ‘다음’이 있다는 듯한 얼굴로.
그리고 잠시 환호하던 관중들 역시 빠르게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잠깐만. 이거 킹우의 수 좀 따져보자.”
“와, 내가 진짜 여기까지 와서 킹우의 수를 따지게 될 줄은 몰랐네. 그것도 타자 다음 타석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를 가지고.”
“야, 헷갈리니까 좀 조용히 해봐.”
“헷갈릴 게 뭐가 있어. 그러니까 지금 7회 말에 투 아웃. 남은 아웃 카운트가 일곱 개니까. 마린스 지금 타석 분위기 보면 이거 무조건 한 번은 돌아오겠지.”
“아니지. 멍청아. 이거 홈 경기잖아. 그러니까 9회 말이 없을 수도 있지.”
“아······.”
방금 2점 홈런포로 이제 점수는 11:11
그야말로 칰꼴라시코에 어울리는 막장의 점수였지만 계산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진지했다.
“그러니까 추가점 없이 출루를 두 번 이상을 한 상태로 9회 말에 가거나 8회 말까지 타자들이 5출루 이상을 하면 되는 거네.”
실로 기묘한 조건.
사직 구장을 가득 메운 마린스의 팬들. 아니 지금 이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KBO의 팬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형태의 응원을 시작했다.
“마!! 장타는 치지 말고!! 역전도 하지 말고!! 최대한 살아만 나가 바라.”
“피닉스. 마!! 니들 지금 머하노. 으이? 방망이 단디 못 휘두르나.”
칰꼴라시코의 명성에 어울리는 환장의 대잔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