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우승 이후(5)
감독은 임광형에게 선택권을 줬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은 쉽다.
얼핏 합리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다.
임광형은 에이스였기 때문이다.
그래, 에이스다. 그것도 매우 고리타분한 고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에이스. 그러니까 임광형은 단순히 팀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를 넘어서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함의를 잔뜩 품고 있는 바로 그 에이스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 144번째 경기.
이번 시즌 그의 평자책을 무려 0.42점이나 올려준 타자를 또 이렇게 마주했다.
“또 보네요.”
“그래.”
정병철은 딱히 뭐라 답하지 않았다. 본래 말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 경기의 중요성. 그리고 이 경기에 임하는 임광형의 태도가 그를 조금 딱딱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최수원이 굳이 말을 더 이어가지 않은 채 타석에서 자신의 루틴을 수행했다.
묵직했다.
정병철은 임광형의 마음을 알았다. 그가 걸어온 길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임광형이 짊어진 것들이 얼마나 무거운 지. 그리고 그것을 흔쾌히 메고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이해했다.
그렇다면 지금 타석에 선 이 어린 타자에게서 느껴지는 무게감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 무게감은 단순히 그가 타고난 그 어마어마한 재능에서 기인한 것일까?
초구.
빠른 공.
몸쪽 깊숙한 코스였다.
-뻐엉!!
어떤 콜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절묘한 공.
투수와 타자 그리고 포수까지 모두가 심판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늘 경기가 얼마나 편하게 갈 수 있을지는 결국 이 판정으로 결정이 날 테니까.
그리고 심판은 주먹을 움켜쥐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젠장.’
정병철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충분히 스트라이크를 줄 만한 공이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본다면 스트라이크 쪽에 훨씬 가깝다. 하지만 심판 역시 사람이다. 여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직전 경기에서 70개.
심지어 그것도 멀티 홈런으로 70개다. 게다가 오늘 상대하는 임광형은 최수원과의 경기에서 무려 3피홈런, 4피홈런을 허용했다.
73개.
그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숫자에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심판이 조금이라도 자기 보신을 생각한다면 판정은 타자에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심판에 따라서 그런 거 없고 강직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역으로 가는 일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늘 구심인 박영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임광형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두 번째.
또다시 몸 쪽.
이번에는 살짝 낮은 코스. 반의 반개 차이로 안쪽으로 파고드는 공. 그야말로 절묘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제구력이었다.
-따악!!!
[최수원!! 쳤습니다!!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는 큼지막한 파울볼!!]
최수원이 잠시 타석에서 한 걸음 물러나 헬멧을 고쳐 썼다.
확실히 대단한 투수다.
포심이 아니었다. 몸쪽 코스에서 더 안쪽으로 슬쩍 들어오는 커터였다. 그야말로 감탄이 나오는 공이다. 포심 직후에 커터를 던졌는데 이걸 이렇게 완벽하게 조절하다니. 만약 조금만 빠졌더라도 그대로 몸에 맞는 공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커맨드에 대한 완벽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부응하는 대단한 실력의 집합이었다.
볼카운트 1-1
임광형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바깥 코스 투심.
살짝 멀리 빠져나갔다.
2-1.
곧바로 이어지는 네 번째 바깥쪽 낮은 코스.
최수원은 그것이 조금 더 떨어지는 체인지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깥쪽 낮은 코스 투심은 이미 그가 두 번이나 홈런을 때린 코스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범한 투수라고 해도 두 번이나 홈런을 맞은 공을 두 개 연속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이번에는 존 안으로 집어 넣어가면서까지?
-뻐엉!!
“스트라잌!!”
하지만 투심이었다.
144.7km/h
임광형은 최수원 역시 지쳤음을 확신했다.
최근 홈런의 숫자는 여전했지만 비거리는 확실하게 줄었다. 그의 홈런 개수가 여전한 것은 고의사구가 줄어들고 조금 더 적극적인 타격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최근 홈런만큼이나 늘어난 외야플라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이렇게 아리까리한 공에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기는 어려울 터.
볼카운트 2-2.
이제 스트라이크 하나면 삼진이다.
-꿀꺽.
정병철이 마른 침을 삼켰다.
경기 시작 전 임광형이 그에게 ‘비장의 무기’를 이야기 했을 때 정병철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솔직히 그 말을 하는 이가 임광형이니까 바로 납득을 한 것이지 보통 투수가 그런 말을 했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 한 번 더 권했을 것이다.
하이 패스트볼.
그래, 플라이볼 혁명이니 뭐니 하면서 발사각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후, 오히려 홈런 타자들이 높은 코스 빠른 공을 어려워한 지는 제법 됐다.
하지만 저 유행이란 원래 돌고 도는 법인지라 높은 코스 빠른 공을 어려워했던 트랜드도 이제 슬슬 저물어서 메이저리그에서는 다시 높은 코스 빠른 공을 좀 꺼려하는 분위기다. 물론 KBO의 경우 유행이 조금 느린 만큼 여전히 유효한 공이긴 했지만, 최수원의 경우는 예외인 게 이번 시즌 그런 높은 코스 빠른 공도 담장 밖으로 뻥뻥 날려 보낸 게 이미 여러 차례다.
그러니까 정병철이 지금 믿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나 이론적 타당성이 아닌 임광형이라는 투수 그 자체일 것이다.
다섯 번째.
임광형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그리고 그렇게 뒤로 넘어갔던 무게 중심이 빠르게 앞으로 넘어 왔다. 평소보다 미묘하게 빠른 중심 이동. 그리고 그 미묘한 타이밍의 증가에 맞춰 그의 손끝에서 아주 약간 빠른 타이밍으로 공이 뻗어 나왔다.
임광형이 자랑하는 컴퓨터 같은 커맨드가 조금 흔들렸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완벽한 커맨드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희생된 커맨드를 대신하여 공에 속도가 붙었다. 심지어 반의 반의 반박자 정도 빠른 피칭 타이밍 덕분에 표기되는 숫자보다도 공의 날아오는 타이밍은 더 빨랐다.
148.7km/h
살짝 높은 코스. 벼락같은 하이패스트볼.
그것은 투 스트라이크에서 삼진을 잡으러 들어오는 에이스 임광형의 준비된 결정구였다.
최수원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기습적인 하이패스트볼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곤두선 그의 감각은 그 기습적인 속구에 충분히 반응할 만큼 예리했다.
타구의 로케이션이 높았다.
그만큼 스윙의 궤적 역시 높았다. 몸의 밸런스가 흐트러졌지만 놀라운 균형감각과 뇌리에 새겨진 타격폼이 그것을 꾸역꾸역 바로 잡았다.
꽉 조여진 오른쪽 겨드랑이가 방망이를 끌고 나갔다. 체중에 비해 확실히 두툼한 코어가 몸통의 회전을 도왔다.
-딱!!!
높게 떠오른 타구.
최수원의 시선이 잠시 그 타구를 확인했다. 그가 팔로 스윙 이후에도 양손으로 꼭 쥐고 있던 배트를 툭 떨어트렸다.
[쳤습니다!! 빠른 타구!! 좌중간!! 좌중간!!]
임광형의 손가락이 타구를 가리켰다.
피닉스의 중견수가 타구를 쫓았다. 아슬아슬한 타구였다. 사직 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오늘 또다시 임광형이 최수원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나무가 되기를 기도했다.
아슬아슬하다고 하기에도 살짝 부족한 높이.
담장 최상단에서 1미터 정도 낮은 곳을 최수원의 타구가 두들겼다.
[아, 살짝 부족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피닉스 역시 딱히 야수들의 수비가 훌륭한 팀이 아니라는 점 정도였다. 특히 외야는 마린스보다도 심각하다는 평가를 듣는 만큼 오늘도 그 평가에 걸맞은 수비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외야 깊숙하게 물러난 위치에서 수비를 시작한 주제에 타구를 낚아채기는커녕, 담장 맞고 튕겨 나온 타구의 처리도 매우 어설펐다.
결과는 노아웃에 주자 3루.
마운드 위의 임광형은 그 어설픈 수비에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다음 타자를 준비했다.
최수원은 자신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자, 1회 말. 2:0. 노아웃에 주자 3루. 안타, 혹은 희생 플라이 하나면 일단 1점을 만회할 수 있는 상황. 타석에 강라온, 강라온이 올라옵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제법 치열한 수 싸움.
높게 퍼 올리려는 강라온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은 덕분일까? 적절하게 빠져나가는 체인지업이 그에게 삼진을 뽑아냈다.
노아웃에 주자 3루 상황에서 삼진. 그리고 내야 뜬공. 그리고 외야 플라이.
임광형은 분명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
“아 ㅅ······. 빡치네. 욕 좀 끊고 싶은데. 이것들 때문에 내가 욕을 끊을 수가 없네? 아니, 이 새끼들은 이런 경기까지 굳이 칰꼴라시코를 만들어야 하는 거야?”
“아니, 저 정도면 진짜 외야에 그냥 허수아비를 세워두는 게 낫겠다. 아니, 타격도 안되는 애가 수비까지 안 되는데 대체 왜 프로 1군임?”
그랬다.
점수를 내준 것은 피닉스의 어설픈 수비였다.
[아, 빠졌습니다!! 3루 주자 홈으로!! 타자는 1루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1회 말 투아웃. 마린스가 1점을 따라 잡습니다.]
2:1.
마운드에 선 임광형의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다들 최근에 휴식을 좀 하다 와서 그런걸까?
아니면 이미 우승이 결정이 나서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개뿔, 그냥 원래 그런 거지.’
3루의 노형욱이 뻘쭘한 표정으로 어깨를 풀었다.
저 인간 방금 땅볼 잡고 1루로 침착하게 송구해도 될 것을 급하게 던지다가 송구가 위로 뜨는 바람에 땅볼 아웃으로 끝날 것을 2루까지 보내줬다.
실책을 저지른 건 노형욱만이 아니었다. 강라온도 그렇고 사울 로페즈도 그렇고. 오늘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2회 초 피닉스의 공격이 끝난 상황에서 점수는 4:1. 이번 이닝 한명훈은 안타를 두 개 내줬는데 추가점을 2점을 헌납했다. 당연히 그 2안타 중에 홈런은 없었다. 그랬다. 오늘 경기는 그야말로 클래식한 칰꼴라시코 그 자체였다.
나름대로 나랑 임광형은 매우 진지하고 비장한 분위기인데 마린스도 그렇고 피닉스도 그렇고 영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 자꾸 게임을 예능으로 둔갑시킨다. 더욱이 오늘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은 이번 정규 시즌 제법 괜찮았던 마린스와 피닉스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러 온 팬들이었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2회 말.
투 아웃에 주자 2루.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임광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일까? 나는 그 무표정에서 임광형의 생각을 조금이지만 유추할 수 있었다.
‘아, 어지간하면 얘는 좀 덜 상대하고 싶었는데 1회에 상대하고 2회에 또 상대한다고? 이거 실화냐?’
뭐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어이구 자주 뵙습니다. 이왕이면 뭔가 좀 더 나이스하게 자주 보고 싶긴 했는데······. 아무튼 그래도 이렇게 자주 보니까 좋네요.”
“······.”
이번에도 정병철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뭐 그 역시 이 칰꼴라시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래, 뭐 정규시즌의 마지막이 이 모양이라니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칰꼴라시코가 나에게 꼭 나쁘게 작용했느냐 묻는다면 글쎄······.
2회 말 투 아웃에 주자 2루.
아웃 카운트 다섯 개를 잡아내는 동안 지금까지 임광형이 던진 투구 수는 무려 39개.
초구.
임광형의 40번째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그래, 무려 40번째다.
내가 오늘 직접 상대한 공은 다섯 개.
그리고 대기 타석에서 지켜본 공은 여섯 개.
덕아웃에서 뚫어져라 바라본 공은 스물아홉 개.
그리고 또 거기에 3개의 공을 더 했다.
-딱!!!
그래, 오늘 경기 임광형의 준비는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전 피닉스의 수비는 그의 준비에 부응할 만큼 훌륭하지 못했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시즌 71호 홈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