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우승 이후(4)
이번 시즌 피닉스는 분명 운이 좋았다.
정병철은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제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된 스무 살짜리 신인 포수가 1군에서 22홈런에 2할 7푼의 타율을 보여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피닉스의 암흑기를 책임졌던 가장 위대한 투수가 메이저에서 더 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런 말 하기는 부끄럽지만, 한국 최고의 유격수인 오민엽 자신까지 있었다.
그래, 2019년 이후 8년간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던 피닉스가 이번 시즌 브레이브스와 3위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오민엽이 타석에서 자신의 루틴을 수행했다.
그리고 마운드의 한명훈이 그를 바라봤다. 오민엽과 딱 1살 차이 나는 한명훈이기에 학창 시절에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는 분명 무서운 타자다.
잠시 시선을 돌렸다.
2루에 선 주자가 위협적이다. 작은 안타 하나에 1점을 내줄 수 있다. 2루 주자 뒤로 펼쳐진 넓은 외야. 저기에 공이 떨어질 것을 상상하니 외야가 쓸데없이 넓게 느껴진다.
‘빽빽하네.’
그야말로 사람들로 가득 찬 관중석.
“와, 칰꼴라시코가 이렇게 장대하게 펼쳐지다니. 내 가슴이 다 웅장해진다.”
“여보, 내가 말했지. 그 칰꼴라시코라는 말 쓰지 말라고. 솔직히 아무리 요즘 성적 좀 비슷하다고 해도 그래도 칰이랑 꼴이랑 같은 선에서 두면 안 되지. 칰은 기껏해야 V1인데 마린스는 V2잖아. 심지어 이번 시즌까지 하면 V3이고.”
“에이, 그래도 피닉스는 그래도 정규시즌 두 번이나 우승했고. 게다가 한국시리즈도 훨씬 최근에 우승했잖아?”
“1992년이나 1999년이나 20세기인 건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게 최근 성적으로 따지면 21세기에 포시 더 많이 나간 건 마린스잖아.”
“야, 다섯 번이나, 일곱 번이나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리고 피닉스는 그 다섯 번 중에 아까운 준우승도 한 번 있거든?”
내야의 어딘가에는 피닉스와 마린스의 옷을 입은 남녀가 다투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시야가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그를 둘러 싼 야수들이었다.
솔직히 막 엄청 든든하고 그렇지는 않았다.
마린스는 내야진이고 외야진이고 수비에서 막 든든함을 느끼게 하는 선수들은 아니었으니까. 당장 이번 시즌 실점과 자책점의 괴리가 가장 큰 팀이 바로 마린스다.
하지만 한명훈은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점수를 내주더라도 볼넷만 아니라면 언제나 변명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명훈은 그것을 겉으로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너무 비루했기 때문이다. 그저 인터넷에 올라오는 한명훈 자신의 패배 기사에 누군가가 마린스의 형편없는 수비를 지적하는 댓글을 쓰면 아무도 모르게 거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할 뿐이다.
한명훈이 던진 공이 존을 벗어났다.
또 벗어났다.
그리고 또 벗어났다.
조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운드로 올라왔다.
“선배, 릴렉스. 릴렉스. 아까 연습 때는 슬라이더 굉장히 잘 들어갔잖아요. 최악의 경우 1, 2루 채우고 병살 노려도 되니까. 마음 편하게 일단 하나씩 잡아보시죠.”
조금 더 공격적으로.
최악의 경우 두들겨 맞아도 상관없다는 느낌으로 조금 더 과감하게.
정석적인 답변이었다.
아마 해설자에게 지금 상황에서 정답을 묻는다고 해도 백이면 구십구는 이런 답안을 내놓을 것이다.
물론 그 과감함이 너무 지나쳐서는 안된다. 그게 되는 투수도 있지만 한명훈은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공이 전체적으로 너무 낮게 깔리고 있었으니 그보다는 아주 조금 높게.
-딱!!!
문제는 타석의 오민엽 역시 한명훈이 그런 정석적인 정답을 내놓을 것이라 반쯤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살짝 존을 벗어날 만큼 높게 들어오는 포심을 그가 아주 제대로 잡아당겼다.
담장 하단을 직격하는 큼지막한 타구.
[아!! 담장 맞춘 타구가 튕겨 나오질 않습니다!! 그 사이 2루 주자 홈까지!! 오민엽!! 1루 지나 2루로!! 2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3루!! 3루에서!!]
“세이프!!”
영 좋지 않은 시작이었다.
이어지는 정병철. 저 녀석도 괴물이었다. 솔직히 최수원이 워낙에 압도적인 괴물이라서 좀 많이 가려졌지만, 예년이었다면 무조건 신인왕이고, 저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그게 MVP다.
-딱!!
하지만 야구라는 게 괴물이라고 항상 좋은 결과를 낼 수는 없다. 그게 되는 건 저기 덕아웃에서 자기 타석 기다리고 있는 최수원 정도뿐이다. 아니, 저 최수원조차도 그래도 두 번에 한 번은 아웃이다. 정병철의 타구가 외야 깊숙한 곳에서 이정훈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희생 플라이.
점수는 이제 2:0.
그리고 타석에 피닉스의 4번 타자 채광민이 올라왔다.
42세.
팀의 주장인 이규만과 같은 나이.
KBO 역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너끈히 들어갈 만한 대타자다. 심지어 저 나이에도 이번 시즌 wRC+기준으로 전체 17위를 기록 중이다. 정말 저대로 한 3년만 더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규만의 누적을 넘어설지도 모른다.
한명훈과 눈을 마주친 그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너무나도 위협적이다. 현재의 실력만 보자면 정병철 쪽이 우위일 수 있겠지만 압박감은 이쪽이 훨씬 대단하다.
초구.
슬라이더가 바닥을 찍었다.
[아, 한명훈 선수. 오늘 제구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본래 제구가 상당히 좋은 선수거든요. 아무래도 시즌 마지막 경기에다가 만원 관중. 게다가 본인의 7승이 달려 있어서 좀 긴장한 것 같은데 그러지말고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나갔으면 좋겠네요.]
[다행이라면 조유진 선수가 정말 훌륭하게 바운드되는 공들을 받아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렇게 뒤로 공을 흘리지 않는 포수는 투수 입장에서는 참 든든하죠. 마린스에 떨어지는 공을 구사하는 투수들이 이번 시즌 성적이 상당히 괜찮은 데는 조유진 선수의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했다고 봅니다.]
두 번째.
이번에도 너무 낮게 제구된 슬라이더를 조유진이 간신히 몸으로 받아냈다.
볼카운트 2-0.
[아, 오늘 한명훈 선수의 변화구가 전체적으로 너무 많이 빠지고 있습니다. 저렇게 되면 타자의 방망이를 전혀 끌어낼 수 없거든요.]
한명훈이 크게 호흡했다.
이럴 때 최수원이나 최민혁, 백하민과 같은 투수들은 자신의 공을 믿고 그냥 강하게 공을 던진다. 그래, 그들에게는 그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한명훈과 같은 이들에게는?
세 번째.
슬라이더.
-부웅!!!
[보더라인에 살짝 걸친 아주 좋은 변화구!! 그렇죠. 한명훈 선수!! 저런 공이 나와줘야 합니다.]
볼카운트 1-2.
안타 두 개에 외야 플라이 하나를 얻어 맞고 볼까지 연속으로 두 개를 내준 이후에야 드디어 원하던 공이 들어갔다.
한명훈이 방금의 감각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겼다.
그리고 네 번째.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143.7km/h
25년쯤 전만 하더라도 평속 140을 강속구 투수의 기준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속혁명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전파된 지금.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국 역시 강속구 소리 들으려면 그래도 150은 찍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명훈의 속구는 매우 평범. 혹은 평범 미만이었다.
-딱!!
하지만 바깥쪽으로 절묘하게 빠진 슬라이더 다음에 들어온 몸쪽 속구다. 코스가 매우 좋았다.
높게 뜬 타구.
일루수인 이규만이 움직였다.
내야 관중석에 가까운 파울 지역.
이규만의 미트가 그 공을 잡아냈다.
“나이스 수비!!”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호수비라고 할만한 수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루수가 이규만이라면 이것은 호수비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이어지는 5번 타자를 상대로 땅볼 아웃.
전광판에는 1회 초 2:0. 그리고 2안타라는 숫자가 쓰여졌다. 평범한 투수가 만들어낸 평범한 기록이었다.
한명훈이 투수용 점퍼를 걸친 채 덕아웃에 앉았다.
다가올 포스트 시즌. 그러니까 한국 시리즈.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에게 선발 찬스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오늘 경기는 마린스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인 동시에 2027년 그의 마지막 선발 등판인 셈이다.
‘그러니까 잘 좀 부탁한다. 최수원.’
시즌이 시작될 적에 마운드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즌의 마지막 경기에 투수용 점퍼를 걸치고 앉아서 녀석이 방망이를 쥐고 올라가는 것을 보니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었다. 설사 그 상대가 저 임광형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마운드에 선 임광형이 모자를 고쳐썼다.
***
무엇이 야구를 위대하게 만드는가. 그저 단순히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이런 행동의 어디에 위대함이 있는가.
만약 나에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난 그것을 말로 답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야구의 어딘가에는 분명 ‘위대하다.’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지금 마운드에 서는 저 투수는 그 위대함이라는 표현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단순히 그가 메이저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한국인 투수이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좋은 성적은 위대해지기 위한 요소 중 하나였지만 단순히 좋은 성적이 위대함을 담보할 수 있다면 배리 본즈는 역대 그 누구보다 위대한 타자여야 했으리라.
분명 임광형은 메이저에 족적을 남긴 투수였지만 메이저 140년 역사를 둘러봤을 때 그보다 좋은 커리어를 남긴 투수는 수백 명을 훌쩍 넘어간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앞선 그 수백 명의 투수 가운데 감히 임광형보다 위대하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투수는 몇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피닉스를 떠나던 시절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언젠가 꼭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아직 제대로 던질 힘이 남아 있을 때. 그땐 꼭 피닉스 유니폼을 입고 여러분께 우승 트로피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제가 없다고 해도 피닉스는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누가 봐도 마지막 한 문장은 립서비스였고 피닉스는 당연히 우승 따윈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당시 대부분의 KBO 팬들은 저 문장 전체를 립서비스라고 생각했었다.
무슨 자기가 구로다 히로키도 아니고 던질 힘이 남아 있는데 피닉스를 돌아오겠다고? 뭐, 은퇴 직전에 1년이라도 한국에 돌아와 팬서비스라도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하지만 임광형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메이저의 다년 계약을 거절했고, 심지어 그 나이에 어깨 수술까지 받아 가며 재활을 해서 돌아왔다.
그가 남긴 스토리에는 울림이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임광형에게 ‘위대하다.’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투수면 투수지 위대함이 존재한다니. 대체 표현이 왜 이렇게 애매하냐고?
이게 사실 좀 애매해서 그렇다.
저렇게 돌아와서 약속처럼 우승까지 해낸다면? 그래 그건 위대한 투수다. 솔직히 메이저에서 컴백해서 피닉스 이끌고 우승까지 해내면 그건 위대한 투수 맞다. 이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근데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피닉스는 마지막까지 우승하지 못했다. 36세의 임광형과 37세의 임광형은 리그 최고에 가까운 투수였다. 38세와 39세가 돼서도 손에 꼽힐만큼 강력한 토종 투수였다. 40이 넘어서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단단했고 심지어 내가 메이저로 진출하기 직전 해였던 42세까지도 준수한 선발이었다. 그래, 딱 거기까지였다.
위대함까지 한 걸음 정도 남긴 위치.
그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위대한 투수가 되지 못했으며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두 번째 삶은 과연 어떠할까?
마운드의 임광형이 크게 와인드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