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30화 (230/305)

230화. 우승 이후(3)

지적받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스윙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굳이 수정하지 않았다. 수정할 이유가 없었다. 팀에 더 이상의 승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팀 역시 그런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주력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고 신인들을 기용하며 1군 경험을 쌓게 했다. 그리고 나의 타순을 1번까지 끌어 올렸다.

목표는 뻔했다.

그래, 홈런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나에게 대놓고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구체적으로 숫자까지 이야기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아니, 더욱 드문 정도가 아니다. 솔직히 지금 나에게 73홈런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미친놈은 알렉산더 맥도웰 정도 뿐이다. 이건 거의 퍼펙트 게임 의식하는 투수에게 ‘너 이번 아니면 언제 또 퍼펙트 할 기회 올지 모른다? 꼭 해야지. 어? 내가 기운 팍팍 줄게.’라고 말하는 수준의 미친 소리였다.

그런데 이게 원래 좀 미친 놈이 하는 미친 소리라 그런지 그게 제법 응원이 됐다.

아무튼 난 대놓고 홈런을 노리는 스윙을 했다.

근데 이게 잠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시즌 막판에 나도 모르는 피로가 좀 잔뜩 쌓인 탓인지 영 담장을 넘어가지 않았다.

“뭐 좀 말해 주셔야 하는 타이밍 아닙니까?”

“흥, 그런 걸 원했으면 타격 인스트럭터를 데리고 왔어야지. 난 피칭 전문가다.”

윌리엄이 당당하게 자긴 아무 말도 해줄 게 없음을 자랑했다.

“아니, 피칭도 딱히······.”

“그야 스완 넌 단기간에 건드릴 게 없으니까. 게다가 심지어 다음 등판도 3주 후잖아.”

“근데 그런 거치고 마찬가지로 3주 후에 다음 등판인 하민 형한테는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닙니까?”

“출장비도 따로 안 주면서 업무 외 시간 활용까지 뭐라고 하면 곤란하지. 게다가 하민은 너랑 다르게 당장 이것저것 건드릴 거 투성이야. 너랑 다르게 몸의 밸런스가 꽤 많이 변했고 그 과정에서 좀 쓸데없는 버릇도 여기저기 붙었어. 다행히 기본은 지키고 있고, 그 밸런스 변화도 긍정적인 쪽이라지만 더 효율적인 변화도 비교적 단기간에 가능하겠지. 게다가 어차피 너희 우승 하려면 하민의 활약도 필요한 거 아닌가?”

옆에서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잭을 바라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하하, 스완. 좀 밉살스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저 인간 저거 피칭 매커니즘 말고는 뭐 아는 것도 없이 무능한 인간이라서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더 도움이 될만한 것도 없을 겁니다. 지금 피칭을 손볼 건 아니잖아요?”

사실 나도 딱히 윌리엄에게 뭔가를 바라고 이야기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건낸 푸념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내 푸념에 잭은 상당히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 진지함이 내가 원하던 방향과 너무 벗어나긴 했지만······.

“일단 피지컬적인 부분으로는 근육의 피로도가 조금 높아져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이 이상을 원하신다면······.”

잠시 머뭇거리는 잭에게 내가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 이상은 괜찮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런 건 잃어버릴 거 없는 막장들이나 한 번 도약해보겠다고 덤벼드는 거지. 너 같은 선수가 괜히 건드릴 부분이 아니야.”

열아홉 살의 몸.

뭐, 거의 천연 스테로이드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관리를 받았고, 일정 역시 MLB에 비하면 굉장히 널널한 것도 감안은 해야 하지만 어쨌거나 투타를 겸한 것 치고 시즌 막판의 몸 상태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양호했다.

“불과 얼마 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때 네가 정답을 말했었잖냐.”

그랬다.

타자가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최고의 타자들이 모인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조차 홈런 치라고 던져주는 공을 담장 밖으로 못 넘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마음이 급한 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잊지 말라고. 스완 넌 지금까지 142경기. 아니 심지어 타자로 출장한 경기는 110경기 남짓이잖아. 거기에서 68홈런이라니. 그거 정말 터무니없는 자야. 설사 홈런을 더 추가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거야.”

어른다운 매우 좋은 위로였다.

물론 나는 잭의 이 어른다운 매우 좋은 위로보다 알렉스가 해줬던 그 터무니 없는 격려 쪽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이 위로가 나에게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만약 내가 68개에서 홈런을 더 추가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을 찾아 냈다는 점이었다.

알렉산더 맥도웰이냐고?

아니, 아마 그 녀석은 낄낄거리며 아쉽게 됐으니 내년에 메이저 리그에서 다시 도전해보라고 할 녀석이지 나에게 굳이 뭐라고 할 녀석은 아니다.

최수원.

그래, 바로 나 자신.

만약 내가 여기서 신기록을 세우지 못 한다면 아마 나 스스로가 나를 용납하기 힘들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래, 나도 주변에 너무 터프하게 자신을 몰아치고 그것에 괴로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기적의 순간을 경험했다.

해내야 한다.

그리고 해낼 수 있다.

-딱!!!

그리하여 엘리츠와의 경기.

첫 번째 타석.

69호 홈런.

어제 지독하게 넘어가지 않던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홈런을 시작으로 나는 5타수 2안타 2홈런을 기록하며 70홈런의 고지를 밟았다.

역대 2위.

그래, 역대 2위다. 이 시대로 돌아오기 전. 물론 리그도 다르고 기준도 달랐지만 내가 진짜 죽어라 경험했던 바로 그 역대 2위의 기록이었다.

남은 경기는 이제 딱 한 경기.

구단 버스가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

“광형아, 이건 네 선택에 맡기마.”

“아니, 감독님. 이 타이밍에 선택은 무슨 선택입니까. 저도 이제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감독님도 솔직히 MZ도 아닌데. 여기선 좀 더 올드 스쿨하게 하셔야죠. 원래 나이 먹으면 그쪽이 더 멋진 겁니다.”

“그러냐?”

“그렇죠.”

“그러면 좀 부탁한다. 어쩌겠냐. 여기까지 왔는데.”

“어······. 근데 그 대사 사용하시기에는 좀 많이 덜 온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요. 뭐, 어쩌겠습니까? 한 번 해보시죠.”

사실 피하기도 조금 그랬다.

피닉스는 이번 시즌 우천 취소 경기가 별로 없었던 탓에 시즌 막판 휴식일이 조금 많았다. 물론 로테이션상으로는 4선발인 최으뜸이 나갈 차례였지만 이미 임광형은 닷새의 휴식을 취한 이후였다.

게다가 이번 시즌 피닉스는 무려 가을 야구를 확정 지은 상태였다. 다만 아직 순위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피닉스가 승리한다면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 직행. 패배한다면 4위로 와일드카드를 거쳐야 한다.

“선배님.”

“어. 어어, 별거 아니었어. 그냥 설욕전 기회 받아 갈 건지, 아닌지 물어보시더라고.”

“그렇군요.”

정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어? 뭐냐? 안 궁금해?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도망가는 법. 아직 못 배우셨잖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얼마나 잘 도망가는데. 봐봐, 지금 이 나이에 지기 싫어서 MLB에서 안 던지고 KBO에서 뛰고 있는 거.”

“선배님. 대전 사람들 다 붙잡고 물어보십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대신에 대전 피닉스 고른 게 도망인지 도전인지를요.”

“쯧, 시즌 초에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쳐서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걸 보니까······.”

“더 마음에 드시죠?”

“그래, 인마. 얼른 와서 공이나 좀 받아봐. 안 그래도 내가 최수원 그 괴물 새끼 상대하려고 좀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부산 사직 구장.

시즌 144번째 경기.

마린스의 마지막 상대는 지난 이십여 년간 함께 리그 최하위를 꾸준히 다퉈왔던 영혼의 라이벌 대전 피닉스. 그리고 그 대전 피닉스가 만들어낸 한국 최고의 투수.

임광형이었다.

***

사직 구장의 23,000석은 진작에 가득 찼다. 야구장 내부의 상점에 어마어마하게 준비해둔 최수원의 유니폼 역시 완벽하게 동이 났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사직야구장의 외야 매표소 쪽에는 야구장에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잔뜩 자리를 깔고 앉았다. 게이트 쪽에 임시로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야구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공간조차 매우 부족하여 주차장으로 오갈 수 있는 내부 도로는 물론이거니와 사직 실내체육관 쪽과 실내수영장 쪽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풍경.

물론 마린스의 우승은 이미 결정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산의 야구 팬들은 마린스의 정규시즌 첫 우승이 완벽하게 발표되는 이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만약 이 세상이 영화라면 난 마린스 우승 발표 나오기 전에 운석 충돌로 지구가 멸망해도 충분히 개연성 있는 전개였다고 생각할 거야.”

“지구 멸망을 위한 개연성으로 마린스 우승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이라면 나도 십분 동의한다.”

“그보다 오늘 피닉스 선발 임광형이라는데 느낌 좀 괜찮지 않냐?”

“당연히 괜찮지. 걔 수원이한테 완전히 호구 잡혔잖아. 난 오늘 어쩌면 ‘그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경기장 바깥 외야 쪽에 옹기종기 모인 것은 단순히 우승의 순간에 사직 구장에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외 홈런.

어쩌면 나올지도 모르는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적지 않았다. 실제로 최수원의 61호 신기록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외 홈런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경기장 밖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상당 수가 커다란 잠자리채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시청률은?”

“23.1%입니다.”

“미쳤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음에도 모인 전국민의 시선은 그야말로 무서울 지경이다. 이제 KBO의 정규시즌 최고 시청률을 다시 갱신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 보였고 어쩌면 KBO 역사상 가장 높았던 시청률. 1993년 한국 시리즈의 32.1%까지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

그야말로 전국민의 시선이 모였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그 무대 위로 작년 마린스의 토종 최다승 투수 한명훈이 올라왔다.

[마린스 대 피닉스. 피닉스 대 마린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 마린스의 선발 투수 한명훈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오늘 경기 피닉스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한 경기죠?]

[네, 맞습니다. 승리하냐 패배하냐에 따라서 정규시즌 3위냐 4위냐가 결정이 납니다. 이게 사실 와일드카드를 치르는 것과 아닌 것도 제법 큰 차이가 있거든요.]

[마린스의 경우 이미 정규시즌 우승이 확정이 된 상황입니다만 그래도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경기죠. 실제로 보시면 요 며칠 로테이션으로 휴식을 주던 주전 선수들 대부분을 스타팅으로 기용을 했습니다. 홈에서 열리는 시즌 마지막 경기. 창단 이후 첫 우승!! 김대철 감독이 경기 전 인터뷰에서 무려 45년 동안 주지 못 했던 우승이라는 큰 기쁨을 승리를 하는 것으로 온전히 누리게 해주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게다가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한명훈 투수 역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경기입니다.]

[그렇죠. 작년의 6승을 넘어 7승을 거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만 올 해의 경우는 7승을 거둔다고 해도 마린스 토종 최다승 투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겠군요.]

토종 최다승.

나쁘지 않은 칭호다. 아니, 어떻게 보면 명예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거기에 6승 11패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더해진다면 그건 명예가 아닌 그저 조롱일 뿐이다.

작년 6승 11패. 팀 내 토종 최다승 투수. 그리고 올해 불펜으로 시즌을 시작했던 한명훈이 마린스의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섰다.

-딱!!!

초구는 시원한 우중간 2루타.

그리고 타석에 이번 시즌 골든글러브가 매우 유력한 유격수 오민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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