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우승(1)
이진명이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창단했던 팀에 지명돼서 올해로 16년째다. 고작 이런 일로 멘탈이 흔들리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경험을 했다.
‘이제 1년 차라고 하더니. 설마 여기서 기습 슬라이더까지 염두에 뒀을 줄이야······. 아니, 잠깐만. 설마 저 새끼 저거 염두에도 안 뒀는데 보고 친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내 슬라이더가 좀 쓰레기 다 됐다고 해도 만약 그런 거면 좀 너무 슬픈데······.’
이어지는 강라온.
-딱!!
잘 맞은 타구가 2, 3루간을 꿰뚫었다.
2루타.
연속해서 출루를 허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진명은 막 비장해지고 그러지는 않았다. 16년 정도 같은 걸 하다 보면 이제 비장함보다는 그냥 하던 일을 하는 것에 더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노형욱을 고의 사구로 내보내고 1, 2루를 채운 뒤 이규만에게 병살을 끌어냈다.
1회 다섯 타자를 상대로 2피안타 1실점.
나쁘지 않았다.
“승진아, 난 할 만큼 했으니까 점수 꼭 내라. 너도 타석에서 안 터진 지 좀 오래됐잖아. 이제 슬슬 터트려야지. 나도 오래간만에 두 자릿수 승리 좀 해보자.”
“네!! 최선을 다해 보겠······. 근데 선배님 올해 아직 7승 아니십니까?”
“마, 세상일 모르는 거지. 오늘 이기고 또 선발로 이기고 막판에 불펜으로 1승 더 할 줄 혹시 알아?”
“······. 알겠습니다.”
백하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고놈 참 잘생겼다. 딱 나 15년 전 보는 것 같네.”
“선배님······.”
“뭐? 왜? 눈빛 안 바꾸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인마, 나도 땡볕에 경기 뛴다고 피부가 늙어서 그렇지 젊었을 적에는 딱 저랬어.”
“아니, 피부 탓만 하시기에 이목구비 자체가······. 게다가 쟤도 땡볕에 풀시즌 치른 건 마찬가지인데요.”
“······.”
“이따 쟤한테 제품 뭐 쓰는지 물어봐 드려요?”
이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풀시즌을 치렀음에도 백하민의 피부는 여전히 눈부시게 하얬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히 관리를 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백하민이라는 인간이 타고난 많은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마운드의 백하민이 머릿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2.94
어제 경기 6.1이닝 3실점을 하면서 올라간 최수원의 평균자책점이었다. 저 녀석은 이제 경쟁심을 불태우기에 너무 멀리 가버렸다.
KBO 역사에 저보다 위대한 타자가 있었을까? 아니, 앞으로도 있을 수 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건대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2027시즌의 최수원보다 위대할 가능성이 있는 타자는 2028시즌의 최수원 혹은 2029, 2030시즌의 최수원이 유일하리라.
하물며 당장 내년에 MLB로 진출할 것이 거의 확실해진 지금. 최수원의 2027년은 불멸이라는 이름으로 KBO 역사에 새겨질 것이 분명했다. 올 해 녀석이 세운 기록들은 KBO가 존재하는 한, 아니 어쩌면 야구라는 종목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인구에 회자할 대기록이다.
그야말로 너무 아득하여 포기해버리고 싶어지는 격차.
하지만 백하민은 그런 압도적인 기록을 써 내려 가는 선수 앞에서, 경쟁심을 불태우기에 너무 멀리 가버린 후배의 뒤에서 그 아득한 격차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머나 먼 격차가 그에게 말했다.
‘포기하고 너의 걸음을 걷는다면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도 욕할 수 없었다. 모두가 2시간을 목표로 하는 마라톤에서 혼자 1시간 30분을 달리는 선수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야구는 그냥 마라톤도 아니고 울트라 마라톤이다. 그 누가 저스틴 벌렌더가 클레이튼 커쇼의 위대함을 따라잡으리라 예측했을까. 결국 자신의 페이스로 걷다 보면 저 먼 길의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것이 야구라는 종목이다.
그리고 그 달콤한 유혹 앞에서 백하민이 한 번 더 숫자를 헤아렸다.
‘2.94.’
그것은 포기하고 싶어하는 자신을 향한 강한 채찍질이었을 것이다.
하민은 저 멀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쭉쭉 나아가는 최수원을 직시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한번에 따라갈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을 품지도 않았다.
그저 시작은 투수랑 타자랑 혼자 다 해먹는 저 건방진 후배 놈에게 그래도 최소한 투수 기록 정도는 뒤지지 않는 것부터.
1회 말.
그 가능성 속에서 백하민이 최선을 다해 피칭했다. 그리고 그 피칭을 지켜보던 워싱턴 형제의 장남 윌리엄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저쪽이란 말이지.”
“윌, 너 방금 지금 그 말 굉장히 위험한 거 알지? 뭐가 네가 결혼도 안하고 딱히 여자도 안 만나는 게 한 번에 설명이 되는 말이잖아.”
“헛소리하지 말고. 너도 눈이 있으니 보일 거 아니야.”
“뭐? 피지컬 엉망인데 피칭 매커니즘으로 꾸역꾸역 메우는 거? 글쎄. 내 취향은 하민보다는 스완쪽이야. 부드럽고 단단하지. 회복력도 터무니없고. 게다가 네 말대로면 그 피지컬에 어울리는 소프트까지 탑재를 한 거잖아.”
“에이, 스완 그 녀석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야. 완벽한 하드웨어에 그 이상의 소프트웨어를 갖췄어. 녀석에게 부족한 건 약간의 최적화 정도? 그러니까 재미가 없지. 스완은 만화나 영화로 치면 마지막에 링에서 쓰러지는 재수 없는 라이벌 포지션의 탑독이라고. 저기 하민 같은 쪽이 진짜 주인공이지.”
“그래서. 형은 그 주인공을 잘 이끌어주는 코치가 하고 싶은 거고? 형, 계좌에 잔액 얼마 남았는지는 알고 있지? 잊지 마. 우리 피칭랩 개업 자금 가운데는 아빠랑 엄마가 형의 사랑스러운 조카들 대학 자금으로 따로 빼뒀던 신탁 자금도 들어갔다는 거.”
“······. 나도 알아. 안다고. 그냥 취향이라고 한마디 했다고 무슨 이야기가 거기까지 나오냐?”
-뻐엉!!
“스트라잌!! 아웃!!”
150.3km/h.
그야말로 몸을 쥐어짜는 것 같은 역동적인 피칭폼.
“그냥 아쉬워서 그러는 거야. 아쉬워서.”
“그래, 윌. 근데 너무 아쉬워하지 마. 보니까 알려준 대로 거의 틀리지 않게 하고 있더만. 물론 조금 오버 페이스로 달린 감은 있지만······.”
애당초 그 정도는 예측했다.
선수라는 것들의 습성은 빤했고 옆에서 계속 조절해줄 수 없으니 최대한 보수적으로 목표를 잡아주는 것이 타당했다. 최고의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 없을지라도 최대한 부상을 예방하는 것이 열아홉 살짜리 소년에게는 더 어울리는 조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동안이나 조금 더 신경 써서 봐주자고. 물론 돈은 받을 거지만. 출장비는 스완이 이미 낸 돈이니까 빼줄 수 있겠네. 어차피 장비도 마린스꺼고.”
“수전노인 네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굉장히 감동적이네.”
“어느 멍청한 형 놈이 금전 감각이 너무 마비 되는 바람에 강제로 수전노가 돼버린 비극적인 동생 입에서 나온 말이니 더 감동적이겠지.”
-딱!!
잘 맞은 타구.
강라온의 수비가 백하민을 구했다.
***
시즌 막판이라 힘이 좀 빠질 때도 됐는데 이제 정말 몇 경기 남지 않았으니 바닥까지 긁어내 보겠다는 마음이었을까? 하민이 형이 꾸역꾸역 블레이즈의 타선을 막아냈다.
2회를 지나서 다시 3회 초.
마운드에 블레이즈의 이진명이 또 올라왔다.
“이거 우리 오늘 진짜 우승하겠는데?”
“그러게······.”
몇몇 선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승.
사실 크게 감흥이 생기는 단어는 아니었다. 물론 시즌 초였다면 정말 이를 물고 달려들만한 단어였겠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즌 중반에 1위로 올라선 이후로 추격을 허용하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러니 한 자릿수의 매직넘버가 나온 이후로 사실상 우리의 우승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나와 달리 우승이라는 단어에 매우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스읍!! 새끼들이. 부정 타게. 조용히 못 해?”
서경준이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선수들을 단속했다.
물론 그 눈치의 대상은 이규만이었다. 평소였다면 괜히 애들 잡을 필요 없다고 만류했을 이규만이었지만 오늘은 그도 그럴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82년 마린스 창단 이후 무려 45년만에 최초 정규시즌 우승이며 이규만 본인은 마린스에서만 23년을 뛴 끝에 커리어 첫 우승이다.
이미 예전부터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막상 그게 코앞으로 닥쳐온 지금 주변에 신경을 쓸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부웅!!!
“스트라잌!!!”
선두 타자인 쪼유가 멋지게 방망이를 헛돌렸다.
좌타자라서 우완 사이드암인 이진명의 공이 비교적 상대하기 쉬울 텐데 체인지업에 정말 멋지게 속아 넘어간다.
-부웅!!
“스트라잌!!”
그것도 두 번 연속.
-부우우우웅!!!
“스트라잌!! 아웃!!!”
이건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에 헛돌린 건 체인지업이 아니라 속구였다.
“아, 까비. 첸졉 노렸는데 거기서 속구가 딱 들어오네.”
“네가 아무리 쪼유라도 양심이 있으면 삼구삼진을 까비라고 하면 안 되지.”
“그렉 매덕스가 이런 말을 했지. 배리 본즈가 아니라면 체인지업은 구분할 수 없다고. 그만큼 체인지업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배리 본즈가 아니라 토니 그윈.”
“아. 그래? 헷갈렸네. 근데 그러면 배리 본즈도 체인지업은 못 친 건가? 그러면 내가 고전한 것도 당연하군.”
쪼유 이 녀석 마린스 사람들이랑 자주 어울려서 그런가? 본래 이 정도로까지 멍청하고 뻔뻔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사람이 더 엉망이 됐다.
-뻐엉!!!
그리고 쪼유를 엉망으로 만든 범인 중 하나.
이정훈이 이진명의 공을 골랐다.
물론 쪼유의 말처럼 속구와 체인지업을 구분하는 것은 공의 궤적을 예측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속구와 궤적에 크게 차이가 없는 체인지업이 괜히 사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진명이 투피치에 체인지업 원툴 소리 듣는 투수였지만 그럼에도 아직 선발로 버틴다는 것 자체가 그 체인지업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증명한다. 실제로 그의 체인지업은 터널링 구간이 매우 길어서 궤적만 보고는 여간해서는 속구와 체인지업을 구분하기 힘들다.
스트라이크와 파울.
그리고 볼.
2-2의 카운트에서 이정훈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체인지업이었다.
당연히 체인지업을 노리고 휘두른 게 아니었다. 속은 거다. 기본적으로 이진명의 체인지업은 존에서 빠져나가는 유인구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내야 땅볼 아웃.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또 왔네. 야,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니냐?”
“왜요? 이러다가 정이라도 들 거 같아서요?”
“그러게. 정들면 나중에 내 타석에서는 좀······. 아니, 아니다. 정이 들 필요가 없겠구나. 얼른 미국이나 가버려라.”
김승진과의 쓸데 없는 스몰토크.
그리고 마운드의 이진명이 와인드업했다.
그래, 분명 공이 빨라지고 느려지는 건 매우 구분하기 힘들다. 그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근데 말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빠른’ 공이 그대로 ‘빠르게’ 들어오거나 ‘느리게’ 들어올 때의 이야기다. 애초에 빠른 공이 없는 데 이게 뭐 헷갈릴 게 있을까?
느린 공과 더 느린 공.
물론 이런 구성에도 애를 먹을 수는 있다.
하지만 140도 안 되는 속구와 130이 안되는 체이지 업에 고전해서야 나한테 두들겨 맞았던 메이저리그 투수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내가 아무리 오늘 어깨가 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도!!
-딱!!!
망할······.
높게 뜬 타구가 좌측 외야로 쭉쭉 날아갔다.
이번에도 좀 부족했다. 하지만 앞서 1회의 경우도 있으니 내심 약간의 행운을 기대하며 빠르게 달렸다.
-아아아······.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경기장 전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아쉬움 가득한 한숨.
[아아, 장재환!! 블레이즈의 중견수 장재환이 담장 앞에서 깔끔하게 공을 잡아냅니다.]
[타구 각이 조금 높았어요. 바람도 살짝 역풍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방향도 너무 깊숙했습니다. 최수원 선수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네요.]
그래, 뭐 한 번 운이 좋았으면 한 번은 운이 안 따를 수도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번까지 두 번의 타석으로 지금 내 몸 상태에서 어떻게 방망이를 휘둘러야 할지 감이 좀 왔다.
4회를 지나 5회.
백하민은 여전히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