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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23화 (223/305)

223화. 그 너머에 위대한 기록(6)

최근 한국 스포츠계의 화두는 단연 최수원의 홈런 기록이었다. 아니, 사실 이건 단순히 한국 스포츠계를 넘어서 한국의 시사 전반을 강타하는 거대한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화젯거리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최수원의 미국 진출. 그리고 미국 진출을 한다면 과연 어느 팀으로 갈 것인가에 관한 부분이었다.

“메이저 진출은 무조건 한다고 봐야지.”

“에이, 꼭 그런 건 아닐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 마린스가 보내주겠어?”

“글쎄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최수원이 팀 우승까지 시켜놓고 미국 가겠다고 하면 거부 힘들지 않겠어?”

“여론은 한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한 법이지. 솔직히 최수원 데리고 있으면 그 데리고 있는 동안은 계속 우승각인데 상식적으로 그걸 놔주겠냐?”

“그런가?”

마린스가 놔줄 리가 없다는 의견들.

“그런가는 무슨 그런가냐? 재작년 말에 포스팅 규정 바뀌고 최수원이 메이저 가려다가 KBO로 방향 틀었잖아. 그러면 상식적으로 계약서에 어? 구단은 선수가 메이저 진출을 원할 때 적극적으로 돕는다. 이런 거 넣었겠냐? 안 넣었겠냐?”

“그거야 넣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1년 만에 간다는 걸 진짜 돕겠냐?”

“그거야 모르지. 근데 대충 미국 쪽 구단들 움직이는 거 보면 가닥 나오는 거 아니겠냐? 듣기로는 지금 그쪽에서 진짜 난리도 아니라던데.”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미국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당장 내년에 또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쩌면 홈런 신기록보다 최수원의 미국 진출이 그들에게는 더 당면한 문제일 지도 몰랐다.

“수원이 말이 그건 확정난 게 없다더라고요. 반반?”

“반반? 그러면 갈 확률이 절반은 된다고? 마린스가 진짜 이걸 놔준대?”

“솔직히 마린스야 뭐 크게 손해 본 것도 없죠. 1라운드 전체 1픽 한 장 써서 우승 한 번 했으면 남는 장사지. 게다가 계약금 내준 거 포스팅피로 다 당겨올 수 있을걸요?”

“그런데 국제유망주인가 뭔가라서 얼마 안 되지 않아?”

“그래도 계약금이랑 하면 한 백 억은 될걸요?”

“확실히 미국 스케일이 다르긴 다르네.”

당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원이 씨익 웃었다.

“선배도 그 스케일 다른 곳 한 번 노려 봐야죠.”

“나? 에이, 나는 애초에 프로도 가능할까 싶었는데. 1군까지 서는 걸로 진짜 내 그릇은 차고 넘친다. 그런 허황한 목표는 됐고. 일단 1군 붙박이를 목표로 한 번 달려 볼란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난 그러면 이미 1군 주전이니까 메이저를!!”

수원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모습에 조유진이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노리는 건 아니고. 1군에서 꾸준히 뛸 수 있는 걸 목표로······.”

“왜? 꿈은 크게 가져도 좋지. 수원아 쪼유 메이저 가능성 어떻게 생각하냐?”

“글쎄요······. 마린스의 미래나 마린스의 새희망. 이번 시즌 신인왕보다는 가능성이 높겠죠.”

“아니. 최수원 넌 그걸 뭐 또 담아두고 그러냐.”

“담아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메이저 진출 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은거지. 예전에 한 번 말하지 않았나? 영어 공부도 해두라고. 이왕이면 스페인어도 좀 해두고. 설사 미국 진출 아니더라도 한국에 용병으로 오는 투수 대부분이 그 두가지 말만 할 줄 알면 소통이 수월할 거라고 말이야.”

“쪼유. 수원이가 너 제법 높게 평가하나 본데?”

“아뇨, 근데 어차피 안될 겁니다. 저 녀석 저거 영어고 스페인어고 공부 하나도 안 했을 거예요.”

“그거야 시즌 중에다가 훈련만으로도 너무 빡세고 바빴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시즌 끝나면 바로 공부를 시작하시겠다?”

“한다!! 내가 진짜 한다? 어? 너 나중에 깜짝 놀라지 마라.”

모두가 프로 1군 무대에서 만나 경기를 치르고 이뤄지는 만남.

학창 시절과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약간의 투닥거림.

조규혁에게는 정말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

“이거 꿈인가?”

“유감이지만 현실입니다.”

“아니, 저 미친놈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원래 하루씩 쉬었잖아.”

“그거야 슬슬 시즌 막바지니까······.”

“아니, 시즌 막바지인 건 알겠는데 신기록 어제 세웠잖아. 그러면 이제 좀 슬슬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야구 하루이틀 할 거야? 게다가 한국 시리즈도 남았잖아.”

“그러게요······. 아!! 맞다. 근데 어제 돌핀스가 경기 패배했으니까 오늘 얘들이 이기면 우승 확정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정규시즌 우승 결정하는 경기에 빠지는 건 또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아니, 근데 그런 건 쟤들도 홈에서 하는 게 모양새가 더 좋잖아.”

블레이즈의 최고참.

2012년부터 블레이즈에서 뛰어온 블레이즈의 산 역사. 올해 나이 36세. 이진명의 끊임없는 투덜거림을 오늘 그의 공을 받아야 하는 김승진이 연신 달랬다.

“승진아, 너 최수원이랑 좀 친하지 않냐? 가서 오늘 적당히 살살하고 내일 홈 가서 좀 제대로 하라고 해봐. 홈에서 우승 결정 지으면 모양새도 좋잖아.”

“어휴, 친하긴요. 어제 저한테 162짜리 속구 던지는 거 못 보셨어요? 게다가 우리가 오늘 이기더라도 돌핀스가 지면 얘들 걍 우승이잖아요.”

“아, 짜증나게 왜 맞는 말을 하는 건데!! 아, 몰라. 나 오늘 완전 망했으니까 너 알아서 해. 나 1회부터 홈런 두들겨 맞고 강판당하면 다 네 탓이다.”

김승진이 마음 속으로 참을 인자를 여러 번 더 새겨넣었다.

그래, 이 정도는 최근에 만나기 시작한 여덟 살 연하 여자친구의 꼬장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선배 등판일에만 이렇지 평소에는 또 잘해주지 않던가.

참자, 참아.

경기가 시작됐다.

***

1회 초.

몸이 확실히 묵직했다.

0.1 이닝 더 던지고 안 던지고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냐만은 어제 6이닝만 던지고 그만 던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오른쪽 어깨의 뻐근함은 상당했다. 아니, 오타니 쇼헤이는 대체 이런 컨디션으로 어떻게 경기를 뛰었던 걸까? 심지어 얜 등판 스케줄이 나보다 더 빡빡했을 텐데.

-부웅!!

“스트라잌!! 아웃!!!”

[5구째!! 이진명의 절묘한 체인지업이 이정훈의 방망이를 끌어냅니다.]

“저 선배 오늘 왜 저러신 다냐? 컨디션이 아주 빨딱 섰는데? 아주 나이를 까먹으신 것 같아.”

“그러게요. 팔 각도가 오늘 상당히 높은데요?”

이정훈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나름대로 내 앞 타자로 어떻게든 출루 해볼 생각이었는지 특유의 그 커트 능력을 발휘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체인지업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이진명의 경우 쓰리쿼터와 사이드암 사이의 어디 즈음에서 공을 던졌는데 체인지업이 특히 일품이다. 리그 전체를 통틀었을 때 피닉스의 임광형 정도를 제외하면 이진명보다 체인지업이 더 좋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투수는 없을 정도다.

방금도 거의 속구 궤적으로 들어오다가 무슨 마법처럼 가라앉았는데 이정훈이 헛스윙을 할 만했다.

“야, 오늘 또 왜 나온거냐? 어제 홈런 신기록도 세웠겠다. 몸 좀 아껴야지. 젊다고 그렇게 막 굴리다가 나중에 골병든다.”

“걱정 감사합니다. 근데 주변에서 워낙에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고들 하셔서요. 노 좀 저으러 왔습니다.”

“물이 들어오긴. 물은 오늘 우리 진명 선배가 아주 제대로 올랐어. 봤지? 공 되게 좋던 거. 아무튼 이렇게 나왔으니까 그냥 적당히 삼진 하나 먹고 교체해서 남은 경기는 푹 쉬어라. 형이 다 네 몸 생각해서 해주는 이야기야.”

“선배님의 배려. 너무 감동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한 가운데 속구 하나 시원하게 부탁드립니다. 좀 빨리 치고 들어가서 쉬게요.”

“그래, 잘 봐라. 한가운데 속구 들어 온다?”

마운드의 이진명이 와인드업했다.

상당히 컴팩트한 폼.

어제 상대했던 서남훈과는 또 다른 형태의 사이드암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날아왔다.

0.01초의 짧은 시간.

생각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느렸다.

아마도 체인지업.

움직이던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뻐엉!!!

“스트라잌!!”

[바깥쪽 낮은 코스!! 절묘하게 들어가는 빠른 공!! 이진명이 최수원을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가져갑니다.]

“너도 참, 내가 속구라고 알려줬는데 그걸 못 믿네.”

“선배는 거기가 한가운뎁니까?”

“아, 미안미안. 진명 선배는 영점을 여기로 잡아놔서 여기가 딱 한가운데라고 내가 미리 말 안 해줬었나 보네.”

“그래서 한 가운데 속구 하나 더 옵니까?”

“야, 서비스는 하나면 됐지. 양심 없게 두 개 연속을 바라면 어쩌냐?”

대체 양심은 누가 없는 건지.

마운드의 투수는 많은 투수들이 그렇듯 포커페이스였다.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철가면은 그 눈빛까지 철저하게 가려주는지 도무지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그 묵직한 시선에서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영락없이 체인지업인 줄 알았는데 속구였다니.

하긴 이진명은 여느 투수들처럼 나이를 먹어가면서 구속이 점점 느려져서 한때 그래도 140중반까지 나오던 구속은 이제 135도 간당간당한 상황이었다. 그의 체인지업이 최고 128정도 나오니까 정말 그 격차가 적은 편에 속한다.

마음속에 방금의 타이밍을 새겨 넣었다.

두 번째.

좀 전과 완벽하게 똑같은 폼. 10km/h 가깝게 떨어진 구속 대신에 새겨 넣은 폼이다. 저것은 지금 이진명이라는 투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낮은 코스.

조금 이질적인 움직임.

앞선 공과는 달랐다. 사실상 투피치인 이진명의 레퍼토리를 생각하면 체인지업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높은 확률일 것이다.

하지만 난 이진명을 믿었다.

저 나이대에 최고 135정도의 공으로 꾸역꾸역 1군에서 4선발로 뛸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속구와 체인지업이 타자들을 완벽하게 속아 넘길 수 있을 만큼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절대 체인지업이 아니다.

투심일지, 싱커일지, 혹은 슬라이더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공은 뚝 떨어지는 공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덜 떨어지는 공. 그리고 분명 체인지업인 척 나를 속여서 카운트를 잡기 위한 공이 틀림없었다.

공이 워낙에 느려서 생각할 여유는 충분했다.

한 박자 늦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찌릿한 손맛이 느껴졌다.

강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좌측 담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올랐다.

‘얕아.’

약간의 아쉬움.

예상은 다 맞았는데 공의 방향이 생각보다는 조금 낮았다. 공에 걸린 회전이 매우 적었는지 부력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홈런 기록을 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속을 달래며 빠르게 1루를 지나 2루를 향해 달렸다. 몸이 무거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

시즌 63호.

그러니까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해할 수 없는 법력이 듬뿍 담긴 외야 담장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넘어 관중석 1열에 떨어지는 매우 작은 소형 홈런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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