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그 너머에 위대한 기록(5)
김승진은 올스타급 포수였다. 평균 이상의 수비와 더불어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기대해볼 만한 파워까지 갖췄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번 시즌.
블레이즈의 성적이 엉망인 이유들 가운데 올라오는 백업 포수들마다 폭망이었다는 것이 매우 큰 지분율을 차지했다.
덕분에 이번 시즌 김승진은 지금까지 블레이즈가 소화한 134경기 가운데 무려 121경기 선발 출장했으며 5경기를 교체 출장했다. 애당초 포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수비 부담이 크다. 본래도 체력적으로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었던 김승진이 퍼지기에는 매우 충분한 이유였다.
[타석에 7번 타자 김승진이 올라옵니다.]
[최근 타석에서 집중력이 상당히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블레이즈로써는 대안이 없는 형편이죠.]
[블레이즈도 작년 세 번째 옵션이었던 박재균이 어느 정도 제 몫을 해주는 모습을 보여준 탓에 백업이었던 강재구를 상무로 입단시키면서도 포수자원을 특별히 보강하지 않았었거든요.]
[이번 시즌 박재균의 부진은 박재균 본인에게도, 그리고 블레이즈에게도 참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16홈런.
그리고 그 가운데 올스타 이전까지 친 홈런이 무려 12개로 하반기 그의 부진은 매우 명확했다.
“야, 좀 살살 하자고 해봐. 네 친구 왜 저렇게 살벌하냐?”
“어휴, 선배님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아니, 아시아 홈런 신기록 쳤으면 눈깔에 힘 좀 풀고 하지. 저거저거 살벌한 거 봐라.”
“수원이 저 녀석 1회 초에 아시아 홈런 신기록보다도 3회 초 타석에서 외야 뜬공으로 물러난 걸 더 신경 쓸 거예요.”
타석에 선 김승진이 최수원을 마주봤다.
‘속. 구.’
그건 딱히 복화술 같은 거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너무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을 입 모양이었다. 물론 김승진 역시 이렇게 타자석에서 이야기를 좀 주고받았다고 그걸 무조건 지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압박은 될 수 있다. 게다가 최수원은 자신의 공에 확신을 갖는 투수다. 뭐랄까? 네가 내가 던질 공을 알아서 뭐 어쩌려고? 그래도 못 치는 건 마찬가지인데. 하는 배짱으로 던지는 유형이랄까? 뭐, 속구를 안 던지면 그건 그것대로 또 놀릴 거리가 생기니까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최근 체력적인 문제로 컨디션이 떨어진 것은 김승진 자신만이 아니었다. 시즌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경기에서 162짜리 속구를 뻥뻥 던지던 최수원 역시 지친 건 마찬가지다. 지난 두 경기를 통틀어 가장 빨랐던 공의 구속은 160.7km/h.
물론 그것만 하더라도 더럽게 빠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고 구속이고 평균적으로 형성되는 구속은 158정도.
“하······.”
아니, 그래도 여전히 더럽게 빠르기는 했다.
그러니까 앞에서 블레이즈 타자들 가운데 안타 친 녀석이 딱 한 녀석뿐이고 그나마도 병살로 이닝이 마무리됐겠지.
그래도 그 지랄 같은 커브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초구.
간결하고 깔끔한 투구폼. 하지만 묘하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느낌이 드는 디셉션.
야구공이 최수원의 손을 떠났다.
한 박자 빠르게.
공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방망이.
158km/h의 속도에 맞춘 타이밍이었다.
손을 떠난 공이 그려내는 궤적.
그리고 날아오는 속도.
속구였다.
예측되는 위치는 바깥쪽 높은 코스. 쉽지는 않다. 하지만 타이밍만 맞는다면!!
김승진의 방망이가 최수원의 공을 후려쳤다.
-딱!!!
[김승진!!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하지만 뻗어나가지를 못합니다.]
[방망이가 많이 밀렸어요. 이건 속구를 예측하고 게스 히팅을 했는데도 공이 너무 좋았습니다.]
코스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어찌어찌 힘으로 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높은 코스.
스윙폼이 흔들렸다. 게다가 전광판에 새겨진 저 숫자를 좀 보라.
161.7km/h
“망할 녀석 같으니.”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던진 공일 것이다.
김승진이 타석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8번 타자 조규혁이 타석에 들어왔다.
“규혁 선배님. 데뷔전 축하드립니다.”
“말로만?”
“하하, 어떻게 속구로 하나 드립니까?”
“볼 배합 네 마음대로 할 수는 있고?”
“······. 그래도 가끔 제 생각도 좀 들어갑니다.”
179cm에 107kg.
배터 박스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고작 스물한 살. 조금 노안이라고 해도 다른 베테랑 선수들과 비교한다면 조규혁 역시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1년, 1년이 훨씬 크게 느껴졌던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했기 때문일까? 조유진이 규혁에게서 느끼는 ‘선배’라는 느낌은 같은 팀의 강라온이나 이정훈 이상이었다. 이규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노형욱이나 서경준 정도는 되는 선배를 마주한 느낌이다.
타석에 선 조규혁이 양 다리를 벌리고 단단하게 섰다. 그야말로 태산과 같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조규혁에게는 묵직함이 있었다. 도저히 오늘이 1군 데뷔전이라고 믿겨 지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초구 와인드업.
고등학교 선배를 향하여 최수원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부웅!!!
“스트라잌!!!!”
-부우웅!!
“스트라잌 아웃!!!”
속구로만 연달아 세 개.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규혁이 눈을 몇 차례 끔뻑거렸다.
대체 뭐가 지나간 거지?
이거 꿈인가?
“수고하셨습니다.”
“······. 그래.”
타석에서 물러나는 조규혁은 여전히 거대했다. 하지만 조유진은 그에게서 느껴지던 그 ‘선배’라는 느낌이 조금 많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고등학교 시절에 뭐 어떤 관계였건 간에 조유진 자신이 풀시즌을 치러낸 주전 포수인 것과는 다르게 조규혁은 오늘 프로 1군 무대에 처음 서는 신인에 불과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
참 야구라는 게 이상하다. 마음가짐을 조금 다르게 갖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변한다. 최근 투수로 등판하던 날의 경기들에서 나는 홈런을 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잭에게 좀 지치긴 했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매우 괜찮다는 평가를 받고, 윌리엄에게 나의 피칭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투수가 홈런 좀 맞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나는 1회 초에 타석에 서서 오늘 피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냥 오롯하게 타석에 집중했다.
그리고 장외로 홈런을 날려 보냈다.
그리고 3회 두 번째 타석에서도 좀 아쉽게 외야 깊숙한 곳에서 잡히긴 했지만, 타구의 질이 나쁘지 않았다.
5회 말.
적시 안타에 1점을 내줬다.
원아웃에 주자 2루라서 좀 위험했는데 볼넷으로 주자 1, 2루 채우고 병살로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6회 초.
아마 이전이었다면 앞선 이닝에서 점수를 내준 것이 계속 신경 쓰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신경은 쓰였다.
솔직히 윌리엄에게 그 몇 마디 들었다고 대오각성해서 피칭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완전히 달관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1회 초에 강렬했던 성공의 기억이 있었다.
의식적으로라도 타석에 오롯하게 집중하려고 애썼다.
[아, 블레이즈, 여기서 투수 교체입니다. 기희철을 대신해서 서남훈이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서남훈 선수 이번 시즌 우타자들을 상대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죠?]
[네, 우타자 상대로 피OPS가 0.645밖에 안 됩니다. 리그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아주 좋은 성적이에요.]
마운드에 새로운 투수가 올라왔다.
서남훈.
150 초반의 빠른 공을 던지는 우완 사이드암 투수. 포심과 투심, 싱커가 모두 비슷한 구속으로 우타자 입장에서는 매우 까다로운 투수다. 사이드암이라는 게 태생적으로 다른 손 타자에게는 그냥 멀리서 평행한 궤적으로 날아오는 공이지만 같은 손 타자에게는 마치 등 뒤에서 날아드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느낌만 그런 게 아니다.
실제로 서남훈처럼 팔이 긴 투수의 경우 실제로 타자의 등보다 더 뒤편에서 홈플레이트를 향해 공이 날아온다.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서남훈이 마무리와 같은 최고 레벨의 불펜. 혹은 선발이 될 수 없는 것은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약점과 함께 사이드암이 갖는 태생적인 약점 때문일 것이다.
-뻐엉!!!
[살짝 빠져나가는 공!! 최수원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습니다. 볼카운트 1-0.]
제구가 매우 쉽지 않다.
게다가 이게 몸에 맞는 공도 엄청 많이 나온다. 내가 알기론 서남훈이 이번 시즌 던진 이닝이 나의 1/3 남짓인데 몸에 맞는 공은 거의 나랑 비슷하게 많았다. 나도 몸에 맞는 공이 결코 적은 투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두 번째.
-뻐엉!!!
“스트라잌!!”
살짝 아리까리했는데 심판이 스트라이크 콜을 했다.
마운드의 서남훈이 웃는다.
“이거 어쩌냐? 오늘 우리 남훈이 좀 긁히는 날 같은데. 알지? 남훈이 긁히는 날에는 우타자들은 손도 못 쓰는 거.”
틀린 말은 아니다.
저런 공이 제대로 들어온다면 우타자 입장에서는 확실히 공략하는 것이 매우 힘들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네요. 긁히는 날이라서.”
“뭐?”
김승진의 반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타석에서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마운드에 선 서남훈이 자신의 긴 팔을 마치 채찍처럼 휘둘렀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피칭.
그리고 그 손끝에서 출발한 150을 훌쩍 넘어가는 빠른 공.
심지어 그 궤적은 앞서 보여준 공과 조금 달랐다.
포심? 투심? 싱커?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그건 지금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공이 존안으로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서워해야 할 공은 긁히는 공이 아니라 긁히지 않아서 제 멋대로 존 밖으로만 빠져 나가는 공이었다.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향해 나의 방망이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딱!!!
타구가 솟구쳤다.
쭉쭉 뻗어나가는 타구.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거 앞서 기희철의 공이 이상하게 가벼웠던 게 아니다. 그냥 오늘 블레이즈 파크의 기류가 좀 외야를 향해 움직이는 거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시즌 62번째 홈런.
1루를 돌아 2루로.
2루를 돌아 3루로.
그리고 다시 홈으로.
수많은 박수 갈채 속에서 담담하게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메이저리그가 아니라서일까? 아니면 지금 내가 겨냥한 목표가 그것보다 아득하게 높은 숫자이기 때문일까?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내가 그토록 바랬던 것 치고는 62번째 홈런은 그리 대단한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 드는 생각은 앞으로 11개.
아니, 12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최수원 61호!! 그리고 62호 멀티 홈런!!]
[최수원 135경기 만에 아시아 신기록 경신!!]
[투타 모두 괴물과도 같은 활약!! 최수원 6.1이닝 3실점으로 시즌 13승 수확하다!!]
[최수원 이례적인 2차전 출격 준비 완료!! 휴식일 없는 경기 출장??]
***
“와, 진짜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라. 아니, 정신 차려보니까 헛스윙 삼진이야. 진짜 방망이 휘두르기라도 한 게 다행이야. 자칫 잘못했으면 그냥 두눈 끔뻑끔뻑하다가 루킹 삼진으로 물러날 뻔했어. 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래도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저도 프로 와서 실력 제법 늘었다고 생각하는데 최수원 저 새끼는 어휴, 말도 마십쇼.”
“쪼유 너도 근데 많이 늘긴 늘었더라. 오늘도 안타 하나 쳤잖아.”
“하하, 제가 이래 봬도 주전 포수 아닙니까. 마린스의 미래. 마린스의 새희망. 신인왕 후보!! 이 정도는 해줘야죠.”
미래, 새희망, 신인왕 후보.
대체 어디서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수원이 넌 진짜 이번 시즌 끝나고 미국으로 바로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