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그 너머에 위대한 기록(4)
“규혁이 형!! 오래간만입니다? 요즘 연락도 잘 안 되더니 결국 올라오셨네요.”
“어, 운이 좋았지. 그나저나 연락이 잘 안 된 건 인마. 네가 바빠서 그런 거고. 어디서 은근슬쩍 그걸 내 탓을 하려고. 넌 나뿐만 아니라 지금 애들이랑 거의 대부분 연락 어렵잖아.”
“하하, 제가 요즘 좀 정신없이 바쁘긴 했죠.”
“그래, 이번에 병영이가 한 턱 쏘는 곳에도 못 나오고. 진우가 많이 아쉬워 하더라.”
“쪼유한테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병영 선배 이번에 드디어 드래프트 됐다고요.”
“어, 걔도 진짜 참······. 아, 맞다. 수원이 넌 안병영이랑 좀 불편한가?”
“아뇨. 뭐 저야 이제 그럴 것도 없죠. 오히려 병영 선배 쪽이 저를 불편하게 여기면 모를까요.”
“하긴, 이제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 아니다. 이제 다르다기 보다는 그때도 솔직히 네가 좀 봐준 거였다고 봐야지.”
현실의 학교에서 괴롭힘당한 쪽이 괴롭힌 쪽보다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교실 내에서 괴롭힘이라는 건 보통 마운팅인 경우가 많은데, 이건 단순히 완력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학습능력이나 부모의 부 같은 요소를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스포츠를 비롯한 예체능 쪽은 좀 다르다. 아무래도 이쪽은 단순히 나이로 위계질서가 확 나뉘는데 이걸 뒤집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이쪽도 뜨면 열외 같은 풍습이 좀 있는 편인데 엄밀히 말해서 안병영이 나한테 한 짓거리는 그 풍습을 무시한 짓거리였다. 나도 쓸데없이 착해서 거기에 또 맞춰준 편이었고. 솔직히 뭐 상황은 달라진 것도 없는데 당시에 내가 마인드셋을 바꾼 것 만으로도 팀 내 역학 관계가 한순간에 뒤집힌 게 그걸 증명한다.
“아무튼 병영 선배도 진짜 2년 고생 많이 했겠네요. 이번에 대학 얼리 된 사람 열 명도 안 되죠?”
“어, 그 중에선 병영이가 세 번째인가로 높다더라.”
“6라운드? 맞죠?”
“어. 그리핀즈.”
“거기 팀 문화 선후배 중심 그거 뜯어고친다고 장난 아니라던데. 병영 선배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병영이도 많이 바뀌었더라고. 솔직히 뭐, 그땐 너무 어렸었다. 이런 말로 퉁 치기에는 좀 그렇지만 사람이 고생 좀 하면 바뀌기도 하잖냐.”
“어휴, 그나저나 규혁이형. 오래간만에 만나서 병영 선배 이야기만 하다가 시간이 훅 갔네요. 어떻게 경기 끝나고 잠깐 밥이나 한 끼 하실래요?”
“나야 좋지. 근데 너 괜찮겠어? 솔직히 오늘 선발 등판인데 경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좀 미안한데.”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게다가 선배랑 제 사이 아닙니까. 중앙고의 자랑. 세계대회 준우승 멤버.”
남자 둘이서 무슨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은지.
오래간만에 규혁 선배와 나눈 대화는 참 즐거웠다.
“그래, 그런 적도 있었지. 아무튼 그러면 경기 끝나고 보자. 참, 오늘 나 1군 데뷔전인거 알지? 살살 좀 부탁하자. 어?”
“봐서요.”
***
[블레이즈 대 마린스. 마린스 대 블레이즈. 이번 시즌 마지막 2연전. 매직넘버 3을 남기고 있는 마린스. 그리고 남은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하더라도 자력으로 가을 야구 진출은 불가능해진 블레이즈의 맞대결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수원 선수의 61홈런 도전도 매우 중요한 볼거리입니다. 지난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 선수가 세웠던 60개. 아시아 최다 홈런과 이미 타이 기록을 이룬 최수원 선수. 과연 오늘 경기에서 그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지 참 궁금하네요.]
[박동식 위원님은 그 가능성을 어떻게 점치십니까?]
[글쎄요. 최근 최수원 선수가 선발로 등판한 경기에서는 타격이 아주 좋은 건 아니었거든요. 아무래도 두 가지를 모두 신경 쓰기엔 힘든 지점이 있겠죠. 다만 그래도 최수원 아닙니까. 전 1회 초 마린스 공격부터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기 타석에 서서 잠시 윌리엄 워싱턴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공에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이죠? 지지난 경기에 만루 홈런을 맞은 이유가 뭔가 문제가 있어선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그걸 걱정했다고? 스완, 넌 만루 홈런을 맞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글쎄요. 그날 컨트롤도 좀 난조이긴 했어요. 마인드셋도 좀 문제 아니었을까요? 강호 형이 요새 타격감이 좀 괜찮아서 까다로운 경쟁한다는 게 볼넷이 돼버린 것도 좀 그랬죠. 차라리 정면으로 던졌으면 더 나았을 수도 있는데. 게다가 강호형이 그렇게 나가고 나니까 하필 그다음 타자가 주원 선배라서······. 게다가 생각해보니까 운도 좀 많이 없었네요. 하필 그런 날에 상대가 돌핀스였다니. 그 선배 높은 코스 빠른 공에 좀 약한 편인데도 그걸 넘겨버리더라고요.”
“잠깐만, 잠깐만. 질문을 바꿔보자. 넌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치지 못 하잖아. 그러면 그 이유는 대체 뭐라고 생각해?”
“아······.”
내 표정만으로도 답이 됐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윌리엄이 씨익 웃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치지 못하는 이유?
애당초 그건 질문이 잘못됐다. 세상에 그딴 이유가 어디 있겠나.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치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러니까 내가 만루 홈런을 맞은 이유 역시 질문이 잘못됐다.
세상에 만루 홈런을 안 맞는 투수가 어딨겠는가. 어느 전설적인 투수는 한 이닝에 한 타자에게 만루홈런만 두 방도 맞았던 것을.
답 없는 문제에 답을 생각했으니 답이 안 나올 수밖에.
-딱!!!
어라?
선두 타자 이정훈이 깔끔하게 공을 잡아당겼다.
심지어 공이 쭉쭉 뻗어나간다. 좌측 외야 거의 담장 근처까지 날아간 타구.
이정훈이 2루에 안착했다.
오늘 블레이즈의 선발은 기희철.
이번 시즌 3.47의 평자책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로 블레이즈의 토종 선발 가운데 가장 강력한 투수다. 마치 작년 시즌 우리 팀의 토종 최다승 투수 한명훈과 비슷한 포지션인데 그보다 조금 더 잘 던지는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야, 아니, 무슨 투수가 타순을 당기고 그러냐? 피칭에 집중해야지. 어? 너 요즘 성적도 좀 위태위태하더만. 이제 평자책 3점대 아니냐?”
지난 번 올스타 때도 그렇고 포수들 가운데 유독 말이 많은 편인 김승진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아직 2.88이요. 오늘 다시 2.7로 떨굴 생각입니다.”
“하여간 아직 어려서 그런가? 장래 희망 하나는 야무지네.”
“원래 꿈은 좀 크게 가져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운드의 기희철이 피칭을 준비했다.
바깥으로 크게 도망가는 공.
하지만 그래도 마냥 도망가려 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래도 까다로운 승부를 하려 했다고 우길만한 범위의 공이었다.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원정 경기임에도 잔뜩 찾아온 마린스의 팬들 덕분일까?
대신 관중석의 야유가 크게 울려 퍼졌다.
“1루 비어서 볼넷 하실 거면 그냥 자동고의사구 하시지. 보는 사람들 지루할 텐데요.”
“지금 분위기에 너한테 자동고의사구 했다가 무슨 테러를 당하려고.”
“자동고의사구 아니라 그냥 볼넷도 테러 당하지 않나요?”
“글쎄다. 한국 야구 문화가 많이 성숙해졌는지. 볼넷 정도로는 괜찮다고 하더라고?”
두 번째.
마찬가지로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
-뻐엉!!
당연히 이번에도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관중석에 야유가 더 커졌다.
그리고 이건 아무리 봐도 마린스 팬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운드에 선 기희철의 인상이 크게 일그러졌다. 당연한 일이다. 홈에서 야유를 받는 것을 참을 수 있는 투수는 많지 않을 테니까.
“선배 타석에서 초구로 속구 던져 드릴 테니까 시원하게 승부 한 번 가시죠. 어때세요. 딜?”
“야, 그게 딜이 되겠냐? 우리 요즘 안 그래도 성적 때문에 힘든데 여유 있는 너희가 양보 좀 해라.”
“우리 그래도 일본은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시아 홈런 신기록 써야죠.”
“그거 네덜란드 사람이거든?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록의 대상이 되는 건 좀 그러네? 이왕이면 오늘은 좀 참고. 다음 시리즈에서 작성해줬으면 좋겠는데?”
“글쎄요. 설사 오늘은 참는다고 해도 왜 다음 시리즈죠? 내일도 있잖아요.”
세 번째.
왔다.
아마도 노린 것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
하지만 거대한 야유에 멘탈이 흔들린 탓일까? 아니, 어쩌면 그냥 단순한 실투일 수도 있다. 노리는 대로 척척 공이 다 들어가는 투수란 있을 수 없으니까. 피칭이라는 게 원래 몸쪽으로 던지려고 했는데 바깥쪽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법이다.
아무튼 바깥쪽 제법 꽉 찬 코스.
하지만 보더 라인에 걸쳤다기보다는 그래도 그보다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온 공.
좋은 공이었다.
-딱!!
치기 좋은 공.
회전이 걸린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갔다. 앞서 이정훈의 타구 때도 그랬지만 오늘 기희철이 던진 공은 두들기면 좀 뻗어나가는 느낌이다.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계속!! 계속 뻗어 나갑니다!!]
[와, 이건 진짜 큰데요?]
때리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무조건 넘어가는 타구다.
기희철이 멍하게 타구를 바라봤다.
[담장을 크게 넘어가는 타구!! 더!! 좀 더 뻗어나갑니다!!]
[61호!! 61호 홈런!! 아시아 신기록을 경신하는 61호 홈런입니다!!]
외야의 최상단.
형형색색의 잠자리채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61호.
그래, 뭐 아시아 신기록 경신이니 나름대로 의미있는 홈런볼일 것이다. 누가 주워갈지는 모르겠지만 경기 끝나고 사인이라도 한 번 해줘야겠다.
천천히 1루를 돌아 2루로.
그 사이 이정훈은 이미 홈까지 들어가 있었다.
‘응?’
외야의 소란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 뭔가 조금 더 소란스러워진 느낌이다. 설마 홈런볼을 갖고 싸움이라도 벌어진 건가?
[맙소사!! 타구가 경기장을!! 경기장을 넘어갔습니다!!]
[최수원의 61호 홈런이 장외로 떨어졌습니다!! 장외 홈런!! 장외 홈런입니다!!]
[와, 최수원 선수. 정말 항상 느끼지만 타고 났다고 해야 할까요? 항상 중요한 고비마다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직히 오늘 선발로 뛰는 경기라서 타격을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대뜸 61호 홈런을 경신하는 것도 놀라운데. 이런 의미 있는 홈런을 장외홈런으로 기록하다뇨. 한국 신기록 경신 때도 그렇고 정말 특별합니다. 정말 특별해요.]
[몇몇 관중들이 지금 홈런볼을 잡기 위해 경기장을 뛰쳐 나갑니다. 아, 저거 너무 혼잡스럽고 위험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진행요원들의 적절한 통제가 필요해 보입니다.]
3루를 지나 홈까지.
이번에도 마린스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그래, 61호 홈런.
의미 있지.
아시아 신기록 경신이니까.
“저 오늘 선발이요.”
하지만 헹가래는 57호 홈런 때로 충분했다.
흥분해서 달려 나왔던 동료들이 오늘 선발이라는 나의 말에 내밀던 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김승진이 은근슬쩍 들러 붙어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야, 너 이따 초구 속구 약속 한거다?”
“······.”
경기가 계속됐다.
***
[타석에서는 장외 투런포. 그리고 마운드에서는 2이닝 무실점. 작년에 신인이 이런 성적을 낼 거다. 뭐 그런 이야기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이게 너무 아무렇지 않다는 것에 가끔 저 스스로 깜짝깜짝 놀랍니다.]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와, 세상에 뭐 어떻게 저런 선수가 다 있나 싶어요.]
[현재 점수는 3:0. 3회 말. 마운드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