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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19화 (219/305)

219화. 그 너머에 위대한 기록(2)

“세계 기록? 그거야 배리 본즈 73개지. 그 밑으로는 마크 맥과이어랑 새미 소사인가? 야 근데 애초에 걔들이랑은 비교하면 안 되지. 메이저는 경기 숫자 자체가 162경기잖아. KBO는 그래 봐야 144경기고. 심지어 얜 투타 겸업한다고 쉬는 경기까지 있으니까. 무엇보다 걔들은 약쟁이잖냐.”

“아니, 그건 그런데. 오늘 아침에 기사 읽어보니까 50호 홈런 이후 기록으로 끊어보면 거의 1.4경기에 1개꼴로 치고 있다잖아. 그러면 남은 경기가 아직 10경기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뭐 그런 거지.”

“야, 장담하는 데 가능성 없어. 그거 전형적인 스몰 샘플의 오류다. 그냥 3홈런 4홈런씩 몰아친 경기들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어제까지로 딱 134경기.

10경기를 남겨 둔 상황에서 수원은 60홈런을 기록했다.

“아까워서 그렇지. 아까워서.”

“아까운 거야 전국민이 다 마찬가지지. 나도 솔직히 지난주에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아홉수가 너무 지독했어. 59호에서 60호 넘어 가는데 세 경기나 필요했잖냐.”

“나는 그거 아홉수도 아홉수인데 한참 타격감 좋았는데 선발 등판하고 하루 쉬고 페이스 흐트러지면서 완전 조진 게 더 컸다고 본다.”

“그것도 맞지. 안 그래도 시즌 막판이라 체력도 부족한데 이런 기록 앞두고 있으면 그냥 투수 그만 뛰고 타격만 전념해서 좀 밀어주면 안 되나? 하여간 돌대철 융통성 졸라 없어요.”

“돌대철이라니. 그래도 김대철 감독 정도면 명장이지. 마린스 창단 이후 최초 정규시즌 우승각 날카롭게 보고 있는건데.”

“명장이 다 얼어 죽었냐? 솔직히 최수원 데리고 시즌 뛰는데 10경기 남기고 우승 확정도 아니고 아직 매직넘버 3이라는 게 말이 되냐?”

“원래 야구는 전략 이런 거 큰 의미도 없잖냐. 좋은 선수 자기 기량 다 발휘하게 해주는 게 명감독이지. 그래서 야구만 감독을 헤드 코치가 아니라 매니저라고 부르는 거고.”

“그래 너 잘났다. 아무튼 진짜 최수원 그냥 타격만 시켰으면 아시아 신기록이 아니라 진짜 단일시즌 세계 기록도 세웠을 텐데. 타자 출장 안 했던 경기들이 너무 아깝다. 그거 단순히 비율로만 곱해도 벌써 72홈런이라던데. 그러면 남은 경기가 10경기니까 73홈런 쌉가능인데.”

“야구에 만약이 어딨냐? 지금 이만큼 친 것도 중간중간 쉬어줘서 된 걸 수도 있지. 솔직히 신인이라 후반 갈수록 체력도 점점 후달릴 텐데. 하반기 들어와서 투수로 등판한 날에는 홈런 하나도 못 쳤잖아. 아무튼, 73홈런은 무리겠지만 청정타자 최고 홈런인 62홈런은 경신 할 수 있겠지. 그것만 해도 그게 어디냐. 안그래?”

***

김대철 감독은 최근 자신에게 달라붙는 날파리 같은 작자들이 영 마뜩잖았다. 그는 그의 자리에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이 능력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최수원을 데리고 왜 이것밖에 못 했냐고? 젠장, 니들이 마린스에서 최수원 데리고 한번 해봐라. 이만큼이라도 한 건 내가 그나마 팀 관리 잘 해서 최수원이 쓸데없는 거 신경 안쓰고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 덕분이라고!!’

물론 그러한 자신의 속내를 어디서 외칠 수는 없었다. 결국 최수원은 곧 떠날 것이고 그는 마린스에 오래오래 남아서 감독을 해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 마린스의 선수들을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들어 마린스 선수들도 점점 사람 같아지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내년에 최수원이 빠진 이후에도 가을 야구 정도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말이다.

게다가 언론 역시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고.

“그래서 무슨 인터뷰라고 했죠?”

“최수원 선수 다큐멘터리 관련 인터뷰입니다. 넥플에서 서비스 될 예정이고요.”

“어제는 다른 분이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 인사 한 번 드렸었는데 잊으셨나보네요. 제가 총감독인 박주빈이고. 아마 감독님 찍으신 분은 촬영감독님이었을 겁니다. 저희가 예산이 좀 괜찮게 잡혀서 카메라를 좀 많이 돌리고 있거든요.”

“아아, 죄송합니다. 요즘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그래도 애들한테는 제가 최대한 협조하라고 말은 해뒀는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하, 덕분에 수월하게 잘 찍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질문 몇 가지 던질 건데 솔직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얼마든지요. 요즘 워낙에 수원이 관련해서는 말을 많이 해서 뭘 물어보셔도 막히는 거 없이 다 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김대철 감독의 호언장담에 박주빈이 씨익 웃었다.

시작은 의례적인 질문과 답변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슈퍼 루키였는데 프로에서도 이렇게 할 줄 알았느냐. 스프링 캠프에서 모습은 어땠느냐. 시즌을 치르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느냐 등등.

“그렇군요. 하지만 일각에서 말이 나오는 최수원 선수에게 타자로 전념을 하게 했더라면 훨씬 좋은 성적을 거뒀을 거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죠. 수원이의 타격에 대한 재능은 정말 터무니없는 수준이니까요. 아니, 이건 이미 단순히 재능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완성된 실력이라고 표현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수원이가 KBO에서 계속 뛴다면 발전 없는 타자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아, 당연히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푸홀스의 아름다운 10년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단한 성적을 계속해서 낼 거라는 뜻이니까요.”

“와, 타자로써 최수원 선수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계시네요?”

“눈이 달렸다면 수원이를 보는 순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전성기 배리 본즈를 제외하고 수원이만큼 압도적인 타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더 궁금해지네요. 그렇데 압도적인 재능의 타자를 대체 왜 타격에 전념하게 하지를 않고 투수를 겸임하게 하신 겁니까? 물론 투타겸업은 놀라운 도전이지만 열아홉 살에 전성기 배리 본즈를 연상케 하는 타자라면 타격에 전념하게 하는 게 맞지 않았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애초에 최수원과의 계약 조건 자체가 그랬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하는 순간에 사람이 굳이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었다.

“저는 타자 최수원은 이미 배리 본즈를 연상케 하는 완성된 타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투수 최수원은 언젠가 로켓에게 필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잠깐만요. 로켓이라면 설마 로저 클레멘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이 영 7회 투수?”

“네, 그렇습니다.”

김대철 감독도 말하고 나서 잠깐 아차 했다.

하필 예를 든 선수 둘이 모두 약쟁이다.

“아, 여기서 굳이 배리 본즈와 로저 클레멘스 예를 든 건 그 두 선수가 제가 본 가장 대단했던 선수들이라 그렇습니다.”

“오, 김대철 감독님 그 두 선수를 직접 보신 건가요?”

“네, 제가 비록 미국에 있던 시절에 빅리그에는 한 번도 못 올라갔었지만 그래도 스프링 트레이닝에는 꼬박꼬박 초대받았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아무튼,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미 완성된 타격에만 집중하기 위하여 지명타자로만 활용하기에는 그의 다른 재능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렇다고 외야 수비 훈련을 시키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요. 저는 수원이가 결국 더 큰물에 나갈 거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김대철 역시 시즌 초에 정확한 내용까진 몰랐지만, 수원에게 메이저 진출에 관련된 옵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신이 그에게 그만한 재능을 주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도 생각했고요. 시즌 초와 비교해서 최수원 선수의 타격이 더 나아졌다고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투수 최수원은 이번 한 시즌을 뛰면서 그 재능을 훌륭하게 꽃피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최수원이라는 선수의 종합적인 부분을 위해서 훨씬 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포장이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인터뷰를 계속하다 보니까 어느새 김대철 자신도 정말 내가 저런 의도였던 게 아닐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그렇군요. 지금 당장의 기록보다는 최수원이라는 선수의 장기적인 미래를 선택했다. 뭐 그런 말씀이시군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 정도면 기록에 관해서 아쉬워하는 팬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아, 혹시 어제 그 다른 분이 촬영하신 거 확인 못 하셨습니까?”

***

모순 혹은 딜레마.

사람은 종종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손에 쥔다. 뭐, 선택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다.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나머지에 전심전력으로 집중하지 않는다면 두가지 모두 다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래, 전업 타자로 뛴다면 아마 더 대단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투타겸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타격 성적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홈런이 잘 터졌다.

시즌 10경기 남긴 상황에서 60홈런.

두 번의 등판이 남았으니 타자로 출장할 수 있는 경기는 로테이션대로라면 여덟 경기. 최근에 투수로 뛰는 날에는 홈런을 못 치고 있는 점까지 생각하면 기회는 고작 여섯 번이다.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두고 많은 사람은 우왕좌왕 선택을 하지 못하다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린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버릴 것을 과감하게 버린다. 양자택일의 순간에 과감함을 발휘하여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손에 쥘 수 있다면 그건 충분히 성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내가 그랬었다. 팔이 망가진 상황에서 투수에 미련을 버리고 타격에 빠르게 집중하여 타자로 성공했었으니까.

그래, 지금도 굳이 따지자면 양자택일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남은 경기는 타자에만 집중해보는 건 어떠냐. 어차피 이제 우승은 거의 확정이라고 봐야 하고 혹시라도 홈런 3개 더 추가 못 하면 그건 그것대로 참 아쉬운 일일 테니까.”

한 시즌 62개.

리그의 차이는 제쳐 두고 지난 삶에서 그토록 쳐보고 싶었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영역이다. 심지어 63호는 그걸 넘어서는 영역이었고.

그러니까 내가 봤을 때 여기서 타격에만 집중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성공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성공은 이미 실컷 해봤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나의 목표를 ‘고작’ 성공에 두지 않아도 괜찮다.

성공을 해보니까 알겠더라.

진짜 위대한 것은 단순한 성공과 실패가 아닌 그 너머에 존재한다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은 결과적으로 보면 로마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 그는 분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을 기억하던가.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었던 위대한 한니발 바르카다.

“감독님. 남은 열 경기 전부 다 출장하고 싶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두 경기 등판은 거르고 지명타자로. 이왕이면 타순도 조정해서 1번이나 2번을 치는 건 어떠냐? 열 경기면 그래도 몇 타석은 더 돌아올거다.”

“아뇨. 등판도 전부 다 하겠습니다.”

“뭐라고?”

두 가지를 모두 고르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도 선택하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을 차별화하는 것은 거기에 덤벼들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받쳐줄 수 있는 능력이리라. 그래, 결과적으로 로마를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알프스는 넘었던 한니발처럼.

“남은 열흘은 휴식일 없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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