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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17화 (217/305)

217화. 신기록(13)

정말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홈플레이트에 도착했을 때 마린스 동료들은 그런 나의 기분을 현실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우르르 달려 나왔다.

“아, 잠깐!! 잠깐만요!!”

솔직히 무슨 헹가래냐 싶어서 일단 만류를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 분위기가 그게 만류가 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헹가래는 받기 싫다고 괜히 몸부림치면 어디 다치는 수가 있다. 내가 다칠 수도 있지만 밑에서 던져주려던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스완, 돈 워리. 돈 워리.”

아니, 아니다.

가장 앞서 달려 나온 딜튼을 보고 있자니 절대 밑에서 던져주려던 사람이 다칠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케이.”

그리고 나의 몸이 정말로 하늘로 날았다.

그래도 내 몸무게가 이제 90kg은 거뜬히 넘는데 밑에서 던지는 애들도 힘이 장사였다. 거의 무슨 아파트 2층보다 높게 몸이 뜨는 느낌이다.

공중에 붕 떴을 때 잠깐 시선을 돌렸는데 제이크 보어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뜻깊은 순간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KBO에서 홈런왕이야 여러 차례 해봤고, 심지어 MLB에서도 홈런왕을 해봤다. 그렇지만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깬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내가 뭔가 역사적인 순간에 정말 멋진 것을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가끔 그런 선수들이 있다. 잘하긴 잘하는데 밋밋한 선수. 분명 성적표를 보면 시대의 지배자인데 임팩트가 부족한 선수. 쉽게 말해 스타성이 부족한 선수라는 말이다.

물론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난 홈런 타자였으니 그래도 제법 인기가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또 스타성이 있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보통 막 60홈런 도전. 이런 거 나오면 진짜 미국 전체가 들썩인다. 단순히 야구 관련 채널만이 아니라 야구랑 관련 없는 방송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는 게 정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홈런 타자 치고는 상당히 수수한 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건 인종적인 부분을 고려해도 그렇다.

-와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지금 헹가래를 끝내고 내려 왔음에도 여전히 나를 향해 열광하는 저 관중들을 좀 보라. 물론 사직이 좀 열광적인 구장이고 마린스가 수준에 맞지 않은 팬들을 가지고 있는 건 맞지만 저 열기는 결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 분명 나의 플레이는 사람들을 크게 움직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나의 이 4연타석 홈런으로 그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결코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혹시 모른다. 누군가 데리고 온 어린 아이는 이 순간을 기억하며 야구공을 손에 쥐게 될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는 지금 내 플레이에 마린스 팬이 돼서 앞으로 한 50년 정도 고통받다가 유언으로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같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뜨는 사람이······.

쓸데없는 생각을 뒤로 집어치웠다.

그리고 지금 오직 나를 향해 환호하는 저 사람들을 향하여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와아아아아!!!

하지만 환호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거대해지는 환호성. 쉽게 잠잠해지지 않는다. 아, 이건 이 정도로 안 되겠구나 싶던 찰나. 이정훈과 이규만이 나에게 말했다.

“야, 최수원. 사람들이 너 부른다.”

“그래, 수원아. 이런 건 나가야지. 이건 경기 좀 지체되도 저쪽도 다 이해 할 거다. 혹시 엘리츠에서 그거 이해 못 하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 하고.”

“워워. 주장. 그건 이해를 못하면 물리력으로 이해를 시키겠다는 느낌인데요?”

“네, 그러면 잠시.”

밖으로 걸어 나와 모자를 벗었다. 머리가 눌려서 좀 보기 좋진 않았지만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좌측에 한 번, 우측에 한 번. 그리고 등을 돌려 홈플레이트 뒤편으로 또 한 번.

사람들의 열광 속에서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물론 여전히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노형욱이 타석으로 올라갔다.

뭔가 경기가 끝난 것 같은 열광이었는데 경기가 계속되니까 느낌이 좀 묘했다.

근데 그런 와중에 또 한 가지 정말 놀랄만한 점은 패배가 거의 확실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려 4타석 연속 홈런포를 두들겨 맞은 제이크 보어가 여전히 마운드 위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야구계에 홈런 관련 기록 중에서 특히 투수에게 굴욕적인 녀석을 찾아보자면 한만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한국의 전설적인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경험했던 최악의 기록이다.

한 이닝에 피만루 홈런 두 방.

사실 이것까지만 들으면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KBO에서도 한 번 있었던 기록이고 메이저리그도 잘 찾아보면 19세기 즈음에 한 번 정도 더 있다.

그러니 더 정확히 ‘한’ 이닝에 ‘한’ 투수가 ‘한’ 타자에게 피만루 홈런 두방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실로 터무니 없는 일이라서 아버지가 야구 이야기할 때 한 번 말하는 것 듣고는 믿지도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 최악의 기록 이야기를 굳이 지금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시는 없을 기록인 이유가 투수의 문제가 아닌 덕아웃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한 이닝에 투수가 타자 1순을 하는 상황에서 그 투수를 안 내리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무슨 어디 고전 시대에 벌투 같은 거 던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난 지금 제이크 보어가 마운드에 서 있는 것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선발 투수가 7.2이닝 동안 같은 타자에게 홈런을 4방을 맞았는데 그대로 마운드에 둔다고?

내가 봤을 때 제이크 보어에게 지금 필요한 건 심리 치료다.

솔직히 내가 마운드에서 공 던지는데 어느 타자가 4연 타석으로 홈런 쳤다고 하면 입스 와서 다시는 공 못 던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거 진짜 계속 던지려나보네.”

“못 봤나 보네? 아까 저기 코치가 마운드 한 번 올라갔었는데 제이크 보어가 자기가 더 던지겠다고 그러는 것 같더라고.”

초구.

노형욱의 헛스윙.

솔직히 이런 분위기에서는 집중이 다 깨졌다고 해도 납득이 갈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집중이 더 박살난 쪽은 마운드 위의 투수일 터.

제이크 보어가 침착하게 공을 던졌다.

“젠장······. 확실히 재수 없는 놈이지만 남자는 남자란 말이지.”

딜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름대로 라이벌 의식 같은 걸 느끼는 것 같았다. 실제로 현재 KBO의 투수 성적을 살펴보면 딜튼 역시 제이크 보어와 함께 최상위권을 마크하고 있었다. 특히 오늘 경기 이전에는 제이크 보어가 조금 앞서는 느낌이었는데 오늘 내가 박살을 내준 덕분에······. 아, 잠깐만. 딜튼이 아까 가장 먼저 달려나와서 격렬하게 헹가래를 한 게 혹시 이것 때문인가?

그 순간.

-딱!!!

노형욱이 친 타구가 높게 떴다.

하지만 뻗어나가지 못 하는 타구.

내야 뜬공이었다.

“아웃!!”

1:5

공수 교대.

마운드에 우리 팀의 마무리 박재혁이 올라왔다.

이번 시즌 평자책 1.29

내 홈런과 함께 끝난 것 같았던 경기를 정말로 끝내 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투수였다.

일루에서 수비를 보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꽂혔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삼진.

그리고

-딱!!

“마이볼!!”

어렵지 않은 내야 뜬공.

그리고 세 번째.

-딱!!

[아, 오형원. 잘 쳤습니다. 절묘한 타구!! 내야를 벗어납니다.]

[이렇게 희망의 불씨를 이어 나가는 엘리츠!! 점수는 4점 차이. 남은 기회는 단 한 번입니다.]

1루에 안착한 오형원이 자신의 보호장비를 풀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너 미국 간다며.”

“네?”

“뭘 모르는 척이야. 소문 다 났는데.”

“글쎄요. 정말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너 빼고 다 아나 보다. 너 미국 가는 거. 아무튼 뭐 시비 거는 건 아니고. 그냥 부러워서 그런다. 너도, 마린스도. 어휴, 근데 진짜 시즌 초부터 소구랑 일부터 해서 벤치클리어링에. 뭐 앙금 남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뇨, 뭐 그런 거 남길 게 있었습니까?”

“그래, 한 번 더 말하지만. 나 시비 거는 거 아니다. 그냥 눈매랑 말투 때문에 그래 보이는 거야. 아무튼 오늘 신기록 축하한다. 어휴, 진짜 우리도 우승 못한지 되게 오래 됐는데 왜 이런 놈 하나 안 오는 거야.”

오형원의 나지막한 투덜거림 속에서 이어지는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뻐엉!!

“스트라잌!!!”

***

[최수원!! 홈런!! 홈런!! 또 홈런!! 그리고 마침내 하나 더!!]

[괴물!! 한 경기 4타석 연속 홈런!! 그야말로 몰아치기의 정석!! 시즌 최다 홈런 기록!!]

[24년 만의 홈런 신기록 갱신!! 최수원 시즌 57호 홈런포!!]

─뭐냐 이거? 슬슬 다음 시리즈쯤에는 홈런 신기록 세우겠지 싶어서 인천에 원정 경기 오는 거 3경기 전부 다 외야석으로 잡아놨는데 한 경기에 홈런을 4개를 친다고? 솔직히 다음 시리즈 전 경기 예약하면서도 평균 1.5경기에 1개씩 쳐야지 신기록인데 그게 될까? 이 생각 했는데?

─쯧쯧쯧, 수원이 2홈런 3홈런도 예사로 치는데 방심하면 안 되지. 그래서 난 내일 경기 보려고 내일 아침 기차 예약해뒀지. 근데 설마 4홈런을 칠 줄이야. 이거 진짜 실화냐?

언제나 그렇듯 인터넷은 또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즌 최다 홈런 기록 경신만 하더라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는데 심지어 한 경기 4연타석 홈런. 그것도 상대가 작년의 최동원상 수상자라는 점까지. 그야말로 사람들의 트래픽을 끌어 당기기에 어느 것 하나 거를 게 없는 완벽한 이슈였다.

“아, 씹. 얘 뭐야? 다큐멘터리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신기록을 경신해버린다고?”

“멍청하기는. 그런 건 50홈런쯤 넘겼을 때 미리미리 슛 들어갔어야지.”

“야, 진작에 들어가려고 했지. 근데 조건이 협의가 안되니까 문제지.”

“조건? 왠 조건? 뭐 출연료를 너무 세게 불러?”

“어휴, 그런 거면 차라리 낫겠다. 그냥 어린놈이 돈독 올랐다고 욕 좀 하고 예산 집행 받으면 그만이니까. 그게 아니라 촬영 장비부터 인터뷰어 제한. 기타 뭐 이것 저것.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야. 게다가 하필 에이전시가 변호사라서 더 까다롭다.”

“변호사? 뭐 변호사 별 거 있어? 요즘 걔들도 워낙 많이 뽑아서 밥 먹고 살기 어렵다더만. 어차피 그거 선수 에이전시나 하는 변호사면 뻔하지.”

“대형 로펌 에이스가 붙어 있어. 게다가 경쟁자도 붙어서. 근데 그 쪽도 좀 짜증 나긴 하겠네.”

“경쟁자? 누구? MBS? 요즘 다큐에 힘 좀 주는 것 같긴한데. 에이 그래도 스포츠 다큐는 그래도 우리가 최고잖아. 경쟁이 되냐?”

“아니, 그 왜 이번에 그 암스테르담에서 상 받은 애 있잖아.”

“걔? 걔는 장르가 좀 다르지 않나? 게다가 찍어봤자 방송하려면 결국 우리나 MBS 통해야 하는데 거기도 외주 주려고 하겠어? 직접 하려고 하지.”

“OTT 통해서 서비스 할 거래. 넥플에서 50억 쐈다더라.”

“미친······. 다큐 한 편에 50억을 태운다고?”

최수원은 분명 슈퍼스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런 스타의 모습을 담아낼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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