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16화 (216/305)

216화. 신기록(12)

8회 말.

이정훈가 강라온은 분위기를 완벽하게 이어갔다.

솔직히 여기서 이정훈이나 강라온이 막 안타 치고 제이크 보어 내려가고 이러면 오히려 더 난감했을 것이다.

깔끔한 내야 땅볼.

그리고 또 내야 땅볼.

8회 말.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내가 타석으로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기대에 가득찬 눈빛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모두란 우리 덕아웃에 앉아 있는 사람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기대에 몹시 가득 찬 눈동자로.

‘와,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뭐 익숙한 시선이기는 했다.

돌아오기 전의 삶에서 미국에서 뛰던 당시에도 62번째 홈런에 도전한 적이 있었으니까. 애초에 경기장의 규모가 2배 정도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당시에도 경기장에 관중들이 가득 찼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시선의 개수는 2배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쟤들은 대체 왜 뭔가 기대하는 얼굴인거야.’

그러니까 엘리츠의 선수들.

모든 선수까지는 아니고. 어린 애들 위주로 몇몇 애들이 관중들이 보내는 것과 비슷한 종류. 그러니까 명백히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운드 위에 제이크 보어는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콧구멍이 커지고 얼굴이 상기됐다.

7.2이닝을 던진 상태였지만 절대 힘들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어라?’

근데 엘리츠의 덕아웃에서 투수 코치도 아니고 감독이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감독 입장에서도 참 갑갑할 거다. 투수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내리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나한테 맞은 홈런 세방을 제외한다면 7.2이닝 동안 피안타가 고작 세 개에 불과하다. 투구 수 관리는 또 어떤가. 7.2이닝 동안 고작 90개도 되지 않는 투구수로 이건 무조건 완투 페이스라고 봐도 무방했다. 근데 그런 투수가 하필 같은 투수에게 홈런을 3방 연속으로 쳐 맞았네?

그보다 잘 던지는 투수가 있다고 확언할 수 없으니 내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8회 말에 3점 차이로 지고 있는 경기에서 에이스에게 상대 타자를 거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심지어 그 타자가 리그 홈런 신기록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아마 지금 저건 그냥 분위기 환기다. 그리고 대충 이런 식의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을까?

‘제이크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솔직히 여기서 너 도망쳐도 욕할 사람 아무도 없어. 오히려 이런 상황까지 마운드에 꾸역꾸역 세워둔 나를 욕하겠지.’

‘감독님, 그러면 제가 던지고 싶다면 던질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네가 우리 에이스잖냐. 이 타이밍에 에이스를 안 믿으면 야구 못 하지. 우리 야구가 오늘 하고 끝날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안 그러냐.’

‘감독님,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손으로 꼭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내 예상이 맞았던 건지 제이크 보어가 엘리츠 감독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니, 저건 고개를 숙이는 수준을 넘어 거의 허리를 접었다. 하여간, 저 양반이 괜히 외국인 투수인데도 심판들한테 짬밥 대우받고 나중에 엘리츠 레전드 취급에 은퇴하고 코치까지 하는 게 아니다. 본인이 저렇게 위를 먼저 깍듯하게 챙기니까 가능한 거다.

아, 물론 나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러고 싶진 않다.

자기랑 맞는 사람이랑만 잘 지내면 되지. 뭔 위계니 서열이니 그딴 걸 굳이 따져가면서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 건지 이해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제이코 보어 저 양반도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는 꽤 예쁨 많이 받았지만 후배들한테는 그만큼 욕도 많이 먹었다. 나중에 감독까지는 못 한 것도 아마 외국인인 것도 있지만 그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엘리츠의 감독이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이크 보어가 비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확실히 엘리츠 감독이 한 가지는 성공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제이크 보어 어깨에 뽕이 가득 찼다는 것을 말이다. 뭐 대충 에이스의 자부심. 팀의 유일한 희망. 기타 등등 온갖 것들이 그에게 가득하다.

마냥 비웃을 것이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이성만이 아니다. 그게 자부심이건 책임감이건 부성애건 모성애건 아무튼 때때로 감정에 취한 사람은 실력 이상의 힘을 내기도 한다.

근데 과연 지금 그 뽕이라는 거.

과연 감독한테 주입식으로 에이스라는 말 좀 들은 제이크 보어가 더 거할까? 아니면 과장 조금 보태 전국 수천 만 명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내가 더 거할까?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초구를 준비했다.

***

마린스의 선수들이 다닥다닥 덕아웃 펜스에 붙어 경기장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중에 한 사람. 살짝 초조한 표정의 이정훈이 조유진에게 말을 건넸다.

“와, 긴장감 뭐냐 이거? 내가 당사자도 아닌데 괜히 쫄리네. 나도 이런데 수원이 쟤는 괜찮을라나 모르겠다.”

“어휴, 선배님 걱정을 마십쇼. 최수원 저 새끼 저거. 장담하는 데 지금 백퍼 웃고 있습니다.”

“여기선 얼굴도 안 보이는데 네가 어떻게 장담을 한다는 거야?”

“에이, 제가 쟤랑 지금 몇 년쨉니까. 척하면 척이죠. 게다가 예전에 그 퍼펙트 할 때도 마지막에 실실 쪼개면서 공 던졌습니다. 애초에 쟤는 뭔가 기대를 잔뜩 받으면 부담감에 힘 겨워 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천상 무대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그런 기대를 잔뜩 받으면 더 힘을 내는 그런 타입입니다.”

“그래? 하긴. 3연타석 홈런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하지.”

“그나저나 선배님. 퍼펙트는 하면 명품 시계 선물하는 건데. 홈런 신기록 이런 거는 갱신하면 뭐 안 합니까?”

“왜? 또 뭐 받고 싶어서?”

“아뇨, 그건 아니고 혹시나 해서요.”

이정훈이 조유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너도 진짜 보통은 아닌 것 같다.”

“하하, 아닙니다. 저야 수원이에 비하면 보통 사람이죠.”

“넌 칭찬 한 거 아니거든. 아무튼 퍼펙트는 투수 혼자 만든 게 아니지만, 명예는 투수가 혼자 가져가는 거라서 그런 개념으로 선물이라도 나눠주는 거고. 한 경기 4홈런 친 건 오히려 우리가 선물을 해야 하지 않겠냐? 홈런만 네 개인데 꼴랑 5타점에 5:1로 이기는 건데?”

“근데 그러면 이변 경기도 저희가 스포트라이트 수원이 혼자 다 가져가라고 양보 해준 거 아닙니까. 그 정도면 명예를 혼자 가져가게 해줬으니까······.”

-딱!!

“헛소리하지 말고 집중하자. 지금 이거 나중에 우리 해설을 하건 뭐 예능을 하건 TV 나가면 썰로 풀만한 전설적인 순간이니까.”

타석의 최수원이 평소 그대로 루틴으로 움직였다.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그대로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 손에 쥔 배트를 두 번 짧게 흔들고 그대로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정훈이 보기에 신인 치고는 개수가 묘하게 많지만 그게 또 매우 빠르게 이뤄져서 그리 길지가 않다.

‘뭐, 애초에 실력도 신인은 아니니까.’

제이크 보어의 초구.

바깥쪽 보더 라인에 걸치는 체인지업.

-뻐엉!!

최수원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0.01초.

아주 짧은 심판의 고민.

“스트라잌!!”

그래, 심판 역시 부담일 것이다.

만약 이런 중요한 승부가 오심으로 끝이 난다면 닥쳐올 비난을 과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부담은 아마 저 건방진 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어림없다. 어찌 부담이 안 될까. 홈런이라는 건 애초에 노리고 친다고 쳐지는 게 아니다. 좋은 타구를 만들려다가 보면 나오는 게 홈런이다. 그건 저 녀석이 홈런 비율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4연타석 홈런.

두들겨 맞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커다란 것만큼 지금 단순히 공을 치는 것을 넘어 홈런이 아니면 안 된다는 부담이 있는 것은 녀석 역시 마찬가지일 터.

두 번째.

절묘하게 제구된 공이 바깥쪽으로 흘러 나갔다.

-뻐엉!!

투심 패스트볼.

거의 비슷한 코스. 하지만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주 미세하게 더 빠져나간 공이었기에 아쉬움이 있었다.

[볼카운트는 1-1. 최수원 선수 쉽게 방망이를 내밀지 않습니다.]

[이주형 해설님 홈런 타자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타구질이 좋다?]

[하하, 제가 원한 답은 아닙니다만, 맞습니다. 타구질이 좋죠. 그러면 대체 왜 타구질이 좋을까요.]

[글쎄요? 잘 쳐서?]

[비슷합니다. 정답은 칠 수 있는 공을 강하게 쳐서입니다. 보면 홈런 타자들의 경우 볼넷이 참 많죠. 이번 시즌 최수원 선수의 경우 고의 사구가 좀 많긴 했습니다만 이게 결국 투수도 홈런 타자에게는 좋은 공을 내주지 않으려고 하는 거고. 홈런 타자는 그러면 걸어 나가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굳이 그런 공을 안 치는 걸로 출루율을 확보를 하는 거거든요.]

[아, 그렇군요.]

[하하, 몇몇 분들께서는 왜 뻔히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지금 최수원 선수가 처한 딜레마가 나오는 거거든요. 홈런을 치려면 나쁜 공을 거르고 좋은 공을 강하게 쳐야 하는데 결국 그건 볼넷으로 나가면 좋다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최수원 선수는 4타석 연속 홈런. 그리고 57호 홈런을 노리는 입장에서 어떻게든 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 할 거란 말이죠.]

[나쁜 공이 와도 방망이를 휘두를 수밖에 없다. 뭐 그런 말씀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공 두개를 그냥 보낸 건 좋은 공을 기다려보겠다 그런 느낌인데. 과연 볼 카운트가 쌓여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뻐엉!!

비슷한 코스.

심판의 손이 또 올라오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제이크 보어 선수 역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같습니다.]

볼카운트 2-1.

네 번째.

이번엔 기습적으로 찔러 들어오는 몸쪽 깊숙한 코스.

-뻐엉!!

너무 낮았다.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3-1.

지금까지 고의 사구를 내주려고 할 때마다 사직의 관중들은 아낌없는 야유를 퍼부었었다. 하지만 지금 3구 연속 볼에는 야유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최수원의 역사적인 기록을 앞두고 그 집중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지금 마운드에 선 제이크 보어가 고의 사구로 최수원을 내보낼 의사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 어쩌면 그 둘 모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섯 번째.

바깥쪽 코스.

존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절묘한 투심.

최수원의 방망이가 그 공을 두들겼다.

-딱!!!

제이크 보어가 웃었다.

역시다.

이 녀석 볼넷으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 꾹 참던 빠지는 공에도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렇다면 쉽다. 방금 몸쪽 포심 이후 바깥쪽 투심으로 유인했으니 여기서 비슷한 코스 체인지업으로 한 번 더 속여본다. 헛스윙 삼진. 뭐, 그게 아니더라도 땅볼 유도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아니, 운이 좋다면 안타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4연타석 홈런은 절대 없을 것이다.

제이크 보어가 앞으로 있을 승부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리고 최수원이 방망이를 내던졌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터무니없는.

실로 우레와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거대한 함성이 제이크 보어의 귓청을 강하게 때렸다.

‘설마······.’

그가 고개를 돌렸다.

우측 담장 폴대에 가장 가까운 곳.

색색깔의 잠자리채들로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한 경기 4연타석 홈런.

그리고 시즌 57호 홈런.

최수원이 너무 담담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24년 만의 신기록 경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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