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신기록(11)
제이크 보어는 무너지지 않았다.
103마일의 구속이 92마일이 될 때까지 그는 참 많은 일을 경험했다. 시간은 그에게서 태어날 때 하늘이 쥐어주었던 빛나던 재능을 앗아 갔지만 그는 그 재능이 사라진 자리를 경험이라는 것들로 아득바득 채워 넣었으니 그 가운데는 어지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어지간함을 넘어 포기 할 수밖에 없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어지간함을 넘어서지 않았다.
6회 말 원아웃에 4실점.
점수는 1:4
제이크 보어는 꾸역꾸역 공을 던졌다.
비록 최수원에게 3연타석 홈런을 허용했지만, 그는 여전히 좋은 투수였다. 그의 절묘한 체인지업에 노형욱이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이규만이 타석에 섰다.
홈런을 친 직후 수원이 녀석이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직 하나가 남았다.
참으로 맹랑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3연타석 홈런으로 KBO 역대 최다 홈런과 타이를 기록해놓고 아직 한 타석의 기회가 더 남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니. 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어야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초구를 준비했다.
망설임이 전혀 없는 피칭.
-뻐엉!!
“스트라잌!!”
보더라인에 걸쳐 들어오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규만 자신이 설정해둔 존은 명백히 벗어나는 공이었다.
사실 젊었을 적에는 어른들이 10년만 젊었으면 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40대 초반이 되어 보니 알겠다. 정말 10년, 아니 딱 5년만 젊었어도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공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규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떻게든 나가야지.’
오늘 마린스의 공격이 말 공격인 상황에서 수원이에게 네 번째 기회라는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다른 누군가가 출루에 성공해서 8회 말에 또 한 번 타석을 주던지, 그게 아니면 엘리츠에게 역전을 당하던지.
후자의 경우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 당연히 누군가는 출루에 성공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수치겠지.’
3연타석 홈런.
고조된 분위기.
하나를 더 친다면 KBO 역대 최다 홈런 갱신.
그런데 3번 타자가 4번째 타석 기회를 받지 못한다? 본인은 3번 다 홈런을 쳤는데?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굴욕이 될 것이다.
물론 이번 시즌 오늘처럼 수원이만 뻥뻥 친 경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도가 다르다. KBO 최다 홈런 갱신에 관하여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가 될 텐데 거기에 ‘최수원 선수는 엘리츠와의 1차전에서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만 마린스의 다른 타자들이 8이닝 동안 모두 합쳐서 고작 2출루 하는 데 그치는 바람에 3번 타자에게 4번째 타석 찬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나레이션이 들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체인지업이었다.
조금 전 투심보다 덜 움직이지만 그래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세 번째.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1-2.
기다리자.
투수는 신이 아니고 결국 실투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네 번째.
몸쪽 높은 코스 매우 깊숙하게 날아오는 빠른 공.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이었다.
하지만 실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절묘한 코스다. 이규만이 설정한 존은 벗어나지만 스트라이크 콜을 받기에는 충분한 공이다. 최근 들어 이런 공에 손을 안 대는 것을 선택하기 시작한 이규만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런 소극적인 승부를 할 수는 없었다.
-딱!!!
이규만의 방망이가 공을 두들겼다.
까다로운 코스로 들어오는 공이였지만, 타고난 감각과 오랜 시간 쌓아올린 기술이 그것을 억지로나마 쓸만한 타구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난 채로 수비하던 오형원이 그 공을 가볍게 받아냈다.
이규만이 1루를 향해 뒤뚱뒤뚱 달렸다. 본래도 느렸던 발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본래의 느림이 그리울 만큼 형편없이 더 느린 발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규만은 그 나이 또래에 평범한 사람보다는 빠를 것이다. 어쨌거나 평생 운동을 해온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또래라고 해도 제대로 각 잡고 일 년 정도 달리기를 연습한다면 어지간하면 이규만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 지금 그의 몸은 그만큼이나 엉망이었다.
-뻐엉!!
“아웃!!!”
거의 세 걸음.
뭐 아쉬움을 표하기도 힘들 만큼 압도적인 아웃이었다.
마린스의 마운드에 곽재영이 또 올라왔다.
서른다섯.
사실 요즘 스포츠과학의 발달로 서른다섯이면 좀 꺾여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은퇴를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라는 느낌이 있다. 실제로 저기 이규만 같은 경우 무려 마흔둘에도 어쨌거나 리그 평균 이상의 타자로 풀시즌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투수는 좀 다르다. 물론 어릴 때부터 관리 잘 받은 애들이야 삼십 대 후반까지도 쌩쌩하게 던지기도 하고 그런다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라던가.
외부에서 볼 때 프로에서 더 많이 던진다는 것은 혹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던지는 선수들은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어딘가가 찢어지고, 아프고, 문제가 생기는 건 나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던지는 순간에는 그거 잘 모른다. 그냥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구나. 지금 기회에 눈도장을 콱 찍어보자. 뭐 그런 마음이다.
젊은 시절의 곽재영 역시 그러했다.
후회 하느냐고?
그래, 후회한다. 특히 저기 브레이브스 출신 불펜 3인방을 볼 때면 더 후회가 된다. 커리어만 따지자면 곽재영의 커리어가 저들에게 뒤질 게 없다. 전성기만 보면 훨씬 대단하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은퇴 할 때까지 FA 한 번 못 하는 곽재영 본인에 비하여 저들은 불펜으로만 커리어를 이어 왔음에도 30대 초반에 FA를 한번 씩은 받아낼 수 있다. 아마 총 연봉만 따진다면 10배도 넘게 차이가 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곽재영은 사직의 마운드 위에서 흉터 투성이의 어깨를 쭉 폈다.
어쩌겠는가.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 그저 지금이 내일 그토록 원하게 될 어제라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갈 수밖에.
‘우선은 하나.’
아프지 않게.
컨디션 좋은 날의 그것을 재현하기 보다는 평소 컨디션으로 아프지 않게 던지더라도 그러한 회전축이 나올 수 있도록.
두 가지 종류의 슬라이더와 속구.
앞선 이닝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풀린 덕분일까? 아니 어쩌면 1:2라는 점수가 1:4라는 점수로 더 벌어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피안타 하나.
그리고 삼진 하나.
잔루 1루로 추가점 없이 1이닝 삭제.
곽재영이 오늘 주어진 자신의 몫을 충실하게 해냈다.
내일의 자신이 어제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경기가 계속됐다.
***
“쫄깃하네.”
“그러니까. 아니, 근데 보통 이런 상황이면 4연타석 홈런이 가능할까? 정말 오늘 신기록이 달성될까? 이런 걸로 쫄깃해야 하잖아. 근데 왜 네 번째 타석 기회를 받을 수 있을까로 쫄깃한거냐?”
“그것이 마린스니까. 그리고 솔직히 난 수원이 지금 폼이면 네 번째 기회만 받으면 그대로 무조건 넘길 것 같은데.”
“야, 솔직히 그건 장담 못 하지. 홈런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프로선수도 고교 투수들 상대로 10할은 절대 불가능 하거든?”
“그야 그냥 프로선수면 그렇겠지. 근데 난 수원이가 프로 MVP 타자고 지금 프로리그 다른 투수들이 그냥 고등학교 투수 정도 되는 느낌이야.”
-뻐엉!!
“스트라잌!! 아웃!!”
제이크 보어가 사울 로페즈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저게 그냥 고등학교 투수 정도로 느껴진다고?”
“어······. 고등학교 MVP급 투수?”
“멍청인가? 고교 MVP급 투수면 그냥 프로 레벨 투수라는 소리잖아.”
분명 다른 타자들을 저렇게 수월하게 잡아내는 걸 보면 급이 다르다.
7회 말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145를 오가는 구속을 뽑아내는 제이크 보어는 자신이 어째서 작년 최동원 상을 수상한 투수였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번 시즌도 거기에 가장 가까운 투수 중 하나인지를 유감 없이 증명했다.
[아, 대타!! 마린스 덕아웃에서 서경준 선수 대신 정지운 선수를 올립니다.]
[확실히 타율만 따지자면 정지운 선수가 2푼 정도 더 높긴 합니다. 게다가 오늘 제이크 보어 선수 투심과 체인지업이 너무 좋은데 아무래도 우타자보다는 좌타자 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있겠죠.]
김대철 감독 역시 강력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수가 멱살을 잡고 강제로 끌어가는데 최소한 거기에 맞춰가려는 노력은 보여줘야 했다. 정말로 여기서 마린스가 최수원에게 네 번째 타석을 제공하지 못 한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다.
-딱!!
정지운이 제이크 보어의 초구를 밀어쳤다.
제법 빠른 타구.
김대철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지운!! 쳤습니다!! 빠른 타구!!]
그리고 엘리츠의 유격수 오형원이 움직였다.
2010년대부터 20년대까지. 하필 그와 경쟁했던 이들이 모두 MLB에서도 성공할 만큼 압도적인 유격수들이었던 탓에 항상 저평가받았던 비운의 2인자.
오늘 사직의 2, 3루 간을 지키는 그는 그야말로 철벽과 같았다.
“아웃!!”
화려함과 간결함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한 것 같은 수비.
제이크 보어가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랬다.
마린스의 야수들부터 감독까지 모두가 단순한 오늘 경기의 승패가 아닌 최수원의 네 번째 타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 마운드에 선 저 투수와 유격수만큼은 최수원이 만들어내는 대기록이 아닌 오늘 경기의 승패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점수는 1:4
아직이었다.
충분히 역전할 수 있다.
그리고 타석에 마린스의 8번 타자 이주혁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역시 저 엘리츠의 투수와 유격수와 비슷했다. 마린스의 다른 선수들이 최수원의 세 번째 타석을 생각할 때 이주혁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못 치면 2할 2푼도 깨진다······. 그리고 유진이보다 타율 올라가려면 3타석 연속 안타 쳐야 하는데······.’
그에게 누군가의 위대한 기록이나 오늘의 승패와 같은 중요한 것을 살필 여유 따윈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일단은 내가 살고 봐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야구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일지도 몰랐다. 복잡한 전략과 전술이 경기를 결정짓는 다른 구기 종목과는 다르다. 결국 야구의 본질은 투수와 타자의 1:1 승부. 모든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경기 막판에 이르러 터무니없이 높은 집중력으로 제이크 보어가 공을 뿌려댔다. 그래, 분명 10번 정도 승부를 한다면 높은 확률로 이주혁은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할 만큼 대단한 공이었다.
하지만 그게 20번이 되고 30번이 된다면?
적어도 한 번.
그러니까 이주혁이라는 타자가 그 깔끔한 폼으로 쳐낸 강력한 타구가 내외야의 수비를 뚫고 필드에 떨어질 확률은 분명 존재했다.
-딱!!!
내야를 넘어 외야 깊숙한 곳.
이주혁이 달렸다.
아마 최수원에게 찬스를 주겠노라 생각했다면 1루에서 멈춰도 상관 없었으리라. 아니, 이주혁의 빠른 발을 고려한다면 그건 아쉽다. 2루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주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이프!!!”
3루타.
이주혁이 자신의 빠른 발로 3루타를 만들어냈다.
정말 톡 하고 안타 하나만 쳐주면 그대로 추가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만한 상황.
하지만 7회 말에 마린스에게 추가점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9번 타자 조유진.
마린스의 주전 포수로 뭔가 여기서 대타를 내밀기도 상당히 애매한 남자.
그가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그럼에도 김대철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최수원의 타석은 무조건 돌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