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14화 (214/305)

214화. 신기록(10)

제이크 보어는 벌써 프로 생활만 14년 째였다.

103마일까지 던지던 단단한 팔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이제는 고작 92마일 남짓이 한계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어떻게 찾아낸 보금자리이며 어떻게 쌓아 올린 커리어인가.

그의 장식장 가장 가운데에는 작년에 받아냈던 최동원상이 떡 하니 놓여있다. 실로 역동적인 자세의 동상으로 이 트로피만 보더라도 상의 시발점이 됐던 최동원이라는 투수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이던가.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순간, 엘리츠는 자신을 알아봐 주었다. 열정적인 관중들과 충분한 급여. 훌륭한 문화까지.

그는 자신이 아직 던질 수 있을 때 이 훌륭한 팀에 꼭 우승 트로피를 건내고 싶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외국인이라는 태생적인 벽을 넘어 엘리츠라는 팀에 가장 위대한 역사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훈이 타석에 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타자였다. 그리고 예의가 뭔지를 아는 훌륭한 후배이기도 했다. 녀석이 눈을 한번 맞추고 슬쩍 눈웃음을 보였다.

-끄덕.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인사를 받아줬다.

이게 바로 KBO의 장점이다.

팀을 떠나서 여러 선수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수가 있다.

노는 걸 좀 좋아하는 것 같기에 시즌 중에 놀지 말고 비시즌 중에 몰아서 놀라는 좋은 충고를 했더니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시즌이 끝났던 지난 겨울에는 술자리에 몇 번이나 함께 하자고 권했다. 심지어 거기에 더하여 세 번 얻어 먹으면 한 번은 사는 미덕까지 발휘했으니 선배로써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사적인 친분은 여기까지.

승부는 승부다.

세 번째 타석.

슬슬 타이밍이 눈에 익을 시간이었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포심과 투심 위주의 피칭을 보여줬다면 이제는 체인지업을 더 적극적으로 섞는다.

공 세 개.

모두 존 안으로 넣는 적극적인 피칭을 보인 결과 볼카운트는 0-2.

네 번째.

살짝 걸치는 체인지업을 노리고 던졌다.

투심과 거의 같은 궤적에 타이밍만 한 박자 늦다. 들어오는 공을 적극적으로 커트하며 실투를 노리는 이정훈을 잡아내기 충분한 공이다.

물론 날아간 공은 그가 원하던 것처럼 보더라인에 걸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복판에 조금 더 가까운 공.

이정훈의 방망이가 한 박자 빠르게 투심의 타이밍에 맞춰 움직였다. 됐다. 이걸로 타이밍은 완벽하게 뺏었다.

내야 땅볼. 혹은 헛스윙 삼진.

이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최수원이 예전에 보여줬던 것처럼 방망이를 잠시 멈칫거렸다가 휘둘러서 안타를 만드는 묘기는 불가능했다. 그런 힘없는 타구를 외야까지 날려보내는 건 이정훈에게는, 아니 보통의 타자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정훈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하, 야. 공이 막 뒤에서 잡아 당기는 것처럼 들어오네? 오늘 저 양반 체인지업이 아주 미쳤는데?”

“그래요? 수원이가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 친 게 첸졉 아닌가?”

“야, 저 양반 체인지업은 오늘 미친거고. 최수원 방망이는 항상 미친건데 그게 비교꺼리나 되냐? 아무튼 세 번째 타순이라고 체인지업 위주로 좀 바꾼 것 같더라.”

“그러면 속구를 포심보다는 투심 위주로 던질 테니까 투심을 노려봐야 겠네요.”

“노릴 수만 있으면 나쁘지 않지.”

대기 타석에서 걸어 나오던 강라온과의 짧은 대화.

덕아웃에서 최수원이 대기 타석으로 올라왔다.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대기록을 앞뒀음에도 딱히 얼굴에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KBO 최초 퍼펙트 하던 날에도 저랬었다. 뭐랄까? 당연히 맡겨둔 것을 찾아가는 것 같은 담담함이랄까?

이정훈으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사실 하다 못 해 컴퓨터 게임과 같은 작은 것도 클리어를 앞두고는 긴장을 하기 마련일 텐데 저런 담담함이라니.

‘아니, 어쩌면 저게 저 녀석에게는 클리어가 아니라 스테이지 1 첫 번째 퀘스트 클리어 정도의 감흥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이정훈이 서둘러 얼굴에 쾌활함을 담았다.

“아깝네. 진짜 거기서 투심 들어 왔으면 무조건 홈런포였는데.”

“그럴 땐 무게 중심 조금만 더 뒤로 잡아 당기는 느낌으로 쑤욱 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참고할게.”

물론 참고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저 녀석 저렇게 종종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해주는데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건 꾸역꾸역 어떻게든 따라가는 조유진이나 이주혁 같은 놈들이 대단한 거다.

아니, 어쩌면 이정훈 자신이 그냥 새로운 뭔가를 하기에는 이제 나이가 너무 먹은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던 대로 쭉 해온 결과가 4년 42억이라면 그냥 하던 대로 더 열심히 하는 게 정답이라고 믿는다.

-딱!!!

그리고 그 타이밍에 강라온이 제이크 보어의 투심을 잡아 당겼다.

2, 3루 간을 꿰뚫는 안타.

원아웃에 주자 1루.

최수원이 세 번째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섬뜩함을 느꼈다.

앞서 두 타석 연속 홈런을 허용해서일까?

아니면 주자를 내보냈기 때문일까?

아니, 아니다.

그것은 지금 타석에 들어온 타자가 보여주는 무형의 무언가였다.

아마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것을 그저 위대한 재능이 보여주는 아우라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연배에 따른 서열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인지하는 제이크 보어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분위기는 절대 재능 넘치는 애송이의 도전이 아니다. 그것은 넘치는 재능을 불살라 무언가를 만들어낸 거장이 보여주는 아우라.

그래, 오직 닳고 닳은 베테랑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더 가까웠다.

***

슬슬 마음이 쿵쾅거린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 쿵쾅거리는 마음을 가라 앉혔다.

기록은 세울 수 있을 때 세워야 한다.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그러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다.

특히 홈런에 관한 기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오기 전 마지막 시즌 나는 하나의 홈런을 치지 못했다.

61개.

훌륭하다.

하지만 그 61번의 훌륭함은 거기에 1을 더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잃어 버렸다. 아마 그때 내가 62호 홈런을 쳤더라면 아무리 녀석이 투타 겸업을 그렇게 멋지게 해냈다고 해도 MVP를 따내는 건 나였을 것이다.

그래, 고작 하나의 차이였다. 아니, 아니다. 그 하나에는 결코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하나야말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선수와 위대한 선수.

스타와 슈퍼스타를 가르는 것은 그 단 하나에 있다.

이번 시즌에 아직 남은 경기는 많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가 58개 이상의 홈런을 치는 것은 이미 확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괜찮을까?

3천 안타는 훌륭한 기록이다. 하지만 데릭 지터의 3천 안타는 훌륭함을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데릭 지터라는 선수가 슈퍼스타였기 때문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였다.

슈퍼 스타가 3천 안타를 쳤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3천번째 안타를 특별하게 만들었기에 그는 슈퍼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대는 이미 완벽했다.

작년 리그 최고의 투수상을 받았던 에이스.

2연타석 홈런.

홈 구장.

고조된 분위기.

그야말로 차려진 밥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걸 걷어차고 그냥 시즌 홈런 신기록으로 만족을 한다고?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공을 준비했다.

초구.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

-뻐엉!!

자세를 풀지 않은 채 투수를 바라봤다.

두 번째.

이번에도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

이번에도 자세를 풀지 않은 채 제이크 보어를 바라봤다.

-우우우우우

사직 구장.

나를 응원하기 위해 모여든 팬들의 야유가 상대 투수를 자극했다.

하지만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넘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가벼운 한숨.

잠시 자세를 풀어 루틴을 수행하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네 번째.

빠진다.

훌륭한 타자라면 어쩔 수 없으니 볼넷으로 걸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훌륭한 타자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거기서 한 걸음 정도 더 나아가도 괜찮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일부 팬들이 말했던 것처럼 ‘테드 윌리엄스 이후 가장 위대한 타자’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부웅!!

“스트라잌!!”

[4구째!! 아······. 헛스윙. 헛스윙입니다. 최수원 선수의 헛스윙!! 제이크 보어 선수가 최수원 선수의 스윙을 끌어냈습니다. 볼카운트 3-1.]

침착하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턱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또 던져 봐.’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관중들로 꽉 찬 경기장이 고요했다.

네 번째로 끝날 수 있었던 승부가 나의 의지로 인하여 강제로 연장됐다.

다섯 번째.

마음이 흔들린 투수가 공을 뿌렸다.

좋은 컨디션의 투수가 항상 최고의 공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나쁜 컨디션의 투수가 항상 최악의 공을 뿌리는 것이 아니다.

제이크 보어가 던진 공의 로케이션은 매우 훌륭했다.

바깥쪽 낮은 코스. 보더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들어오는 공.

아마도 존에서 빠지게 던지려던 공이 살짝 안으로 몰린 게 아니었을까?

휘두르지 않는다면 스트라이크.

쳐봤자 어지간하면 안타로 만들기 힘든 훌륭한 코스였다.

그렇기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강하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딱!!!

공이 날았다.

빠르고 강하게.

저 하늘 높은 곳으로.

[쳐, 쳤습니다!! 강한 타구!! 넘어 가느냐!! 넘어 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홈런!!! 최수원 홈런입니다!! 시즌 56호 홈런포!! 3연 타석!! 최수원이 KBO 타이 기록을 3연 타석 홈런으로 만들어 냅니다!!]

[맙소사!! 아니, 이걸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 내다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볼넷으로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거든요. 하지만 난 걸어서 1루까지만 갈 생각이 없다. 홈까지 걸어가겠다. 최수원!! 최수원 입니다!!]

내 홈런에 흥분한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기장 여기저기서 내지르는 뭐라뭐라 알 수 없는 괴성들이 섞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그 거대한 감정의 격류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 미친 새끼!! 기어코 여기서 56호를 때리네.”

“으아!! 최수원 이 미친 놈아!!”

“야, 다리 잡아. 다리 잡으라고!!”

덕아웃의 동료들이 당장 헹가래라도 칠 것 같은 기세로 모두 달려 나왔다.

“잠깐, 잠깐만요.”

“아니,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이건 솔직히 쟤들도 인정 해줄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하나 남았잖아요. 지금 이러고 이따 또 이러면 뻘쭘하잖아요. 흥분 가라 앉히시고. 이따 합시다. 이따가. 오늘 설마 야구 이대로 끝낼 생각이에요?”

“뭐?”

경기는 아직 6회 말에 원 아웃.

8회 말까지 단 한 명의 타자라도 출루에 성공한다면 나에게도 네 번째 찬스가 돌아온다.

그래, 아직 위대함까지는 한 걸음이 부족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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