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신기록(9)
수많은 잠자리채 사이로 젊은 남자 하나가 야구공을 손에 쥐고 포효했다.
[최수원 선수의 시즌 55번째 홈런!! 담장을 크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입니다!!]
[와, 이 선수는 진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엄청나요. 너무 엄청나서 도저히 엄청나다는 말보다 더 엄청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네요.]
[4회 말, 경기는 이제 0:2. 아직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마린스가 2점을 앞서 나갑니다.]
[오늘 경기 제이크 보어 선수도 정말 잘 던지고 있는데도 쉽지가 않습니다.]
경기가 계속됐다.
두 번째 홈런 탓일까?
제이크 보어가 흔들렸다.
-딱!!!
노형욱의 이루타.
그리고 이어지는 이규만의 볼넷.
원아웃에 주자 1, 2루.
타석에 사울 로페즈가 올라왔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0.263/0.317/0.411로 일반적으로 용병 타자에게 기대하는 타격과는 매우 거리가 먼 타격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몇몇 마린스 팬들은 당장 용병을 갈아 치워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사울 로페즈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았다. 이건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야와 외야를 가리지 않고 평균, 혹은 평균 이상을 해줄 수 있는 전천후 유틸리티는 지금 마린스에는 너무나도 필요한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로페즈의 마음은 느긋하지 않았다.
곧 있으면 다가올 재계약 때문이었다.
물론 팬의 의견이 그의 재계약을 결정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년 최수원이라는 괴물이 빠진 이후를 생각해보면 마린스에 필요한 것이 공격력인지 수비력인지는 명확해진다.
지금 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메이저에 도전해볼 수 있을까?
이번 시즌 사울 로페즈의 연봉은 30만 달러.
거기에 아파트와 생활비는 덤이었다. 그는 메이저에서도 잠깐 뛰어봤지만 풀타임으로 메이저에서 뛰지 않는 이상 이만큼 벌긴 어렵다.
3년.
그래, 지금까지 모아둔 돈에 3년만 여기서 더 뛸 수 있다면 고향에 돌아가 적당한 농장 하나 정도는 너끈히 살 만큼 돈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마운드에 선 170만 달러짜리 투수가 그를 힐끔 바라봤다.
까다롭긴 하지만 아주 어려운 투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제이크 보어는 전형적인 하위 리그의 학살자형 선수로 하위 리그에서는 터무니없는 성적을 내지만 빅리그에 올라가서는 평균 이하의 성적을 내는 그런 선수다.
반면 사울 로페즈 자신은 비록 이런저런 상황으로 한정된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메이저급 타자였었다. 물론 마이너 옵션을 모두 소진했고 그 결과 DFA만 두 번을 거쳤지만, 현재 기량만 따진다면 여전히 40인 언저리를 오가며 팀 사정에 따라서 메이저 콜업을 기대해 볼 만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 제이크 보어는 최수원에게 두 타석 연속으로 홈런을 허용한 이후 명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울 로페즈가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를 노려봤다.
너를 밟고 조금 더 여기서 뛰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그래, 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당장 메이저 커리어만 봐도 사울 로페즈 쪽이 훨씬 훌륭하다. 제이크 보어가 그보다 나은 점은 나이가 좀 많다는 것. 그리고 그 많은 나이 만큼 한국에 조금 일찍 왔다는 것 뿐이다.
그 눈빛에 제이크 보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울 로페즈는 그것 역시 기꺼웠다. 제이크 보어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감정적 동요를 끌어낼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으리라.
초구.
91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
그리 빠른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케이션이 너무 좋았다. 바깥쪽으로 꽉 찬 코스.
-뻐엉!!
“스트라잌!!”
아니, 조금 전까지 흔들리던 녀석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두 번째.
비슷한 코스.
하지만 확실히 더 안쪽으로 몰렸다.
-딱!!!
사울 로페즈의 방망이가 그 공을 때렸다.
투심이었다.
구속에 차이가 거의 없는.
하지만 조금 더 떨어지고 조금 더 몸쪽으로 파고든다. 휘두른 방망이의 힘이 공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1루 쪽으로 흐르는 내야 땅볼.
다행히 타구의 방향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타자 주자나 1루 주자 가운데 하나는 살아남아 병살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1루 주자가 리그에서 가장 느린 이규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공을 잡은 1루수가 2루에. 그리고 2루수가 다시 1루 커버를 나온 투수에게 공을 뿌려 더블아웃을 노려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오늘 엘리츠는 달랐다.
[1루수 공을 잡아 그대로 투수에게!! 제이크 보어의 훌륭한 커버!! 제이크 보어가 2루로 공을 뿌립니다!!]
[이규만!! 다시 1루로 귀루를 시도해봅니다만 피하지 못하네요.]
“아웃!!”
[더블 아웃!! 이닝이 종료됩니다.]
[선행주자가 아닌 타자 주자를 먼저 잡다니 방금은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그렇죠. 이게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야구는 뒤에 오는 주자에게 베이스를 양보를 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방금 같은 경우 이규만 선수는 무조건 2루로 가야 하는 상황인거죠. 이때 공이 2루에 먼저 도착을 하면 굳이 타자를 터치하지 않더라도 아웃. 그리고 다시 1루로 송구를 하면 마찬가지로 타자 터치 하지 않아도 아웃이거든요. 하지만 방금 전처럼 1루에서 먼저 포스아웃을 시켜버리면 2루는 태그 아웃을 꼭 해야 합니다. 게다가 보통 주자가 2루로 달리는 거랑 타자가 1루로 달리는 거 당연히 전자가 훨씬 빠르거든요.]
[하지만 방금 엘리츠의 판단은 훌륭 했어요. 사울 로페즈 선수의 빠른 발과 이규만 선수의 느린 발. 물론 3-4-1 병살도 가능은 했을 것 같습니다만 방금은 3-1-4쪽이 더 안전했다고 봅니다.]
제이크 보어가 바닥에 한 차례 침을 뱉었다.
“사울이라고 했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거야. 너 한국에 왔으면 선배에 대한 존중을 배울 필요가 있겠어.”
“What?”
“그리고 한국말도 얼른 배우고. 벌써 반 년이 지났는데 이 정도도 못알아 들어서야. 쯧.”
두 명의 미국인이 만났는데 한 미국인이 상대방은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말로 말을 거는 실로 기묘한 광경.
심지어 그 내용도 가관이다.
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라.
세계에서 한국만큼 이 문장을 강압적으로 사용하는 곳이 또 있을까.
제이크 보어 역시 미국에 있던 시절에는 그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격언 정도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문장의 사용법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제이크 보어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르고. 한국에 왔으면 한국 법을 따라야지.
4회 말.
점수는 0:2.
제이크 보어 34세.
그보다 세 살이나 어린 사울 로페즈가 감히 보냈던 오만불손한 시선이 홈런 두 방으로 가라앉던 그를 살려냈다.
최수원에게는 참으로 기꺼운 일이었다.
***
93개.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5회 초 피칭을 끝냈을 때 투구 수였다.
그는 재작년까지 불펜으로만 뛰던 투수였다.
선발로 풀타임을 뛴 것은 작년이 처음.
그리고 아직 선발로 마운드에 오를 기회가 두세 차례 남은 현재. 그는 벌써 작년 이상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일단 불펜에 몸 풀라고 연락만 넣어둬.”
시즌 초반에 있었던 브레이브스와의 트레이드로 마린스의 불펜은 매우 강력해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진 필승조에 국한한 이야기다.
분명 마린스 불펜의 시즌 평자책은 3.43으로 리그 2위였다. 하지만 박재혁, 고설민, 태지완으로 이어지는 필승조를 제외한다면 평자책은 무려 5.17로 솟구친다. 그야말로 반박이 불가능한 압도적인 리그 꼴찌.
‘1, 2점. 아니 3, 4점만 더 내줬더라면······.’
0:2로 이기고 있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상대가 최근 연패로 기세가 좋지 않은 엘리츠임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필승조를 사용하기에는 그들 역시 최근의 연이은 등판으로 지친 것이 눈에 보이는 상황.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호투를 이어갔다.
엘리츠의 공격은 참 길게 이어졌는데 반하여 마린스의 공격은 너무나도 단촐하게 끝이 난다.
-딱!!
초구 내야 뜬공 아웃.
‘서경준이도 이제 서른다섯인가? 확실히 방망이 속도가 못 따라가고 있어······.’
그리고 이어지는 이주혁의 타석.
그는 조유진과 함께 운동 능력으로는 팀에서 1, 2위를 다투는 사나이였다.
다만 조유진이 터무니없는 타격폼으로 저건 대체 어떻게 저런 폼으로 안타를 만들고 심지어 홈런을 치는 거지? 하는 의아함을 준다면 이주혁은 호쾌한 폼으로 진짜 제대로 터지면 대박일 것 같은데 하는 기대감을 준다.
물론 문제는 그게 항상 그냥 기대감에서 그친다는 점이었지만.
수비는 그래도 불안불안한 가운데 종종 로또가 터진다지만 공격은 항상 기대하게 하는데 도무지 터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시원한 두 번의 헛스윙.
그리고
-뻐엉!!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루킹 삼진.
“에라이, 똥볼에는 방망이 막 휘두르고 정작 들어오는 공은 그냥 보내고. 쟨 진짜 수비 하는 것도 그렇고 혹시 공이 아예 안 보이는 건가?”
“설득력이······ 있다?”
5회 말.
고작 공 네 개만에 투아웃.
그리고 타석에 조유진이 들어왔다.
특유의 상체를 내민 폼이 참으로 우스웠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마린스의 팬들은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은 저딴 폼으로 담장을 넘긴 포텐셜을 지녔다고.
심지어 그 나이 이제 고작 열아홉 살.
최수원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에 가려 그렇지 저 녀석도 괴물인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딱!!
깔끔한 유격수 정면 땅볼.
다만 그런 와중에도 고작 한 걸음 정도 차이로 아웃 됐다는 것으로 조유진이 자신의 탁월한 신체능력을 증명했다.
5회를 끝낸 상황에서 투구 수는 고작 49개.
그야말로 효율의 극치.
완봉도 그리 어렵지 않은 페이스였다.
마린스의 김대철 감독이 아쉬움을 삼켰다.
‘아냐, 우리 팀에서 뛰었으면 저렇게 맞춰 잡는 피칭 절대 못 했지. 그리고 아마 평자책 1점은 족히 올라갔을걸?’
6회.
마침내 투구 수 100개를 넘긴 사울 로페즈가 기어코 한 방을 두들겨 맞았다.
-딱!!!
엘리츠의 1번 타자 강소구의 아슬아슬한 홈런포.
그의 시즌 2호 홈런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게 솔로 홈런포였다는 점이다.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
점수는 이제 1:2.
“재영이 지금 올리자.”
“네.”
지난 선발 등판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곽재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주 6일 경기하는 KBO에 6선발 체제를 할 수는 없는 노릇. 불펜으로 마운드를 오르기 시작한 곽재영은 매우 심각한 기복을 보여줬는데 그의 나이와 그리 좋지 못한 구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5.1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고 마운드를 넘겨준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젠장······.’
조금 더 효율적으로 던졌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오히려 점수를 더 내줬을지도 모른다.
-딱!!!
그래, 저런 식으로······.
에러는 아니었다.
하지만 노형욱의 글러브가 타구를 잡아내지 못했다.
2루타.
그리고 이어지는 볼넷.
원아웃 주자 1, 2루.
반대편 엘리츠 덕아웃의 제이크 보어가 흥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발!! 진짜 한 번은 좀 이기자. 어?’
그리고 그의 그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아니면 곽재영의 노련함이 빛을 발한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마린스에서 그나마 좋은 수비를 보여주는 강라온 쪽으로 타구가 흘렀고 오늘 1루를 지키는 최수원의 포구가 이규만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했다.
더블 아웃.
추가점 없이 이닝 종료.
엘리츠의 타선을 꽁꽁 막아내던 2선발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마운드를 내려간 상황에서 점수는 1:2.
어쩌면 오늘 경기 역전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채 170만 달러짜리 투수가 여섯 번째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6회 말.
마린스의 타선은 1번부터 시작이었으며 최수원은 마린스의 3번 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