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신기록(8)
2027년.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벌써 2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에는 변질된 유교전통을 사랑하는 유교 탈레반들이 그득하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뜬다. 남북전쟁 이후 아메리카 연합국이 망한지도 근 16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부 딕시들은 꼰꼰함을 과시한다.
그리고 여기 그 두 가지 전통을 한 곳으로 긁어모은 사내가 있었다.
제이크 보어.
텍사스 출신. 그는 레드넥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정통 남부 딕시였다. 그리고 거기에 한국의 변질된 유교 탈레반적 꼰대 문화를 약 4년에 걸쳐 완벽하게 흡수하며 그야말로 완전체로 성장했다.
‘저 위아래도 없는 새끼가 진짜?’
홈런을 치고 타구를 감상해도 되는 건 MLB를 기준으로는 7년 차 이상. KBO를 기준으로는 9년 차 이상이다. 아, 왜 KBO는 2년을 더 뛰어야 하냐고? FA 취득까지 2년이 더 걸리는데 타구 감상도 당연히 2년 더 걸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진짜 저건 무조건 빈볼 하나 쎄게 줘야 하는데 문제는 저 녀석이 투수라는 점이다. 그것도 100마일짜리 공을 뻥뻥 던져대는 투수. 시즌 초에 하나 던졌다가 팀에 강소구가 보복구 맞고 멍 빠지는데 거의 한달이 걸렸다.
게다가 벤치 클라이밍에서는 또 어땠는가.
무릇 선비의 나라 한국의 벤치 클라이밍이라면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미국과 달라야 하는 법이다. 폭력이 아닌 위계와 질서에 따른 대화로 해결한다. 그리고 끝나고 함께 회식할 장소까지 정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의 벤치 클라이밍 아니던가?
‘저 무식한 놈 때문에······.’
딜튼 도일리
미국에서 온 괴물.
야구 실력이 괴물이라는 게 아니다. 저건 무슨 벤치 클라이밍 전문 요원도 아니고 사람을 퍽퍽 내던지는데, 오죽하면 몇 안 되는 미국 인맥을 통해 대체 뭐하던 놈인지까지 알아봤었다. 주니어 레슬링 주 대표였다나?
느릿느릿.
녀석이 꼴 보기 싫은 속도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외야석에 가득한 저 알록달록한 잠자리채들이 짜증났다. 여긴 분명 홈그라운드인데 원정 경기 이상으로 짜증이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이크 보어는 작년 최동원상의 수상자이자 KBO에서 가장 강력한 선발이었다.
이어지는 노형욱.
이번 시즌 지금까지 무려 2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커리어하이를 갱신할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타자를 상대로 2구째 내야 뜬공 아웃.
제이크 보어가 1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매번 같은 패턴이네. 아니, 무슨 쟤들은 수원이 말고는 야구를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야, 너무 그러지 마. 수원이가 너무 쉽게 홈런 빵빵 날려서 그렇지 제이크 보어 이번 시즌 평자책이 2점 초반대야. 이게 에이스급 투수들 상대로도 수원이가 너무 잘해서 저렇게 보이는 감이 좀 있지. 용병 에이스들에 임광형에 조창혁까지. 아마 최수원이 평자책 0.3점씩은 올려줬을걸?”
“에이, 그게 말이······. 되네. 최수원이 홈런으로 임광형 평자책을 0.43을 올려놨네······.”
“이번 시즌 투고타저라는 말이 싹 들어갔지? 내가 분석 칼럼 읽어봤는데 그것 자체가 최수원 효과라는 말이 있더라고. 그러니까 에이스들은 정면 상대를 좀 해주니까 최수원이 날아다니고, 하위 선발들은 수원이 피해 다니는 만큼 다른 팀원들이 혜택을 본다? 뭐 그런 분석이던데 꽤 그럴싸해 보이더라.”
경기가 빠른 템포로 이어졌다.
오늘 경기에서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엘리츠 선수들에게 작년 마린스가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체 저걸 어떻게 공략해야 하냐?’
컨디션 좋은 날의 에이스급 투수가 마음의 각오까지 남달랐다.
그야말로 압도.
그리고 그를 맞상대하는 제이크 보어 역시 한강에서 맞은 뺨을 종로에서 완벽하게 해소했다. 2회 삼자범퇴. 그리고 3회에도 삼자범퇴.
물론 경기의 내용은 조금 달랐다.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3이닝 동안 삼진을 무려 다섯 개를 뽑아냈다면 제이크 보어가 뽑아낸 삼진은 두 개가 전부였으니까.
[제이크 보어, 오늘도 상당히 효율적인 피칭을 이어갑니다. 3회가 끝난 시점에서 투구수가 고작 26개. 평속은 조금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점점 야구 도사가 되어 간다는 느낌이에요.]
[반면 디에고 로드리게스 선수는 지금까지 투구 수가 51개네요. 보통 이닝당 15개 정도를 평균으로 보는 걸 고려해보면 조금 많은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해설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역시 양 팀의 수비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번 시즌 투타 양면에서 모두 최강자급의 포스를 뽐내는 마린스였지만 여전히 수비는 구멍이 컸다.
올스타급 수비수라고 할만한 선수는 유격수인 강라온 정도뿐이다. 셋이서 번갈아가면서 맡고 있는 2루의 경우 사울 로페즈를 제외한다면 간신히 사람 구실을 하는 수준이었고 3루의 노형욱은 이제 슬슬 이규만이 은퇴한 이후 1루로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외야의 경우도 많이 괜찮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나마 이정훈 정도가 준수할 뿐이다. 이주혁의 로또성은 여전히 투수들의 불안 요소였으며 우측 외야의 서경준 역시 준수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디에고 로드리게스!! 경기 여섯 번째 삼진!! 3-2 풀카운트에서 과감하게 몸쪽으로 공을 찔러 넣었습니다.]
그 결과 마린스의 투수들은 본인이 직접 해결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다만 그 직접 해결하는 것도 사람마다 좀 차이가 있었다.
최수원의 경우 커맨드가 특별하게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존 안에 공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컨트롤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카운트가 좀 몰리면 그냥 ‘KBO 수준에서는 160짜리는 어지간하면 못침.’이라는 마인드로 복판에 공을 좀 집어 넣는 편이었고 그게 제법 잘 통했다.
하지만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경우는 전력으로 공을 던지면 존 안에 공을 넣을 확률이 7, 8할 정도밖에 안 되는데 덕분에 카운트가 몰렸을 때 전력으로 던진 공이 완전히 한복판에 들어가거나 혹은 바깥으로 빠져서 볼넷을 주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뻐엉!!!
[아,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오늘 경기 세 번째 볼넷!! 4회 초 투아웃. 주자는 이제 1, 2루.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결국 득점권에 주자를 보냈습니다.]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등을 돌려 뒤편에 놓여있던 로진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젠장.’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조유진이 마운드로 올라왔다.
“디에고. 깔마또. 유어 볼. 엘 메곳. 미. 엘 메곳. 마린스 에브리 필드 플레이어. 엘 메곳. 크레엣. 오케이?”
짧은 단어였음에도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였다. 심지어 어설픈 영어까지 섞여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의미는 분명하게 전해졌다.
‘그래, 내 공은 최고고. 지금 내 공을 받는 저 포수 녀석도 제법이다. 뭐 마린스 수비수들은······. 아무튼 내 공을 믿고 던지자.’
엘리츠와의 경기.
모든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겠다는 결심은 첫 경기 노 디시전으로 깨졌다.
그 대신 모든 경기에서 패배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두 번째 경기에서 깨졌다.
이제는 뭐 결심하기도 두려운 세 번째 게임.
4회 초. 투아웃.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경기 71번째 공을 던졌다.
-딱!!!
높게 뜬 타구.
오형원이 미간을 찌푸린 채 방망이를 내던지고 달렸다.
어차피 투아웃 상황. 1루와 2루 주자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고개를 돌렸다.
내야를 벗어나 외야로.
평범한 뜬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야구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마린스에 평범한 뜬공이란 없다는 것을.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그 긴장감 속에서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눈에 누군가 가볍게 달리는 것이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타구의 방향은 좌측 외야. 그리고 오늘 좌익수는 이정훈이었다.
평범한 외야뜬공을 정말 평범한 외야뜬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귀한 인재.
불가능한 수비를 가능하게 만들고, 가능한 수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주혁만큼 쫄깃한 맛은 없었다. 그냥 당연히 외야수라면 있어야 할 곳에서 당연히 외야수라면 해야 할 수비를 했다.
[이정훈이 가볍게 잡아내며 4회 초 엘리츠의 공격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4회 말.
다시 마린스의 공격.
선두 타자는 강라온.
수비 부담이 가장 큰 유격수인데도 불구하고 노형욱 다음으로 빠따가 좋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알려 준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선수 역시도 대기 타석에 선 최수원을 보고 있자면 그냥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쟤한테 뭘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지난 이닝.
최수원에게 살짝 요령이 없는지 물어봤었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터무니 없었다.
“아, 비결이요? 딱히 없긴 한데······. 솔직히 저거 투심이랑 포심은 좀 구분하기 어렵거든요. 근데 제 기준에서는 어차피 공 자체가 좀 느려서 보고 휘둘러도 안 늦더라고요. 형욱 선배님이나 규만 선배님이면 살짝 빗맞더라도 힘으로 날려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보고 치면 된다니.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투심과 포심의 궤적은 다르다. 그 두가지 미묘한 궤적이 머릿속에서 얽히며 혼선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중간중간 섞여 들어오는 체인지업은 또 어떤가. 공 자체가 느리다고? 최고 150에 가까운 공이다.
참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하던 대로 했다.
존을 좁히고.
쳐낼 수 있는 공만을 노렸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보더라인에 절묘하게 들어오는 포심이 스트라이크로 이어졌다.
젠장.
146km/h짜리 공이 저렇게 완벽하게 제구되어 들어오는 건 반칙 아닌가?
강라온이 투덜거리며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기 타석에 있던 그 녀석이 움직였다.
경기장이 끓어오른다.
외야를 가득 채운 알록달록한 잠자리채가 흔들렸다.
그래, 146km/h짜리 공이 저렇게 완벽하게 제구되어 들어오는 건 반칙이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들어가는 저 녀석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반칙이었다.
최수원이 타석에 섰다.
[자, 앞선 타석에서 솔로 홈런포를 날렸던 최수원 선수의 두 번째 타석입니다.]
[KBO 홈런 신기록 경신까지 앞으로 단 3개. 뭐 남은 경기가 무려 열아홉 경기. 종전 기록과 똑같은 133경기로 한다고 해도 여덟 경기나 남은 상황에서 고작 3개를 남겨둔 상황이니 신기록 경신이야 당연하겠습니다만 지금 경기장을 가득 메운 저 관중들이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이번 시즌에 우리 수원이 3홈런 경기가 무려 두 번이나 있었거든. 두 번을 했는데 세 번을 못 하겠어? 딱 그렇게만 해도 KBO 타이 기록이잖아? 근데 수원이가 또 뭔가 간질간질할 땐 항상 해준단 말이지? 내가 볼 때 오늘 한 경기 4홈런 기록 세우고 KBO 신기록 간다.”
“아, 그건 모르겠고. 진짜 분위기가 이번에 고생해서 서울 올라온 보람은 있다. 오늘 못 치더라도 이번 엘리츠랑 시리즈에서 경신하겠는데?”
홈런 신기록까지 단 세 방.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공을 던졌다.
몸쪽 높은 코스
조금 깊숙했다.
-뻐엉!!!
최수원이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
“쏴리.”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미안하다며 모자를 벗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가 어딘가. 동방예의지국 아니던가. 후배가 싸가지가 좀 없다고 선배도 막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수원 역시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 괜찮지 않았지만 이제 곧 괜찮아질 예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딱!!!
외야의 잠자리채들은 이번에도 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