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신기록(7)
“오래간만입니다. 이진승 감독님. 고려 일보 공재호입니다. 어떻게 미국 생활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공기자님. 아니지, 아니지. 이제는 공팀장님이시지. 아무튼 오래간만입니다. 미국 생활이야 뭐 이것저것 배울 게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바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그만큼 보람이 있어서 버티고 있습니다.”
“하여간 선수 시절도 그렇고 참 대단하십니다. 팀의 연장계약 제의도 뿌리치고 그대로 미국에 지도자 연수를 가시다니. 현역 시절에도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안 나는 일을 척척 하시더니 그건 은퇴 이후에도 변함이 없으시네요.”
고려일보 스포츠팀 팀장인 공재호의 스마트폰 너머, KBO의 전설적인 타자였던 이진승이 멋쩍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연장계약 제의야 구단에서도 예의상 해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 생활 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거든요.”
“어휴,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 한계를 느낀 거라니 정말 선수로도 감독으로도 이진승이라는 사람은 스케일이 다르네요. 게다가 야구 공부는 한국에서도 징그럽게 많이 하셨잖습니까.”
“그게 한국에서 공부한 것만으로는 도저히 충족시키기 어렵겠다 싶더라고요. 아무튼 예전에 이미 한번씩 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려고 굳이 이렇게 거창한 문자로 약속을 잡으신 건 아닐테고······. 역시 최수원 선수 때문인가요?”
“하하, 정신없이 바쁘시다더니 그래도 한국 야구는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계셨나 봅니다.”
“에이, 뭐 체크라고 할 게 있나요. 인터넷만 켜면 온통 그 친구 이야기뿐인데요. 이번에 임광형이 상대로 한 경기만에 홈런 세 개를 몰아쳤다면서요.”
“네, 심지어 그 이후로 지금 고작 다섯 경기 만에 홈런 세 개를 더 추가했습니다. 124경기만에 벌써 홈런만 53개입니다.”
공재호의 이야기에 이진승이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거 홈런 신기록 무조건 나오겠는데요?”
“하지만 좀 아쉽지 않으십니까? 이진승 감독님의 기록이 24년 만에 깨지는 건데요.”
“글쎄요. 솔직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경기 숫자도 144경기로 늘어났겠다 어차피 언젠가 깨질 거라면 이렇게 시원하게, 그것도 외국인 용병이 아니라 한국인 후배에게 깨지는 쪽이 더 낫겠다 싶더군요. 뭐, 인종차별이나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NPB에 홈런 신기록이 네덜란드 출신의 용병 타자가 갖고 있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거든요. 게다가 아시아 야구리그 최다 홈런이라는 타이틀도 좀 그렇고······. 아무튼 이왕 이렇게 치는 거 발렌틴의 60홈런 기록까지 깨줬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다. 아예 애런 저지의 62호 홈런까지 넘어서 63호를 쳤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인터뷰는 그 후로도 제법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공재호는 오늘 기사의 제목을 이미 결정 지었다.
[이진승 “최수원 시원하게 61호, 아니 62호, 63호까지 달려 봐라.”]
***
아주 먼 옛날.
미국 사람들은 ‘디마지오가 오늘도 안타를 쳤습니까?’를 인사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야구라는 종목의 인기가 미국의 나머지 모든 스포츠를 합친 것보다 몇 배 더 높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약 100년이 흘러 2027년의 가을.
나머지 모든 프로 구기 종목의 총 관중수를 합쳐도 야구의 총 관중수를 따라올 수 없는 한국에서는 이러한 말을 마치 일상처럼 내뱉고 있었다.
“수원이 오늘도 홈런 치겠지?”
심지어 최수원의 경기가 열리는 잠실이 아닌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고척에서 조차 말이다.
“야,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잠실을 갔어야지. 고척에 와서 최수원 경기는 대체 왜 묻냐?”
“아니, 그래도 내가 12년 브레이브스 팬 외길 인생. 의리가 있는데······.”
“아, 그래서 의리가 있는 놈이 몸은 고척에 있지만, 스마트폰 영상은 잠실을 틀어 놓는 거야? 솔직히 그냥 잠실에는 표 못 구해서 여기 온 거 아니야?”
“······. 암표 존나 비싸더라. 무슨 외야석이 테이블석 가격이야. 내가 진짜 아무리 최수원 홈런이 궁금해도 도저히 그 돈 주고는 못 가겠더라.”
“잘했어, 잘했어. 지금 어차피 거기 가도 야구 제대로 보지도 못해. 저기 잠자리채 좀 봐라. 어휴, 진짜 21세기에 홈런볼 잡아보겠다고 잠자리채가 웬 말인지.”
스마트폰으로 잠실의 경기를 보고 있던 그들의 이야기처럼 마린스와 엘리츠의 경기가 열리는 그곳에는 외야에 잠자리채를 들고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니, 말이 좋아서 잠자리채지. 그건 거의 대형 어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훈 선배님 저기 외야 잠자리채로 알록달록한 것 좀 보십쇼. 아니, 진짜 야구를 보러 온 건지, 공 으러 온 건지 모르겠는데요?”
“지운아, 저건 양반이다. 지지난 주인가? 어떤 미친놈은 다다음 주 화수목 경기 좌측 외야석 혼자서 다 살 수 있냐고 문의했다고 그러더라.”“아니, 그거 완전 또라이 아닙니까? 아니, 상식적으로 그게 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리고 진짜 그렇게 해서 수원이가 홈런 신기록 갱신한 거 그 사람이 챙긴다고 해도 홈런볼 가격보다 티켓 값이 더 나올 것 같은데요..”
“모르지. 미국에서는 옛날에 배리 본즈 경기에 실제로 그렇게 했던 사람도 있다더라고.”
“대박······. 그래서 그 사람은 성공했답니까?”
“아니, 700홈런 노리고 그 짓거리 했는데 본즈가 이주나 빠르게 700홈런 쳐버려서 망했다던데?”
“그것참 쌤통이네요.”
저 알록달록한 대형 잠자리채들의 숫자만큼이나 잠실 야구장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조금 들떠있었다. 마치 축제를 앞둔 것 같달까? 물론 당장 현재 홈런 숫자는 53개로 아직 신기록까지는 4개나 더 필요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외야의 분위기는 그래도 모른다에 더 가까웠다.
임광형을 상대로 한 경기 3홈런을 몰아쳤던 최수원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수원이 에이스급 투수들을 상대로 특히 더 강력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최근의 경우, 특히 신기록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상대 팀에서 자동고의사구로 내보내는 것을 점점 어려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현장에 잠자리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경기의 승패보다 최수원의 ‘홈런’만을 바라는 팬이 늘어난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오늘 경기의 상대인 엘리츠의 경우 8위로 아직 가을 야구의 가능성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일 뿐. 사실상 가을 야구 진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인 상황이었다. 최수원과 제대로 정면 승부를 해줄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자자자!! 다들 파이팅하자!!”
“파이팅!!!”
엘리츠의 유격수 오형원이 모두에게 기합을 넣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지난 달, 오랜 시간 팀의 중심 타자였던 라찬명이 부상으로 시즌아웃 되고 곧바로 이어진 연패로 엘리츠의 분위기는 완전히 죽어버렸다. 오형원은 분명 리그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격수였지만 아직 엘리츠 그 자체인 라찬명을 대신하여 클럽하우스 리더 자리를 맡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오늘 마린스의 선발은 2선발 투수인 디에고 로드리게스.
작년 엘리츠에서 141.2이닝 2.87의 호성적을 올렸음에도 재계약에 실패. 최초 계약 조건에서 피닉스와 함께 유이하게 허용됐던 마린스로 적을 옮긴 남자였다.
그는 이번 시즌 85만 달러라는 몸값 이상의 활약을 꾸준히 보여줬지만 정작 시즌 시작 전 본인이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엘리츠에게 만큼은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약속은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기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번 시즌에 엘리츠와 겨루게 될 마지막 기회였다.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작년 재계약에 실패한 것은 100만 달러라는 적지않은 금액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1년 동안 141.2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던 이닝 소화능력에 의문부호가 더 컸다.
그리고 9월 현재.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지금까지 26경기 152.1이닝을 소화하며 그 의문부호를 지우는 데 성공했다. 그가 그만큼 이닝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할 정도로 로테이션을 지켰던 마린스 덕아웃의 공로도 컸다. 하지만 그보다는 커리어 내내 불펜으로만 뛰던 그에게 선발 전환 1년 만에 이닝 이터의 면모를 기대했던 엘리츠의 조급함이 더 컸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마지막 기회 앞에서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다.
삼진, 안타. 그리고 커터를 활용한 땅볼 유도.
“아웃!!”
그가 깔끔하게 1회 초 엘리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엘리츠의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제이크 보어.
올해 4년 차의 용병 투수로 작년 최동원상 수상자이자 사실상 KBO 최강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였다.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공을 뿌렸다.
***
-딱!!!
빠른 타구.
코스는 제법 좋았다.
하지만 엘리츠의 유격수인 오형원은 생각보다 쉽게 타구를 처리했다.
“아웃!!!”
[상당히 좋은 타구였습니다만 오형원의 멋진 수비!! 1회 말, 엘리츠가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두 개를 쌓아 올립니다.]
내야 땅볼로 물러난 강라온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뭐, 나름대로 오형원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었으니 그가 돋보이는 상황이 영 마음에 안 들 것이다.
[자, 1회 말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외야석에 관중들 호응이 정말 엄청납니다. 이건 뭐 거의 축제예요.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역시 야구의 꽃은 홈런이구나 싶습니다.]
제이크 보어의 나이도 이제 서른셋.
물론 아직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14년 전 드래프트 되던 시절에 최고 103마일을 던지던 그의 현재 최고 구속이 고작 93마일이 된 것은 누적된 부상의 여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라는 놈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에 더 가까웠다.
147.9km/h
8월 이후 그가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었다. 그의 최고 구속보다 거의 2km/h에 가깝게 느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성적은 여전히 KBO 최정상급의 그것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좋아지기까지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포심의 구속은 느려지는데 내 기준에서는 싱커, 그리고 본인 말에 따르자면 투심이라는 또 다른 속구의 구속은 거의 느려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마운드의 제이크 보어가 나를 강하게 노려봤다.
그래서 나도 뭐 어쩌라는 마음을 듬뿍 담아 함께 노려봐줬다.
[제이크 보어, 초구 와인드업!!]
부드러운 피칭폼.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두 가지의 속구와 체인지업.
예전에도 한 번 말했다시피 녀석은 KBO를 기준으로는 모두 플러스피치 이상인 공만 세 가지를 던지는 투수다.
-딱!!
그리고 그 세 가지 공은 MLB를 기준으로는 모두 평균에 미달하는 공이다.
타구가 담장을 살짝 넘어갔다.
[우중간!! 밀어친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아!! 짧은 잠자리채를 든 관중분이 홈런볼을 잡았습니다!! 옆에 작은 잠자리채를 든 아이는 아들인가요? 두 부자가 굉장히 즐거워하네요.]
[하하, 저도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에 다녀봐서 잘 아는데 저 나이 때에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에 와서 이런 이벤트를 경험하는 건 쉽게 잊기 힘든 추억이죠.]
[이주형 위원님은 파울볼 한 번 잡아본 게 전부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냥 파울볼이 아니라 대형 파울홈런이었습니다. 충분히 기억에 남을만한 이벤트였죠.]
시즌 54호.
신기록까지 이제 단 세 발.
아직도 나를 바라보는 제이크 보어의 눈동자에는 불길이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