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신기록(6)
“진짜 수원이가 난놈은 난놈이야. 거기서 또 3홈런을 몰아쳐 버리네. 이거 완전 그거 아니야. 56홈런 기록 제대로 갈아치우겠다는 거.”
“하긴 확실히 나도 좀 찝찝하긴 했어. 133경기 56홈런 기록을 144경기에 갱신한다는 거.”
“근데 수원이는 선발로도 뛰어서 실제 타자로 뛴 경기 수도 적은데 경기 수 가지고 따지는 건 좀 어이없긴 해.”
“야, 세상에 어디 어이 없는 게 한둘이냐?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빠와 함께 까도 따라 오는 법이고. GOAT 되려면 그런 트집도 다 클리어 해야 하는 법이다. 메시 봐봐. 결국 월드컵 들어 올리니까 다 정리 되는 거. 수원이도 그냥 133경기 전에 57홈런 치고 끝내면 다 해결될 거야.”
“그야 그렇겠지만······. 솔직히 오늘이야 피닉스가 상대라서 멍청하게 정면승부를 해주니까 홈런을 좀 쳤는데 남은 경기는 또 모르잖아. 게다가 133경기까지면 딱 14경기 남은 건데 이게 되려나 싶기도 하다.”
“아까 네가 수원이가 난놈은 난놈이라고 말해놓고 그걸 또 못 믿냐? 노히트에 퍼펙트에 KBO 온갖 기록은 다 갈아치우는 놈이야. 내가 봤을 때 무조건 133경기 안에 57홈런 친다. 게다가 앞으로는 좀 편해지지 않겠어?”
“편해지다니? 왜?”
“아니, 그렇잖아. 홈런 신기록 향해서 이렇게까지 달려왔는데 여기서 거른다고? 진짜 농담 아니고 야구장에 불 지르는 사람 나올걸? 예전에 홈런 신기록 도전할 때도 8회인가? 누가 한 번 걸렀다가 비슷한 일 있었거든.”
“아 그래? 근데 뭔가 새삼 이렇게 직접 보니까 133경기 56홈런도 대단한 기록이네. 막 일본이나 메이저에서 60개 넘게 까고 이러니까 좀 적어 보였는데 말이야······. 수원이가 133경기에 56호 까면 11경기 더 하면 60개 충분히 넘게 까는 거 아니야?”
“글쎄, 산술적으로는 그렇지. 근데 경기 숫자가 많으면 휴식일도 그만큼 더 빡빡하고 시즌도 길어지는 거니까. 물론 우리 수원이는 그런 거 상관없이 잘 칠 거임.”
오늘 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26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홈런 신기록까지 10개가 남은 상황이었다.
일부 언론이나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이야기하는 133경기에 기록을 깨는 게 아니면 별표를 넣어야 한다는 몰상식한 이야기를 떠나서 경기당 평균 0.5개 이상의 홈런을 쳐야 한다는 것. 그것도 시즌 막판에 그걸 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팬들 역시 ‘혹시나’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원은 한 경기에 3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것으로 그런 팬들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
경기 직후.
오늘의 MVP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당연히 3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팀이 낸 4점 가운데 4타점 3득점을 기록한 내가 그 주인공이었다.
“오늘 무려 3개의 홈런을 몰아치면서 시즌 50호 홈런의 고지를 밟으셨는데요. 최수원 선수. 일단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다혜.
일각에서는 야구 여신이라고 불리는 스포츠 전문 채널의 아나운서로 확실히 일반인 사이에 서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미모였다.
“우선 오늘 3개의 홈런을 몰아치면서 50홈런을 달성하셨는데요. 유독 임광형 선수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임광형 선수. 커리어로보나 이번 시즌 성적으로 보나 만만한 선수가 아니거든요. 혹시 뭔가 비결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우선 제가 타자로도 투수로도 경기장에 서는 입장에서 임광형 선배님은 정말 대단한 투수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투수로서의 제 커리어가 임광형 선배님을 따라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광형 선배님이 유독 저에게 피홈런이 많아 보이는 이유는 그냥 저를 안 피하고 승부하는 투수가 얼마 안 돼서 그런 겁니다.”
인터뷰가 이어졌다.
사실 뭐 그리 대단히 깊이 있는 인터뷰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몇 분짜리였고. 여러 개의 질문에 모두 답을 하려면 상대방도 거기에 재차 질문하기는 어려웠으니까. 게다가 질문도 전체적으로 좀 별로였다.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점점 차올랐다.
그리고 그때 쪼유가 등장했다.
시원한 포카리 스웨트가 가득 든 바케스를 들고 말이다.
인터뷰가 평소보다 좀 짧고 빠르게 끝이 났다.
***
“야······. 어지간하면 물로 좀 하지. 굳이 포카리로 하고 그러냐 찝찝하게.”
수훈선수 인터뷰 때 가끔 나오는 게토레이 샤워였다.
메이저에서는 종종 나오기도 하고 아나운서한테 좀 튀어도 관대하게 넘어가는 편인데 한국은 좀 깐깐해서 어지간하면 팀에서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난 말렸다. 쪼유 저게 아주 신나서 혼자 오버한 거야.”
“수원아, 이거 문제는 안 되겠지?”
“뭐? 아나운서한테도 좀 튈 뻔 한 거? 그거 내가 몸으로 막아줬잖아.”
“그렇기는 한데. 요즘 아무리 도와주는 거라도 막 그렇게 여자 몸에 동의 없이 접촉하면 문제 되고 그러잖아.”
덕분에 쪼유 이 멍청한 놈은 포카리를 뿌리는데 제대로 뿌리지도 못해서 2/3 정도는 나에게 그리고 나머지 1/3 정도는 아나운서에게 향하는 방향으로 뿌려버렸다. 나올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은 하는데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리고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아나운서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분 나쁠 일이다.
“글쎄다······. 내가 경험해본 바로는 그건 쪼유 너처럼 생겼을 때 좀 문제가 되는 거고. 저기 하민이나 여기 수원이. 그리고 나처럼 생긴 경우에는 여자들이 오히려 좋아하지.”
“······. 정훈 선배. 선배도 좀 잘 생기신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하민이 형이나 수원이랑 비교하시는 건 양심이 좀······.”
“뭐, 인마?”
“아니, 솔직히 선배가 우리랑 다니니까 잘생기신 거지 하민이나 수원이랑 다니시면······. 아니, 잠깐만. 설마 그래서 요즘 저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까?”
“······.”
내가 몸으로 막았다고는 해도 아나운서의 옷 여기저기에 좀 튀기는 했는데, 게토레이랑 다르게 그래도 포카리는 투명한 색에 가까워서 크게 티는 나지 않았다. 게다가 표정을 보니 그리 기분 나쁜 표정도 아니었고.
“아무튼 별 문제는 안 될 것 같아. 워낙에 순간적으로 막는 게 그림이 좋아서 오히려 홍보가 되면 됐지. 게다가 끝나고 수원이한테 다혜가 번호 주는 것 같던데? 그 정도면 이야기 끝난 거지.”
***
쏟아지는 물벼락과 그걸 막아서는 남자.
미남과 미녀였기에 더욱더 그림이 좋았다.
“아니, 오늘 수원이 50홈런 친 날인데 무슨 이딴 기사가 자꾸 상위로 올라오고 그러는 거야? 이거 조작 아니야?”
“수원 오빠 야구 잘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잖아. 그리고 원래 사람들은 시청률 30% 찍은 드라마보다 시청률 30% 찍은 드라마 주연 배우 열애설에 더 흥미를 갖게 돼 있어요. 언니도 잘 알잖아.”
“아니, 그거야 배우 열애설이니까. 게다가 이까짓게 무슨 열애설이라고.”
“열애설은 아닌데 솔직히 보긴 좋네. 그나저나 전다혜 이 여자도 좀 작정하고 나간 것 같은데? 봐봐. 이게 평소 인터뷰 할 때 영상인데 오늘 되게 신경 썼네. 확실히 수원 오빠가 마스크가 좋긴 좋아.”
이세희가 그 사이 인터넷에서 찾아낸 사진 몇 개를 비교해가며 박은진에게 들이밀었다. 확실히 옷부터 화장까지 좀 기합을 단단히 준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봐야 수원이는 신경도 안 쓸텐데 뭐.”
“어머, 이 언니 좀 봐? 아주 큰 일 날 사람이네. 남자들이 여자 화장 뭐 바뀐지 잘 모르고 그러기는 하는데 그래도 예쁜 거 안 예쁜 건 귀신같이 알아봐요. 내가 볼 땐 이 여자 오빠한테 백퍼 꼬리 친다. ‘오호호호 고마워요. 이거 협찬받은 옷이라 곤란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제가 보답으로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 이러면서.”
“시즌 막판이야. 홈런 신기록도 코 앞이고. 리그 우승도 달려있고. 그런 것만 신경 쓰기도 바쁠 텐데 수원이가 잘도 그 여자 만나러 나가겠다.”
“수원 오빠가 아무리 바빠도 밥이야 먹겠죠. 그 여자가 오빠 시간 맞춰서 같이 밥 먹으러 나가면 어쩌려고요.”
박은진의 눈이 또 한 번 화면 속의 전다혜를 훑었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 여자 수원이 스타일 아니야. 게다가 나이도 너무 많잖아. 스물다섯이면 거의 아줌마지.”
“언니, 진짜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원래 남자는 항상 이십 대 중반 여자를 좋아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는 연상을 나이 좀 먹으면서는 또래를. 그리고 나이 많이 먹으면 연하를 좋아하는 거고요. 내가 볼 땐 수원 오빠도 굳이 그냥 나눠 맞으면 될 걸 저렇게 스킨십에 몸까지 던져가면서 막아준 거 보면 관심 좀 있는 것 같은데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세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뭔가 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게. 그냥 물에 좀 맞게 내버려 두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오버해가면서까지 막아주는 거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댓글들도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남선녀라느니.
역시 잘생기고 예쁜 것들은 끼리끼리 논다느니.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들인가.
저 여자 어디가 예쁘다고. 키 크고, 팔 다리 길고, 머리 작고, 눈코입 올망졸망하긴 하지만······.
“세희야,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이세희가 박은진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참 솔직한데 솔직하지 못한 언니라니까.’
***
멀티 홈런을 쳐서 그런가?
여기저기서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졌다.
당장 내일도 경기가 있는데 이거 일일이 연락 받아주다가는 컨디션 조절이 안되겠다 싶어서 그냥 전화를 꺼버렸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이거 어차피 하루 이틀 지나면 또 잠잠해진다.
시리즈 2차전.
“야, 좀 살살 하자. 너희 어차피 이제 4경기 차이잖아. 남은 경기도 몇 경기 안 되는데 거의 우승 떼놓은 당상인데.”
“어차피 꼴찌각인데 막판에 고춧가루 뿌리던 놈들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기억 안 나냐?”
“하하······. 그때 그건 내 의도가······.”
피닉스는 필사적이었다.
마린스가 창단 이후 첫 정규시즌 우승을 노리는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피닉스 역시 지난 2018년 이후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나간 적이 없었으니 무려 10년 만의 포스트 시즌 도전이었다. 심지어 그 2018년 역시 11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던지라 일각에서는 피닉스가 가을 야구에 나가려면 강산이 한 번은 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그리하여 5회.
[아, 피닉스!! 여기서 최수원 선수를 거릅니다.]
-우우우우우우우!!!
경기장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야유로 가득했다.
[이거 현장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사실 이번 시즌 사직이 꾸준하게 만원 관중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수요일 경기에 당근으로 웃돈 줘가면서까지 표를 구해서 오는 분들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그게 다 최수원 선수의 홈런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이에요. 저기 저 외야에 잠자리채 들고 나온 분들이요. 근데 이걸 이렇게 걸러 버리네요.]
[피닉스!! 이렇게 되면 경기라도 꼭 이겨야죠. 이렇게까지 해놓고 경기까지 져 버리면 그건 정말······.]
[하하, 그것 참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요.]
2차전 피닉스는 나를 거르고 6:4로 패배했다.
나는 그 경기에서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3차전.
경기 외적으로 여기저기서 잔뜩 두들겨 맞은 피닉스 덕아웃은 나를 거르지 못했고 난 거기에 홈런으로 화답했다.
이제 남은 경기는 12경기
KBO 홈런 신기록까지는 여섯 걸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