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09화 (209/305)

209화. 신기록(5)

솔직히 좀 겁났다.

당연하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그건 완전히 거짓말이다.

이번 시즌 그가 허용했던 홈런은 총 17개.

전성기에는 저 메이저에서조차 풀 시즌 20개 미만의 홈런을 세 시즌이나 기록한 적이 있는 임광형이었다. 경기 숫자도 다르고 선수들의 수준도 다르다. 그렇다면 임광형의 기량이 그 시절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일까?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17개의 홈런에 가장 큰 이유는 임광형 자신의 기량이라기보다는 저 최수원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했다.

무려 다섯 개.

경기라도 많았으면 말도 안 한다. 그래, 고작 두 경기에 만나서 홈런만 무려 다섯 개다. 아니, 아니다. 심지어 올스타전에서 예고 홈런까지 생각하면 저 녀석에게만 홈런 여섯 개. 그것도 6타수 6홈런으로 무려 전 타석 홈런이다.

첫 만남에서 3연타석 홈런 허용할 때야 쿠세도 좀 들켰고 한참 녀석 기세가 미쳐서 7연타석 홈런 같은 거 하던 시절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요즘은 조금 다시 살아나는 기미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의 느낌은 아니었는데 2연타석 홈런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임광형은 마운드에 섰다.

언제였더라? 10년 쯤 된 이야기다. 그가 아직 막 메이저에 진출하여 한창 쌩쌩하던 시절에 한 전설적인 투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전성기를 훌쩍 지났지만 아직까지 은퇴는 염두에 두지 않은 그러니까 딱 지금의 임광형과 비슷한 또래였더랬다.

“안 쫄리냐고? 뭐야? 던질 만큼 던진 놈이 뭐 그딴 걸 물어보고 있어? 당연히 쫄리지. 조금만 몰려도 담장을 펑펑 넘겨대는 놈들 투성인데 어떻게 안 쫄리겠어. 젠장, 내가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93마일이면 충분히 강속구였는데 무슨 놈의 파워 인플레가 이따위인지. 근데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난 쌓아 올린 게 있지.”

“경험인가요?”

“그건 개나 소나 적당히 뛰면 다 생기는 거고. 나 같이 위대한 선수한테는 거기에 보너스로 더 붙는 게 있어. 위대한 선수의 아우라. 챔피언의 관록. 뭐 그런 거지.”

그는 말했다. 깎여나가는 기량 대신에 쌓아 올린 커리어.

그리고 그 커리어는 마치 훈장처럼 남아서 그를 받쳐준다고. 그래 마치 챔피언은 쉽게 꺾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당시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그 위대한 선수에게 보이는 관록이나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도저히 마운드 위에서 배짱 좋게 저 젊은 타자에게 공을 던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무표정함이 임광형의 두둑한 배짱과 무신경함을 증명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진짜 배짱 좋고 무신경한 놈들은 이런 포커페이스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저기 지금 타석에 서서 공을 준비하는 최수원 저 녀석처럼.

초구.

가장 좋은 공.

-딱!!

체인지업을 녀석이 후려갈겼다.

어지간하면 내야땅볼이 됐으면 했는데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선배, 공 좋습니다. 같은 코스 투심으로 가시죠.’

오늘만 홈런을 두 개나 처맞았는데 대체 공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투심과 체인지업의 볼 배합은 그의 필승메뉴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정병철이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무려 16년이나 차이나는 후배였지만 그 모습이 건방지게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그것만 보더라도 좋은 포수였다. 녀석은 투수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제안하는 법을 안다.

개인적으로 팀에 몇몇 녀석들에게 메이저 생각하면 영어 공부를 좀 해두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별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거기 1/3은 영어 제대로 못하는 남미쪽 히스패닉 애들이기도 했고 투수나 야수는 영어 좀 못해도 빅리그에서 뛰는 데 크게 상관은 없다.

하지만 포수는 다르다.

조금 예전 일이기는 했지만 NPB 최고의 포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지마 겐지가 어째서 MLB에서 실패했는가. MLB 데뷔 첫 시즌에 포수로 20홈런을 치고 부상으로 신음하던 당시에도 타격은 리그 평균 수준은 됐던 그는 어째서 고작 서른셋의 나이에 MLB에서 은퇴하고 NPB로 돌아간 것일까?

정답은 소통이었다. 단순히 경기 내적인 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그거야 통역 데리고 가면 다 해결된다. 생각보다 덕아웃에서 클럽하우스에서 선수들간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포수와 투수의 관계는 더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조지마는 단순히 덕아웃에서 지시하는 대로 리드하지 않는 포수로 유명했는데 투수와의 소통이 단절되자 그의 리드에 대한 의심은 더더욱 커졌고 결국 에이스 투수들이 그를 공개적으로 기피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만약 그가 적당히 경기 끝나고 이런 리드는 이러이러했고 아쉽게 실패했지만 이건 성공적이었다 라는 내용의 대화만 할 수 있었어도 그 정도로 관계가 파탄이 나지는 않았으리라.

아무튼 정병철은 임광형이 그렇게 진지하게 조언을 해줄 만큼 재능 있는 타자였다.

아마 이번 시즌 최수원이 없었더라면 신인왕은 너끈했을 것이고 어쩌면 최수원이 사라지고 없을 내년이나 후년 즈음에는 MVP를 노릴만한 선수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일이다.

합리적인 선택?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합리적인 상대일 때 이야기다. 저런 규격 외의 괴물. 비합리성을 몸에 둘둘 말아 둔 녀석을 상대로는 어렵다. 임광형은 지금 투심을 던지면 녀석이 그대로 담장 밖으로 내보낼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그때 그 전설적인 투수가 말해줬던 위대한 선수의 아우라, 챔피언의 관록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너무 뒤지게 쳐맞긴 했지만······.’

임광형이 공을 던졌다.

같은 코스.

투심이 아닌 또 다시 체인지업으로.

-딱!!!

최수원의 방망이가 그 공을 후려갈겼다.

조금 전보다 강하게.

그리고 조금 더 적절하게

아마 투심을 던졌더라면 딱 담장 밖으로 넘겨버렸을 것 같은 타이밍으로.

타구가 내야 관중석을 살짝 넘어갔다.

볼카운트 0-2.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카운트인데 왠지 일방적으로 몰린 것 같은 느낌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세 번째.

정상적인 선택이라면 몸쪽 높은 코스 가장 빠른 속구.

빌어먹을 플라이볼 혁명 이후로 꾸준히 먹히는 결정구다. 비록 전성기보다 구속이 2, 3마일 정도 느려지긴 했지만 그만큼 체인지업도 느려진 터라 앞서 체인지업을 두 개나 보여줬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정병철이 바깥쪽 낮은 코스 살짝 빠지는 투심을 요구했다. 확실히 투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녀석이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심연이 그대를 바라보면 심연도 그대를 바라보는 법이고, 괴물을 잡으려면 나 역시 괴물이 되야 하는 법이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비록 그 육체는 영락하여 완전한 인간의 육체였지만 적어도 마음 만큼은 괴물과 같았다.

세 번째.

바깥 쪽 낮은 코스.

체인지업.

그것은 그가 던질 줄 아는 공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공이었다.

***

3구 연속?

몸쪽 높은 코스 가장 빠른 포심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배팅의 타이밍 역시 포심에 맞춰둔 상태였다.

바깥쪽 낮은 코스 체인지업.

필사적으로 배트를 컨트롤했다.

그러나 부족했다. 타이밍도 코스도 예상했던 것과는 방망이가 너무 멀었다. 차라리 보고 휘두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임광형이 워낙에 내 생각대로 공을 던져주다 보니 나도 모르게 확실하게 큰 걸 노린 것이 실책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포수 팝플라이.

항상 나에게 아낌없이 홈런을 주던 행운의 토템과 같던 임광형에게 뺏긴 삼진이라 좀 속이 쓰렸다. 하지만 6타석 연속으로 홈런을 쳤으면 이 정도는 세금인 셈 치더라도······.

“선배님!! 굿 볼!! 아주 좋았습니다!!”

아니, 아니다.

속이 쓰리다.

어떻게 삼진을 세금인 셈 칠 수 있을까? 아니, 세금은 원래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내기 싫은 법이다. 홈런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홈런을 백 개를 쳤어도 삼진은 기꺼울 수 없다.

[임광형이 결국 공 세 개로 최수원에게 삼진을 만들어 냅니다. 최수원에게 50번째 홈런은 허용하지를 않네요.]

[워낙에 상성이 안 좋은 선수인데 임광형 선수가 끝끝내 그걸 이겨 내내요. 사실 저 정도면 볼넷을 줄 만도 하거든요. 물론 50홈런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임광형이라는 에이스의 무게감도 있습니다만 당장 피닉스도 5위 다툼을 하는 상황에서 1승 1승이 소중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 것이 에이스 아니겠습니까? 팀은 에이스를 믿고 에이스는 그런 팀의 믿음에 부응한다. 피닉스에서 임광형은 그런 선수죠.]

돌아온 덕아웃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맞아준 것은 역시 이정훈이었다.

“삼구 삼진이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이 인간······.

“······. 선배 지금 놀리러 온 거죠?”

“아냐, 아니지. 병살타 하나에 헛스윙 삼진만 두 개인 내가 홈런을 두 방이나 친 타자를 감히 어떻게 놀리겠어. 그냥 나도 헛스윙 삼진만 두 개지만 삼구 삼진은 아니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게다가 이 와중에 조유진 녀석이 또 눈치 없이 끼어든다.

“확실히 오늘 광형 선배 공이 좋긴 좋나보다. 수원이 너 이번 시즌에 삼진 몇 개 안 되지 않아? 그 중에서 삼구 삼진은 아예 없었던 것 같은데?”

“게스 히팅 하려다가 오히려 낚였어. 성과가 좋아서 계속 재미 보려고 했는데 욕심이 좀 과했지.”

“역시 그러니까 타격은 나처럼 본능적으로 하는 게 좋다. 그런 거구만.”

“어허!!! 쪼유!! 지금 감히 2타수 무안타가 어디 3타수 2홈런에게 좋다, 안 좋다를 논하느냐.”

“선배. 진짜 이러기에요? 갑자기 왜 사극톤으로까지 간다고?”

다행히 놀림은 길지 않았다.

공수교대.

다시 우리의 수비 차례.

점수는 아직 1:2

고설민은 오늘도 멀티이닝을 소화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다행스럽게도 현재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한 불펜 투수 고설민은 아직 퍼지지 않았다.

앞선 곽재영과는 사뭇 다른 강속구가 타자들을 돌려 세운다.

경기가 계속됐다.

1:2의 상당히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하지만 7회를 넘어가면서 임광형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다. 서른여섯을 먹은 투수였다. 아무리 살인적인 메이저의 일정을 소화해봤다고 해도 2027년 여름. 한국 역사에 손에 꼽을 만큼 기록적인 더위 속에서도 어떻게든 로테이션을 지켰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결국 7회를 끝으로 임광형은 마운드를 내려갔다.

1:2의 상황에서도 피닉스는 필승조를 동원했다. 그들 역시 지금 1승, 1승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역전은 없었다.

좀 불안하긴 했지만, 우리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인 태지완 역시 아직은 덜 퍼졌다. 안타는 허용했지만 점수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기가 끝났을 때 전광판에 새겨진 점수는 1:4.

에이스에 필승조까지 사용하고 패배한 피닉스의 앞길에 빨간등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최수원 홈런!! 홈런!! 또 홈런!!!]

[극강의 몰아치기!! 최수원 25경기 남겨 두고 무려 3홈런 추가!!]

[시즌 50홈런 최수원!! 이제 신기록까지 남은 홈런 개수는 단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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