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07화 (207/305)

207화. 신기록(3)

임광형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흔들릴 만큼 충격적인 장면이긴 했지만, 그는 이미 더 넓은 세계를 실컷 지켜보고 온 남자였다.

‘대체 어떻게 이걸 넘겨?’

그런 말 따위는 이미 저 태평양 건너에서 수도 없이 뱉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KBO에서 또 하나 본다고 그게 뭐 대수겠는가. 그래, 세상에는 종종 그런 괴물도 있는 법이다. 그게 이번에는 저 열아홉 살짜리 한국인일 뿐이다.

임광형이 그저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타자를 상대했다.

-딱!!

그리고 노형욱이 2구째 외야플라이로 물러났다.

[임광형이 솔로 홈런이후 침착하게 후속타자 노형욱을 외야 플라이로 잡아내며 점수는 0:1. 경기는 2회 초, 피닉스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곽재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그는 마린스의 선수 육성을 그리 믿지 않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선수의 육성이라는 것은 상당 부분 경험에 의한다. 연역이 아닌 귀납의 영역인 것이다. 이 바닥에 특정 부분을 강화했을 때 하고 보니까 밸런스가 깨져서 더 망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리고 마린스는 그러한 실패의 경험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당장 곽재영만 하더라도 전성기 150을 웃돌던 구속이 140까지 내려간 것은 물론 여러 번의 부상 때문이었지만 그 부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잘못된 트레이닝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곽재영은 상동에서의 훈련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갑자기 마린스의 육성을 신뢰해서가 아니다. 당연히 최신의 장비를 믿은 것도 아니었다. 삐까뻔쩍한 장비들이 잔뜩 있었지만 마린스에 그런 장비들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러한 훈련들을 받아들인 것은 그저 그가 더 이상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서른다섯의 나이.

각종 스포츠 과학의 발달로 선수들의 전성기가 30대 초반으로 미뤄지고 때때로 30대 후반에 커리어하이를 찍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곽재영은 아니었다. 그의 전성기는 27살이었고 그 이후로 그는 꾸준히 약해지고 있었다.

“네가 성적이 좋은 날과 그렇지 못한 날을 비교 분석해봤어.”

“그걸 굳이 비교 분석까지 해봐야 아는 겁니까? 컨디션 좋은 날에는 구속도 괜찮고 슬라이더도 잘 들어가니까 성적이 좋은 거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그렇지 못하니까 성적이 엉망인거겠죠. 그것보다 새로운 변화구 장착이나 좀 도와주세요. 지금 같아서는 너클볼이라도 배워보고 싶은 심정이니까요.”

“그래, 뭐 너클볼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런데 이건 끝까지 들어보고 그래도 너클볼이 필요한 거 같으면 그때 너클볼을 한 번 도전해보자.”

물론 마린스의 2군 투수 코치인 배규철의 설득 역시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는 증량성애자로 유명한 본래의 2군 코치인 최정식이 사표를 쓴 이후 그 자리에 대신 들어온 유학파 코치였다. 배규철은 현역 시절 한 번도 1군에 올라온 적이 없었던 인물로 급하게 코치를 구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프로팀의 코치로 합류하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너 어깨랑 팔꿈치가 많이 안 좋지? 아, 미안. 너무 뻔한 이야기였네. 아무튼 본론부터 말하자면 너 컨디션 좋은 날이랑 안 좋은 날 몸의 축이 조금 틀어져. 내가 볼 때는 통증 때문인 것 같은데. 수술한 위치가 여전히 통증이 있는 거지?”

이미 알고 있는 문제였다.

몇 번이나 긁히는 날의 자세로 교정을 받았지만 공을 던질 때마다 올라오는 통증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아픔을 참고 던진다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정확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너클볼 연습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아니. 좀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내가 지금 아픈 걸 참고 던지라는 게 아니야.”

배규철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신박한 방법이었다.

여기 좋은 피칭 폼과 나쁜 피칭 폼이 있다. 당연히 나쁜 피칭 폼을 교정해서 좋은 피칭 폼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컨디션 안 좋을 때 피칭폼을 기반으로 투구폼을 수정하자고요?”

“그래, 억지로 쥐어 짜내서 될 게 아니잖아. 아픈 걸 어떻게 계속 참고 던져. 다만 그 틀어지는 걸로 생기는 문제를 고치자는 거야. 보면 여기 피칭폼이 틀어지면서 투구의 회전축이 틀어지거든? 슬라이더의 회전축이 틀어지니까 무브먼트도 틀어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로케이션이 불안해지고 컨트롤이 흔들리는 거거든. 결정구가 망가지니까 속구도 자연스럽게 잘 얻어 맞게 되는 거고.”

증량성애자 최정식과는 사뭇 다른 해법이었다.

아마 최정식이었다면 일단 어깨와 팔꿈치에 근육을 강화해서 통증을 억제하고 최선의 폼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자고 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실 그게 정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른다섯 살의 곽재영은 배규식의 방법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서른다섯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부웅!!

“스트라잌!!”

131.2km/h의 슬라이더.

가장 빠르게 공을 던질 수 있는 폼에서 팔의 각도가 3도 정도 내려왔다. 덕분에 구속은 1km/h가량 떨어졌지만 어깨와 팔꿈치가 아프지 않았다. 물론 말로 하면 참 쉬운 설명이었지만 이 3도를 내린 폼을 몸에 박아넣고 로케이션을 안정시키기까지 참으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그 노력의 결과.

곽재영은 피닉스의 공격을 3이닝 연속으로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물론 순수하게 실력이었는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운이 많이 따랐다. 애당초 어깨와 팔이 이 모양이 된 다음에는 긁히는 날이라고 해도 무실점을 밥먹듯이 하는 투수는 아니었으니까.

6피안타에 무실점.

그리고 삼진 두 개.

하지만 곽재영은 그것만으로도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어쩌면 오늘 승리투수가 될 수 있을지도······.’

만약 그렇다면 무려 6년 만의 선발승이다.

이닝을 끝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그에게 이규만이 말없이 미지근한 포카리 한 병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주장.”

지금은 2할3푼과 4푼 사이를 오가는 타자와 경기 최고 구속 140이 채 못 되는 투수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전성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다.

언젠가 눈 부셨던 한 때.

이규만은 타석에 들어설 때 뭔가 한 건을 해줄 것이라 믿음을 주는 타자였고 곽재영은 팀이 연패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끊어줄 것이라 신뢰를 받던 에이스였다.

그래.

마치 지금 타석에 들어서는 저 최수원을 절반으로 나눠놓은 것 같은······.

‘아, 규만 선배가 거기까진 아닌가? 그래도 투수 최수원이랑 나는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최수원의 두 번째 타석.

곽재영과 동시대를 함께 뛰었던 서른여섯의 투수 임광형이 10년 전, 20년 전과 다름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피칭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운드의 임광형에게는 이미 영광이 끝나버린 이규만이나 곽재영과는 다르게. 아직까지 젊은 시절의 찬란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

고의 사구?

가능은 했다. 그리고 솔직히 경기 이기려면 여기선 거르는 게 맞았다. 지금 1점 차이인데 굳이 이레귤러급 괴물과 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임광형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열아홉의 젊은 타자의 기록을 그렇게 뺏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를 물었다.

KBO와 MLB의 문화는 다르고 따라서 불문율 역시 조금 다르다. KBO는 더 젊은 리그고 승리 앞에서는 그 불문율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어기는 것이 허용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광형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복합적이다.

어쩌면 자존심이나 오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스스로를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투수라고 생각했다. 물론 더 위대한 투수는 있을 수 있다. 위대함과 강력함은 항상 정비례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마운드의 임광형이 첫 번째 공을 준비했다.

투심.

전 타석에서 저 괴물이 담장 밖으로 날려 보냈던 공이다.

어마어마한 집중력.

그야말로 공 반의 반 개 차이.

-딱!!!

최수원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큼지막한 타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울 라인 안쪽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야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타구.

최수원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와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숨 한 번 들이쉴 정도의 짧은 시간을 정지해있던 그가 배트로 홈플레이트를 한 번 톡 두들긴 후 자세를 잡는다. 타격에 들어가는 최수원의 루틴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저 녀석 올스타전에서는 저기에다가 방망이로 전광판을 가르키는 미친 짓까지 보여줬었다. 그땐 솔직히 올스타전이고 퍼포먼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웃었는데 그게 진짜 담장을 넘어가니까 웃을 수가 없었다. 손이 달달달 떨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갑자기 고의사구 마렵네.’

바깥쪽.

더 바깥쪽.

그러니까 공 반의반 개 정도 더 빠지는 느낌으로.

-뻐엉!!

“스트라잌!!”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서 조금 더 빠졌다.

최수원의 방망이가 이번에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너라도 여기까진 따라오지 않는다 이거네.’

세 번째.

살짝 몸쪽.

하지만 복판에 상당히 가까운 공.

최수원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딱!!!

높게 솟구친 타구가 이번에도 내야 관중석으로 떨어졌다.

빠른 슬라이더였다.

볼카운트 1-2.

그리고 두 개의 공을 더 던졌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집요한 바깥쪽 투심이었다. 수원은 하나를 커트했고 더 빠지는 공 하나를 흘려보내며 볼카운트를 2-2로 만들었다.

임광형이 잠시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메이저리그에서 전설적인 타자를 상대할 때나 느껴지던 쫄깃함이 그의 가슴을 강하게 압박했다.

‘재밌네.’

***

확실히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투수다.

아니, 누구라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유형의 투수다.

사실 투수가 뭐 머리를 굴리고 볼배합을 하고 이러는 것이 야구 만화에서는 아주 대단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에서는 그 정도로 대단한 의미는 없다.

애초에 그렇게 머리를 굴린다고 원하는 곳에 공을 딱딱 집어 넣는 투수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원하는 공에 딱딱 공을 집어 넣는 투수라면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고.

견적은 나왔다.

바깥쪽 낮은 코스 체인지업.

아니면 몸쪽 높은 코스 포심.

집요하게 바깥쪽 투심을 보여준 건 아마 둘 중 하나를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확률적으로 더 높은 것은 바깥쪽 체인지업.

‘두 번째 던졌던 슬라이더를 제대로 쳤어야 했는데······.’

좀 밋밋하게 들어왔던 그 공을 놓친 게 참 안타깝다. 임광형 본인도 그걸 아는지 그 이후로 슬라이더는 절대 안 던지고 있다.

여섯 번째.

‘아······.’

시작부터 장난질이다.

미묘하게 빠른 타이밍.

슬라이드 스텝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앞쪽 무릎이 정점에 다다르기 전에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보통 투수라면 저것만으로도 투구 밸런스가 개판이 돼서 로케이션이 엉망이 되겠지만 임광형은 다르다.

바깥이냐 안쪽이냐.

공이 날아왔다.

바깥쪽 낮은 코스.

역시 결정구는 임광형 자신이 가장 잘 던지는 체인지업이었다.

1/2 확률.

아니 4:6 정도의 확률이었는데 맞았다.

타이밍이 조금 어긋났지만 노리던 공이다.

-딱!!!!

만약 몸쪽 높은 코스였다면 삼진 혹은 뜬공 아웃.

하지만 들어온 공은 바깥쪽 낮은 코스 체인지업이었다.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갔다.

경기 두 번째 홈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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