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신기록(2)
사람들은 스포츠 과학의 발달이라는 말을 하면 흔히들 복잡한 기계장치만을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더 정교한 장치의 개발은 그만큼 더 정교한 관측을 가능케 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의외로 사람이다.
그리고 KBO의 대전 그리핀즈는 단장인 강지우와 전력분석팀장인 찰리 김이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무려 13년이나 근무를 하고 돌아왔던 인물들로 그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충족한 NPB에서도 몇 안 되는 팀 중 하나였다.
“뭐랄까? 그러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그래. 기상청. 기상청을 생각하면 좀 쉽겠다.”
“네? 갑자기 기상청이요?”
“기상청을 보면 슈퍼컴퓨터가 막 다 알려 주는 것 같잖아. 근데 사실 그 슈퍼 컴퓨터라는 거 그냥 도구거든. 중요한 건 사람이야. 데이터를 해석하고 그 해석하는 걸로 알고리즘을 만들고. 우리도 마찬가지야. 장비? 뭐 좀 비싸긴 하지만 KBO 구단들의 예산 규모를 생각해볼 때 충분히 감당 가능한 범위거든. 문제는 이걸 제대로 운용할 사람이거든. 우리가 이것 때문에 데이빗이랑 매튜 데리고 온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 근데 그건 그냥 장비 다루는 기술이잖아요. 배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에휴, 그래. 어떤 기술이건 학원에서 배우면 되지. 근데 학원에서 배운 애들이 어디 실제로 현장에서 바로바로 써먹을 수 있겠어? 기술이라는 게 그렇게 단기간에 되는 게 아니거든. 의사랑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그쪽도 제대로 한 사람 몫 하려면 10년 넘게 매달려야 하잖아. 기술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거든. 심지어 이건 제대로 쓰는 곳이 메이저리그 정도밖에 없어요. 기술이 유출이 안 된단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시는 결론은 새로 모집할 신인들의 인건비는 좀 후려쳐도 괜찮다?”
그리핀즈의 단장 강지우가 혀를 찼다.
“쯧, 하여간 누가 인사팀 아니랄까 봐. 여기서 그딴 결론을 도출을 해버리네. 그게 아니라 어? 학벌이랑 학점 좋고, 최대한 똘똘하고, 무엇보다 우리 그리핀즈에 팬심이 있는 애들로 고용을 하라고. 그래야 기술 빨리 배우고 어디로 이직도 안 하고 오래 붙어있지.”
“그러면 연봉은?”
“절대 후려치지 말고. 정말 중요한 인력이니까. 일도 힘든데 연봉까지 후려치면 팬심이 아무리 깊어도 그게 남아나겠냐?”
“근데 단장님. 문득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러면 지금 KBO에 이거 제대로 운용하는 거 우리 팀밖에 없는 겁니까?”
***
9월의 두 번째 경기.
피닉스와의 2차전에 선발로 출장한 사람은 놀랍게도 2군에서 막 올라온 곽재영이었다. 한 때 마린스의 에이스 소리도 들었던 양반이지만 그것도 150을 던지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는 이를 악물고 던져봤자 최고 구속 141남짓. 평속은 130후반대에 불과했다.
솔직히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평가였다.
실제로 내가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2027시즌까지 불펜으로 꾸역꾸역 1군에 붙어 있었지만 28시즌부터는 1, 2군 왔다갔다 하다가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퓨처스에서 생각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더니 다시 선발로 전환해서 확장엔트리로 1군에 올라오기 전 2경기에서 13.1이닝 무실점을 했다.
그리고 오늘 피닉스와의 경기.
-뻐엉!!
“스트라잌!! 아웃!!!”
1회 초에 안타를 하나 내주기는 했지만 무려 삼진까지 하나 잡아가면서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와, 재영 선배 공 저거 뭐예요? 뭐 그 회전수 이런 거라도 올라간 건가?”“그러게? 요새 유망주 육성이니 뭐니 하면서 상동에도 뭐 이것저것 장비들 들여왔다고 그러더니 그거 효과 좀 본 건가?”
덕아웃에 돌아온 이정훈과 정지운이 헛소리를 주고받았다.
회전수가 인위적인 훈련을 통해서 유의미하게 증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좀 분분하긴 했는데 뭐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턱걸이 하나도 못 하다가 몇 달 훈련하면 10개씩도 하는게 사람인데. 근데 애초에 매우 하드한 트레이닝으로 턱걸이 50개씩 하던 사람이 훈련 좀 더 한다고 그게 70개 80개로 늘어나는 것이 가능하냐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도 치팅이 아니라 훈련으로 회전수가 유의미하게 늘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그거랑 또 별개로 지금 곽재영이 회전수가 증가해서 공이 좋아졌는가를 묻는다면 내가 볼 때 그건 아니다.
어제 선발로 등판을 했던 백하민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듣기로는 회전축을 좀 조정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회전축?”
“네, 그러니까 재영 선배 긁히는 날에는 굉장히 잘 긁히셨잖아요. 그래서······.”
“아, 잠깐만. 우리 공격할 차례잖아. 라온이 나갔다. 이따가 내가 다녀오면 좀 알려줘.”
“네.”
오늘 경기 선두 타자는 강라온.
그리고 이정훈은 2번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면서 강라온의 타격 사이클이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다시 멀티 안타도 기록할 만큼 타격감이 올라왔다.
-딱!!!
[초구!! 강라온 쳤습니다!! 오민엽 따라가 봅니다만!! 살짝 빠지는 타구!! 강라온 무사히 1루에 안착합니다!!]
[피닉스의 에이스 임광형을 상대로 초구를 아주 잘 공략했습니다.]
확실히 임광형도 컨디션이 많이 떨어진 느낌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나이가 서른여섯이다. 비록 작년 한 해 재활로 푹 쉬었다고는 하지만 7월과 8월.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서 로테이션을 한 번도 안 걸러 가면서 공을 던졌으니 지칠 만도 하다.
그리고 2번 타자인 이정훈.
임광형의 초구.
확실히 KBO에서 전설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빅리그를 밟았던 투수답게 슬라이드스텝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저렇게 피칭 타이밍을 가져가면서도 커맨드에 흔들림이 거의 없다는 것은 존경할만한 점이다. 타자만 할 때는 저런 것보다는 체인지업의 위력 같은 거에 더 집중했었는데 투수도 같이 하다 보니 오히려 저런 게 더 눈이 간다.
이정훈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앞서 임광형이 좀 흔들리는 느낌이었으니 그걸 제대로 공략하겠다는 느낌이었는데 함정이었다.
-딱!!
절묘한 체인지업.
타이밍부터 타격 포인트까지 완벽하게 다 뺏겼다.
유격수 정면으로 향하는 내야 땅볼.
피닉스의 유격수 오민엽이 빠르게 달려나와 타구를 처리했다.
6-4-3 병살타.
1루로 달리던 이정훈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본래의 이정훈이었으면 이런 상황에서도 그냥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최근 타격감이 영 좋지 못한 게 신경이 쓰였는지 진짜로 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야, 오늘은 좀 살살 가자.”
“지금 살살 가자는 분들이 공 2개에 2아웃을 잡습니까?”
“광형 선배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공 오래 던지기 힘들어.”
“그러면 깔끔하게 복판으로 하나 부탁드립니다. 괜히 공 많이 던지고 홈런 맞는 것보다 초구 홈런이 더 편하실 거 아니에요.”
“초구 내야 뜬공 쪽이 더 편하지 않을까? 1회에 굳이 형욱 선배까지 상대하시는 것보다 말이야.”
정병철과의 가벼운 잡담.
마운드의 임광형은 무표정했다. 몇몇 사람들은 임광형의 구속이 이제 140 후반대라고 공의 위력만 따지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학폭이 쪽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래, 뭐 공의 위력이라는 게 누가 더 빨리 포수 미트에 공을 집어 넣느냐로 결정된다면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의 위력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되는 게 아니다.
몸쪽 꽉 찬 높은 코스.
아니, 거기서 조금 더 빠지는 코스다.
굉장히 빠른 박자였다.
그러니까 앞서 슬라이드 스텝 정도는 아니지만, 강라온을 상대로 던졌던 제대로 된 와인드업 피칭보다 1/3박 정도는 빠르게 느껴지는 타이밍이다.
-딱!!!
[3루 내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큼지막한 파울 타구!!]
“와, 이거 뭡니까?”
“뭐긴 뭐야. 속구지.”
“아니 그게 아니라. 설마 아까 전에 라온 선배한테 던진 공. 그거 저 낚으려고 던졌던 공인 겁니까?”
어쩐지.
강라온에게 던졌던 초구가 임광형 치고는 너무 밋밋하고 몰려서 들어왔다 싶었다. 그냥 요즘 무더위 때문에 좀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피칭 타이밍을 갖고 장난을 친 거 였다니.
두 번째.
마운드의 임광형이 와인드업했다.
***
-쯧.
임광형이 혀를 찼다.
망할 괴물.
다시 말하지만, 빅리그에서도 저런 괴물은 흔치 않았다. 정말 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놈들이 컨디션이 절정에 올라왔을 때. 혹은 올스타급 선수가 정말 플루크라고 부를 만큼 압도적인 사이클을 가져가고 있을 때나 간신히 저런 수준이다.
방금도 강라온이라는 KBO 올스타급 타자를 상대로 안타를 각오하고 낚싯대를 던졌다. 최근에 컨디션 난조로 한 경기를 완전히 망쳤기에 설득력도 있는 공이었다. 거기다가 이정훈의 초구 병살타라는 행운도 따랐다.
실제로 저 괴물 녀석 타격 타이밍이 앞서 보여줬던 그 느린 타이밍에 완벽하게 맞춰갔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걸 내야 관중석까지 날려 보냈다.
힘도 힘인데 배트 컨트롤이 진짜 미쳤다. 게다가 저 신체 밸런스는 또 어떤가.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방망이에 힘을 싣는다.
‘1회는 좀 쉽게 가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게 통했으면 그래도 한 타석은 날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두 번째.
요즘 다시 재미를 보고 있는 투심 패스트볼.
바깥쪽 낮은 코스다. 보통의 타자라면 몸쪽 높은 포심 직후에 이어지는 이 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딱!!!
물론 저 괴물은 다르다.
애초에 기대도 안했다.
그래서 존 밖으로 좀 빠지게 던졌다. 저 괴물의 유일한 약점은 존이 비정상적으로 넓다는 점이다. 아니, 사실 약점도 아니다. KBO의 투수들을 상대로는 그렇게 넓은 존을 고수하면서도 홈런을 뻥뻥 때려대니까.
하지만 그는 임광형이었다.
한때 메이저에서도 리그 에이스급 선발 소리를 듣던 투수다.
여기까지 노림수를 먹여줬으니 이번 공까지 파울로 볼카운트는 0-2. 그러니까 이제 다음 결정구로 승부를 보면 된다. 그의 체인지업은 투심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공으로 우타자를 상대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고개를 돌린 임광형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늠름하게 서 있는 우측 담장의 파울 폴대를 향하여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는 타구가 쭉쭉 뻗어나간다.
근데 어째 타구의 움직임이 조금 요상했다. 분명 저건 마이크 트라웃이 와도 파울로 끝날만큼 빠져나가는 투심이었는데 저게 왜······.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 갑니다!! 최수원!! 시즌 48호 홈런포!! 최수원이 임광형을 상대로 시즌 마흔 여덟번째 홈런을 기록합니다!!]
[와, 방금은 존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는 투심이었는데요. 이걸 상대로 홈런이라니. 진짜 제가 현역이었으면 멘탈이 완전 박살이 났을 것 같습니다. 임광형 선수도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네요.]
[최수원 선수. 이제 이걸로 KBO 홈런 신기록까지는 딱 8개가 남았습니다. 오늘 경기를 포함해서 남은 경기는 25경기. 정말 대단한 페이스입니다.]
[자, 이제 점수는 0:1. 마린스가 1점을 앞서 나갑니다.]
[하지만 피닉스도 여기서 절대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린스가 2군에서 막 돌아온 곽재영 선수를 선발로 올린 데 반해서 피닉스는 에이스인 임광형 선수를 올린 거거든요. 현재 5위 경쟁이 매우 치열한 만큼 오늘 경기는 피닉스도 꼭 가져가야지만 하는 경기예요.]
경기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