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05화 (205/305)

205화. 신기록(1)

피닉스의 라커룸.

여섯 경기 연속으로 원정을 뛰어서일까?

스무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전 포수를 맡은 정병철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우, 힘들다. 힘들어.”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그렇게 힘들어하면 어쩌냐?”

“야, 오민엽. 우리 애한테 왜 구박이야. 포수가 얼마나 힘든 포지션인데. 어? 글러브 하나 딸랑 끼고 마운드 왔다갔다 하는 거랑 차원이 달라요. 쟤는 매일 무거운 거 잔뜩 입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애라고.”

“아니, 형님. 내가 또 언제 구박을 했다고······. 그냥 이제 본격적으로 더 힘들어진다. 조언을 해준 거죠. 하여간 뒤로 빠지는 공은 내가 맨날 다 잡아주는데 항상 편은 병철이 편만 든다니까. 내가 서러워서 포수 하던지 해야지.”

정병철이 사람 좋은 얼굴로 오민엽에게 다가갔다.

“어휴, 선배님. 참아주세요. 선배님이 포수하시면 저 실업자되는 거잖아요.”

“엄살은. 나보다 장타율이 1할 넘게 좋으면서.”

“어휴, 그래도 선배님 타율이랑 출루율 따라가려면 멀었죠.”

“야, 오민엽. 넌 야구가 몇 년째인데 아직도 장타율을 할이라고 표현하냐? 그러면 마린스의 그 미친놈은 뭐 장타율이 10할이 넘게?”

사실 엄밀히 말해서 장타율은 할푼리의 백분율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친다고 가정하면 4.0까지 나올 수 있는 숫자였으니까. 하지만 편의상 타율과 출루율의 뒤를 이어 사용했고 그 모수가 어느 정도 커지면 1.0을 넘어갈 수가 없었기에 그냥 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미친놈은 아직도 10할 넘게 친답니까? 며칠 전에 9할 대로 떨어지지 않았어요?”

“어제 또 홈런 쳤잖아. 다시 1.007이더라.”

“와, 아니 걘 뭔 홈런을 밥 먹듯이 치고 있어? 병철아. 이거 어쩌냐? MVP가 또 멀어진 것 같은데?”

“선배님······.”

“야, 오민엽. 애 좀 그만 잡으라니까? 너도 신인 때 목표가 MVP 어쩌고 했으면서 자기 모자에 목표 MVP 좀 적어놨다고 언제까지 놀려 먹을래?”

“덩치는 산만한게 반응이 좋잖습니까. 흐흐. 그나저나 그 괴물 새끼는 진짜 살벌하네요. 얜 뭐 지치지도 않는 건가?”

“글쎄다. 일단 전력분석팀 말로는 지치긴 지쳤다는데······. 그냥 4할 타율보다 홈런 신기록에 집중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삼진이 좀 늘긴 늘었어.”

“걔 아직 타율도 0.397 아니에요? 근데 그게 타율 좀 포기하고 홈런에 집중하고 있는 거라고? 아이씨······. 병철아. 안되겠다. 우리 같이 나가서 접싯물에 코나 박고 죽자.”

“죽을 거면 너 혼자 죽지 병철이는 왜 끌고 가냐? 내년에 MVP도 받을 애인데.”

최으뜸까지 MVP를 언급하자 정병철의 얼굴에 이제 정말 부끄러움이 가득 찼다.

“선배님······”

“가만 보면 형님이 나보다 더한 것 같아. 난 그래도 대놓고 놀리는데 은근 돌려서 맥인 단 말이지······.”

***

시즌의 8부 능선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

KBO 사무국은 기쁨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2017년 관중수 840만명을 달성한 이래 KBO는 꾸준히 1,000만 관중 시대를 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2018년에 807만명. 2019년에 728만명으로 주저앉은 이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적인 역병으로 리그가 관중 없이 진행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한적으로 진행된 리그는 2022년 다시 열렸을 때 고작 607만명의 관중을 모으는 데 그쳤다. 이후 꾸준히 관중은 증가했지만, 여전히 2017년의 840만 관중은 KBO 역대 최다 관중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2027년 현재.

고작 9월이 지나간 시점에서 KBO의 관중 수는 이미 840만을 넘어 851만이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역시 정답은 마린스와 피닉스였습니다.”

KBO 1,000만 관중 시대를 위한 조건.

KBO는 매우 오래 전부터 그것에 대하여 꾸준히 연구를 해왔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10개 구단이 박빙의 승부를 벌여주고 그 가운데 부산 마린스, 대전 피닉스, 광주 호크스, 대구 그리핀즈. 그리고 서울 엘리츠가 가을 야구를 진행해주는 것.

실제로 2017년 840만을 달성한 것은 마린스가 6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해였고 2019년 갑자기 728만명으로 주저앉았던 것은 시즌 초반부터 5강 5약이 뚜렷하여 막판까지 큰 반전이 없었던 점이 유효했다.

그리고 올 시즌.

항상 압도적으로 9위와 10위를 하던 팀이 상위권에서 노는 순간 리그의 순위는 알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마린스의 1위는 말할 것도 없고 피닉스 역시 시즌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남은 기간 1,000만은?”

“지금 추세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난 번에 승인하신 그 기획안은 방송국에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모양입니다.”

“거기도 요즘 여러모로 힘드니까. 하여간 우리 때는 그냥 라디오랑 TV만 신경쓰면 됐는데 참 복잡한 세상이 됐어.”

“비디오가 라디오를 죽인 것처럼 이제 인터넷 방송이 비디오를 죽인 세상이 됐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라디오 시대건 비디오 시대건 야구는 그냥 야구였어. 그러니까 이제 인터넷 방송 시대라고 해도 야구는 그냥 야구면 되는 거야.”

[최수원의 47호 홈런포!! 시즌 57홈런 페이스!! 과연 최수원은 남은 26경기 동안 KBO 홈런 신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까?]

─푸른피의96층: 133경기 56홈런. 144경기 57홈런. 설사 기록을 달성한다고 해도 그걸 똑같게 생각할 수 있을까? 최수원이가 정말로 신기록을 경신했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 26경기가 아니라 15경기 이내에 57번째 홈런을 쳐야 한다고 본다.

─거포만보면짖는개: 왈왈!! 왈왈왈!!

─최수동원: 헛소리를 뭐 저리 장황하게 하는거지?

─크보따리크보따: 설득력 있는데? 1961년에 61홈런으로 루스의 60홈런 기록을 넘겼던 로저 매리스도 루스는 154경기였고 매리스는 162경기라서 61홈런 기록책에 항상 별표 넣었었잖아. 61*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최수원도 57홈런 치면 57* 이런 거 넣어야지.

─거포이주혁: 홈런신기록 딱 섯거라. 이주혁이 간다!!

─홈런왕최수원: 그거 미국 애들도 이제 흑역사로 생각하는 건데 그 짓을 하자고? 제정신인가?

─팔공산정상에서: 근데 설득력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경기숫자가 다르잖아.

─최수동원: 그래서 몇 경기 만에 홈런 기록을 세운거지? 수원이 이번 시즌 지금까지 95경기 뛴 건 고려 한 건가?

─푸른피의96층: 그러게 누가 투타겸업 하래?

─최수동원: 그러게 누가 133경기일 때 뛰래?

이제 어지간해서는 정규시즌 우승, 한국시리즈 직행이 확실했고 만약 하늘이 두쪽나서 남은 26경기를 전패한다고 해도 마린스의 가을 야구는 확정인 상황이었다.

KBO 사무국에서는 마린스의 관중이 지금과 같이 계속 유지되기를 원했고 심지어 그것 이상의 흥행을 바랬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홈런 신기록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 수원의 홈런 기록은 매우 훌륭한 세일즈 포인트였다.

“근데 될지 안 될지 모르는 홈런 신기록보다 어지간하면 기록할 것 같은 4할이나 세계 최초 장타율 1.0 같은 걸 내세우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우리 나라 사람들 세계 최초 좋아하잖아요.”

“4할은 나쁘지 않지만, 장타율은 임팩트가 없잖아. 임팩트가. 또 원래 유력한 것보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게 더 쫄깃한 법이고. 무엇보다 야구의 꽃은 역시 홈런이지.”

***

“벌써 9월이네.”

“그러게. 저거 보니까 좀 실감이 난다.”

9월 즈음 되면 이제 슬슬 체력을 넘어 정신력으로 달리는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솔직히 그냥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것만 하더라도 연차 없이 주 6일 근무로 6개월 정도 달리면 좀 쉬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다. 하물며 우리는 전국을 떠돌며 덥건 춥건 경기를 뛰고, 그 전후로 또 훈련을 한다.

물론 베테랑 정도 되면 적당히 페이스 조절해가면서 달릴 수 있기에 이쯤 돼서도 여유가 있는 선수들도 종종 있긴 한데 올해 마린스는 좀 달랐다.

“이제 로테이션에 여유가 좀 생기겠네.”

“글쎄다. 그러기엔 돌핀스 새끼들이 아직도 우리랑 3.5경기 차이로 바짝 따라오고 있어서······.”

팀 역사상 최초의 정규 시즌 우승 도전.

그 막중한 과업이 선수들의 어깨를 짖누르는 상황에서 최수원이라는 사기유닛이 올해를 끝으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거라는 위협까지 함께했다. 심지어 21세기 마린스의 역사 그 자체인 이규만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작년의 디펜딩 챔피언인 돌핀스는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체력 안배고 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라커룸에 새롭게 들어온 짐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반겼다.

9월 확장 엔트리.

MLB 확장 로스터처럼 26인에서 쪼잔하게 2명 늘려서 28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화끈한 5인 추가.

물론 KBO의 경우 MLB와 비교해서 주전급 선수와 대체급 선수의 수준 차이가 극심하여 확장한 5인을 제대로 활용하는 경우가 적다는 비판을 받고 있긴 했지만 지금 마린스처럼 빡빡하게 선수단이 운영되는 상황에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지원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유망주들 위주로 경험을 쌓게 해준다는 개념으로 올린 선수들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남은 26경기. 1등을 사수하여 통합 우승을 노리겠다는 집념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시즌 초반 브레이브스와의 트레이드 이후 2군으로 내려갔던 투수 최고참 곽재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배, 오래간만입니다. 요즘 대활약 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대활약은 무슨······.”

“에이, 당장 모레 선발로 올라간다면서요.”

2군으로 밀려났다가 확장 로스터로 1군에 합류한 선수였다.

충분히 어려울 수 있었지만 이정훈은 항상 그렇듯 스스럼이 없었다. 그리고 곽재영 역시 이정훈이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비꼼이 섞인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좋네요. 솔직히 마린스 역사상 최초로 정규시즌 우승에 도전하는 상황인데 선배가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좀 그렇죠.”

올해 35세.

곽재영 역시 많은 마린스의 프랜차이즈들이 그렇듯 전성기의 기량을 쓸데 없는 곳에 소모했던 남자다. 지금에야 똥볼이나 던지는 투수 취급이지만 그 역시 젊은 시절에는 현재까지 KBO에서 딱 9명밖에 달성하지 못했던 무결점 이닝까지도 기록한 적이 있는 파이어볼러였다.

“어? 수원아. 일찍 출근했네? 어제 등판해서 피곤할 텐데 좀 천천히 출근 하지.”

“차가 안 막혀서요. 오늘 택시 기사님이 길을 기가 막히게 뚫고 오시더라고요.”

“뭐야? 또 택시 탄 거야? 운전면허 그거 안 어렵다니까? 그냥 쉬는 날에 틈틈이 했어도 벌써 땄겠다. MVP로 차도 하나 있으면서.”

“저 돈 많아서요. 오늘도 모범 탔습니다.”

“으이그, 자랑이다. 아무튼 여기 재영 선배랑 애들, 아니지. 너한테는 전부 선배들이구나. 아무튼 상동에서 올라왔어.”

올해를 끝으로 KBO를 떠날 것이 거의 확실한 괴물.

곽재영이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까 망설였을 때 한 번 더 힘을 내게 했던 그 괴물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최수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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