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가장 위대한 것(4)
결과적으로 봤을 때 잘 끝났다.
선수단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하나가 됐고 우승을 목표로 하는 단단한 결심도 엿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일까?
그럴 리가.
세상일이라는 것이 뭐든 저질렀으면 그 댓가가 따라야 하는 법이다. 단장은 아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그에게 알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난 야구만 했던 사람이고 이렇게 얍삽하게 마치 내 몸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감독에게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압박할만한 재주 따윈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재주를 가질 이유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내 수익을 에이전시한테 떼 주는 이유가 이런 귀찮은 일들 대신 처리해달라고 떼주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에이전시에 전화를 넣는 일이었다.
“그 친구, 그렇게 멍청한 친구가 아닌데. 아무래도 위에서 좀 강하게 쪼았나 봅니다. 빠져나갈 구멍 아주 크게 만들어 놓고 굉장히 소극적으로 움직인 걸 봐서는 그룹 차원까지는 아닐 것 같고 아무래도 박 사장 선에서 움직였던 게 아닐까 싶군요.”
“앞으로 뭔가 또 움직일까요?”
“하하, 그럴 리가요. 안그래도 말씀 주신 직후에 만나기로 약속 잡아놨습니다. 뭔가 또 움직이기는커녕 섣불리 멍청한 짓을 한 것에 대한 대가도 톡톡하게 받아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미리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설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멍청한 시도를 할 거라고 미처 생각 못 했던 제 잘못입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변호사님이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미래에 있을 일을 꿰뚫어 볼 수는 없죠. 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팀의 우승을 위해 선수단과 프런트 코치진이 모두 한 몸이 되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요.”
“네. 알겠습니다.”
***
“변호사님. 연락은 받았습니다. 헌데 무슨 일로?”
“하하, 무슨 일이기는요. 그냥 단장님 얼굴 못 뵌 지도 오래되고 해서 찾아뵌 거죠. 게다가 우리 최수원 선수도 특별히 신경을 써주고 계신다고 들어서요. 제가 밥이라도 한 번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하.”
“어휴, 밥은 제가 사야죠. 최수원 선수 덕분에 팀 성적이 아주 쑥쑥 올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뭐, 워낙에 잘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이 정도로 폭격을 할 거라고는······. 야구에서 선수 하나가 정말 팀을 우승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걸 실제로 해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감탄밖에 나오지를 않더군요. 사장님께서도 특별히 신경쓰라고 저에게 아주 신신당부를 하시지 뭡니까.”
“하하, 그랬군요. 그게 다 사장님의 배려였군요. 하지만 그것 역시 단장님의 세심함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사장님이 거기까지 신경 쓰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대화의 내용은 분명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주고받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결코 표면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최수원의 에이전시인 김태근도 그리고 마린스의 단장인 전상익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왔냐?
-너 수 쓴 거 다 알고 있다. 왜 그랬냐?
-진짜 우승까지 멱살 잡고 갈 줄 몰랐다. 그래도 2년은 뛴다고 사장 설득해서 계약금으로 20억 준 건데 지금 난리도 아니다. 이대로면 박 사장 모가지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박 사장 핑계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전상익 단장이 답했다.
“이거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평가에 부응하려면 제가 뭔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바라는 게 뭔데?
김태근이 환하게 웃었다.
“하하, 단장님이 그런 마음을 선수단이 이해한다면 한 몸이 돼서 우승을 위해 정말 더 열심히 달릴 텐데 말이죠. 참······. 이 마음이라는 것이 전달되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뭔가 마음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그 엘리츠는 전 구단주께서 우승을 위한 그 집념을 표현하려고 무려 30년 전에 8천만 원짜리 롤렉스를 한국시리즈 MVP에게 수여하겠다. 뭐 그런 게 있었다죠? 당시에 잠실에 아파트 한 채 가격이었다고 하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거의 20억 정도 되는 느낌일 텐데. 확실히 마음을 표현하는 건 어렵지만 그렇게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면 우승을 향한 의지같은 게 잘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저도 회사에서 저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연봉 협상 때 실감하거든요.”
-돈 내놔.
“마침 타이밍이 딱 좋군요. 안 그래도 모그룹 쪽에 우승 보너스에 관해서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 않겠나 건의를 해볼 생각이었거든요. 역대급으로 우승 보너스를 내줄 생각이다. 라고 말이야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게 그냥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과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는 건 조금 다르니까요.”
“우승 보너스면 그래도 배당금이 가장 큰 덩어리 아닙니까? 그건 결국 포스트시즌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뭐 진출 팀에 따라서 좀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정해진 금액선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다만 KBO의 규약인 50%를 가득 채우는 건 물론이거니와 배당률에서 한국시리즈 MVP에게 조금 더 특별한 금액이 가도록 조율을 해보겠습니다.”
김태근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이런 와중에도 개수작을 부리려고 한다. 수원을 컨트롤해서 우승 동력을 약하게 만들기 힘들어지니까 이번에는 보너스를 갖고 장난질이다. 총액이 정해져있는 상황에서 MVP에게 추가 보너스를 준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보너스를 깎는다는 이야기다. 만약 MVP가 경쟁이 가능하다면 선수들의 동기 부여가 될 수도 있지만 현재 마린스의 구도는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오히려 동기를 깎아 먹기 딱 좋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못 받게 될 다른 선수들의 동기가 조금 약해지지 않을까요? 뭐 모그룹의 보너스 50%를 못 채우는 구단들도 있다지만 마린스 정도면 50% 채우는 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어휴, 그거야 당연히 고려해야죠. 내년의 고과점수에 특별가점을 신설하자고 건의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우승을 하게 되면 무려 34년 만의 우승 아니겠습니까. 월드컵도 첫 4강일 때는 없던 법을 만들어서 병역 면제를 시켜주는 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단장님이 그 정도로 신경을 써주신다니 참 감사할 뿐입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웃었다.
한 사람은 진심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대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막막함으로.
***
“대박!! 와, 대박 소식!!”
“이정훈 갑자기 또 왜 호들갑이야. 왜? 뭐 서면에 새로운 클럽이라도 오픈 했어?”
“아이 참. 경준 선배. 제가 클럽 끊은 게 벌써 몇 달째인데요. 안 그래도 요즘 무슨 일 있냐고 서비스 팍팍 준다고 난리에요. 아니,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완전 대박 소식입니다.”
“뭔데?”
“민선이랑 커피 한 잔 하다가 나온 정보인데요. 우리 우승 시에 고과에 추가점 내주는 거 검토해보라고 지시 내려왔답니다.”
“엥?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미선이는 또 누구고. 우승을 하면 보너스가 나와야지 고과는 추가점을 왜 주는 건데?”
“미선이가 아니라 민선이. 왜 그 인사팀에 이번에 경력직으로 새로 들어 온 주임 있잖아요.”
“그 키 크고 얼굴 뽀얀 애?”
“네.”
“정훈이 네가 걔랑 커피를 왜 마셔?”
“그거야 밥을 같이 먹었으니까 커피도 마시는 거죠.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고과에 추가점이죠. 보너스는 당연히 50% 풀로 내려올 거고. 구단에서 그 외로 돈을 더 풀겠다는 거니까요.”
서경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야, 근데 그러면 그거 FA로 계약한 선수들이랑은 아무 상관 없는 거잖아.”
“에이, 선배. 3년 27억이나 받으면서 뭐 그런 걸 욕심을 내고 그럽니까. 그만큼 받으면 추가로 받아봐야 세금 떼면 절반 조금 넘게 들어올 건데. FA까지 한참 남은 애들 돈 더 받으면 좋은 거죠.”
“아니, 그건 그런데······. 야, 이정훈 너야 아직 젊고 혼자니까 괜찮겠지만 난 애가 둘이잖냐. 빡빡하다고.”
“그러면 열심히 해서 우승 보너스 챙겨 가시면 되겠네요. 들어보니까 그거 감안해서 그 우승 보너스도 3등급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한 5등급 정도로 세분화해서 나눠 줄 모양이던데.”
“엥?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건데? 인사팀에서 그런 것도 하는 거야?”
“아뇨, 그건 운영팀 선영이한테 들었는데요.”
“운영팀 선영이면 박 대리?”
“오, 선영이는 알고 계시네요. 하긴 같이 몇 년을 생활했는데.”
“그러게. 걔도 신입 때는 진짜 어리바리했는데 요즘은 일 꽤 잘하더라고. 아주 똑부러져. 근데 아니, 잠깐만. 넌 운영팀 박 대리한테는 또 그런 걸 어떻게 들은 거야?”
정훈 선배가 몰고 온 소식으로 라커룸이 시끌벅적하게 달아올랐다.
특히 표정이 밝아진 것은 아직 FA까지 한참 남은 저년차 저연봉 선수들이었다.
“그러니까 작년 기준으로 하면 거의 1억5천에, 거기다가 고과 점수에 플러스까지 되면······.”
“쪼유 김칫국 그만 마시고 와서 방망이나 휘두르지?”
“김칫국이라니!!”
“일단 1억이고 2억이고 우리가 우승 했을 때 이야기잖아. 심지어 그것도 A급 한정으로 가능한 이야기인데 네가 A급 나올 수 있겠냐? 작년에 돌핀스에도 선수 중에서 A급은 꼴랑 일곱 명이었던 거 알지?”
“잔인한 시키. 굳이 지금처럼 행복한 꿈을 꿀 때 그걸 깨트릴 필요가 있겠냐? 이것도 다 동기 부여잖아. 동기 부여.”
쪼유가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구시렁거리며 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동기부여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지. 어? 시즌 초반에 출장 경기수가 적어서 A급 받기 힘든 상황이면 포시에서 대활약해서 A급 받으면 되잖아.”
“뭐야? 병주고 약주고도 아니고. 산통은 다 깨놓고 이제 와서 왠 우쭈쭈?”
“우쭈쭈가 아니라 와서 방망이를 휘두르라는 거다. 감 왔다면. 혹시 알아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경기에 멀티홈런이라도 치면 어? 시리즈 MVP라도 따낼지? 그거 보너스도 따로 있는 거 알지? 내가 봤을 때 그거 하면 A급도 무조건 가능하겠다.”
“A급에 시리즈 MVP 보너스까지 다하면······.”
절정에 다다랐던 무더위도 슬슬 한풀 꺾이기 시작한 시점.
방망이를 휘두르는 쪼유의 몸에 활력이 넘쳤다. 물론 몸에 활력이 넘치는 것은 쪼유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프로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동력은 돈이다.
누군가는 커리어 내내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던 우승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또 누군가는 메마른 지갑을 촉촉하게 적셔줄 보너스를 위해서.
또 누군가는 앞으로 쌓여갈 자신의 커리어를 생각하면서.
시즌의 7부 능선을 넘은 시점.
팀 마린스가 ‘우승’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드디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
2승 1패.
1승 2패.
2승 1패.
2승 0패.
2승 0패
1승 1패.
2승 1패.
2승 1패.
그리하여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제법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을 때.
“엄마!! 내 점퍼!!”
“무슨 점퍼?”
“아니, 내 마린스 가을 점퍼!! 분명 내가 농 한쪽에 뒀는데!!”
“아, 그거? 진작에 버렸잖아.”
“아!! 엄마!! 왜 내 옷을 마음대로 버리고 그래!! 두 번밖에 안 입어서 거의 새건데!!”
“얘가? 너 그거 재작년에 농 정리할 때 필요 없다고 버리라며. 8년이나 안 입었으면 필요 없는 옷이라고.”
마린스의 팬들이 무려 10년 만의 가을 야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