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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03화 (203/305)

203화. 가장 위대한 것(3)

최수원은 이정훈이 당연히 남들에게 떠들고 다닐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 예측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라커룸에 앉은 이정훈이 바로 자기 옆자리에 앉은 정지운에게 속닥거렸다.

“야, 라온아. 수원이가 그러는데 애초에 이야기가 돼 있었다더라. 수원이는 팀 우승이고 뭐고 아무 상관 없이 미국 가는 거래.”

“형,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요.”

“진짜야. 수원이가 직접 말해준 거라니까.”

“그거야 선배가 하도 수원이 귀찮게 구니까 그냥 대충 한 이야기겠죠.”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최수원 20억. 너무 의미심장하지 않냐? 역대 최고액이 10억 5천인데 갑자기 자릿수가 달라지는 게 너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 연봉 3천 올려주네 마네 하면서 깐깐하게 구는 프런트에서?”

다만 최수원이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은 본래 소문이라는 것은 사람의 입을 거치는 순간 불어나기 마련이라는 점. 그리고 이정훈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떠벌릴 때 불어나는 이야기의 강도는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상당히 유동적이라는 점이었다.

“잘 생각을 해봐. 애초에 20억이라는 금액도 아무리 역대급 신인이라지만 말이 되는 금액이잖아? 근데 봐봐. 지금 20억 내준다고 해도 어차피 수원이가 천만 달러만 받으면 그거 20%니까 26억. 마린스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수원이 공짜로 사용하고 6억 버는 거라고. 솔직히 1픽 한 자리 값으로 6억이면 달달하지.”

“아니, 잠깐만요. 근데 지금 그것도 설마 수원이가 그렇게 말한 거에요?”

“······. 꼭 그런 건 아닌데. 이게 정황 증거가 그렇다 뭐 그런 거지.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이거 백퍼 그 미국쪽 구단에서 우리 구단한테 항의라도 한 것 같아.”

“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그것도 수원이가 한 말이에요?”

“어, 이건 진짜 수원이가 좀 그렇게 말했는데. 솔직히 우리 구단 입장에서는 어차피 시즌 끝나면 미국 갈 거 굳이 관리 빡빡하게 해줄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사실 평소였다면 강라온 역시 이정훈의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신빙성 있게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 이상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도 좀 묘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정훈의 분위기가 달랐다.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가십을 이야기하는데 즐거워 보이기는커녕 뭔가 묵직하다.

“솔직히 수원이한테 그런 이야기들 듣는데 좀 착잡하더라.”

“뭐가요?”

“아니, 그렇잖아. 애초에 미국 가기로 돼 있던 애가 진짜 대충 뛰어도 상관없는데, 어떻게든 우승해보겠다고 선발도 안 거르고, 매일 타자로 그렇게 치고 달리고 최선을 다하는데 정작 KBO에서 계속 뛰어야 하고 당장 2년 후에 또 FA 생각해야 하는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뭐 그런 생각? 저런 워크에식이 성적의 원인인가? 뭐 그런 생각도 좀 들고.”

평소였다면 수원이랑 성적 차이 나는 건 단순히 워크에식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재능 차이가 넘사벽이라며 가볍게 말을 받았을 상황. 하지만 쉽게 보기 힘든 이정훈의 진지한 표정에 강라온은 차마 그런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아니, 심지어 이정훈의 말을 곱씹어 보며 수원이의 행동을 반추하게 됐다.

“아!!”

“왜?”

“아니, 수원이가 우승을 왜 하고 싶어 했던 건가 좀 생각을 해봤는데······.”

강라온의 시선이 힐끔 이규만에게 향했다.

“예전에 수원이가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규만 선배가 그래도 은퇴 전에 우승 반지 하나는 끼워봐야 하지 않겠냐고. KBO에서 대부분 다 이룬 양반인데 커리어에 우승 반지 하나 없는 게 어디 말이 되냐고요.”

본래 이야기라는 것은 사람의 입을 타며 점점 불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그 시작부터 한 서너 명 정도 입을 탄 것 같이 시작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이규만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때 최수원은 그를 원하는 미국 구단과 거기에 편승한 의문의 국내 세력. 그리고 그들의 술수에 놀아나는 멍청한 마린스 프런트들까지 참으로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직 우승을 위해 달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34년 동안 오매불망 우승을 기다려온 마린스의 팬들. 그리고 23년의 커리어 동안 반지 한 번 껴본 적 없는 못난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이규만은 자신을 반성했다.

저 어린 열아홉 살짜리 신인마저도 주변을 저렇게 생각했거늘 주장이라는 녀석이······. 심지어 저 녀석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위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헌데 그는 어떤가. 스스로 커리어의 완성에만 너무 목을 맸다.

우승?

그래 물론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34년을 기다려온 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23년의 커리어에 방점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아니, 어쩌면 우승이라는 방점보다 은퇴의 시점에서 팀의 발목을 잡는 성적이 아니어야 한다는 강박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자, 1회 초 노아웃. 3루에는 이정훈. 그리고 2번 타자 강라온이 올라옵니다.]

[강라온 선수. 지난 7월 한 달 타격 성적이 상당히 저조했었는데요. 덕분에 한때 잠시 7번 타순을 맡기도 했었는데 이제 다시 2번으로 올라왔단 말이죠. 마린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대해볼 만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를 바득바득 간다고 갑자기 없던 타격 능력이 샘솟을 수는 없다.

하지만 99도의 물을 끓게 하는 데는 약간의 화력이면 충분한 것처럼 그 묘한 타격의 사이클이라는 녀석이 내려갈 만큼 내려갔다가 바닥을 찍고 꿈틀대기 시작하는 타자의 뭔가를 건드리기에 그 약간의 자극은 충분한 요소였다.

강라온이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 조금 밋밋하게 들어온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았다.

-딱!!!

2, 3루 간을 꿰뚫는 적시타.

마린스가 매우 가볍게 선취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야, 진짜냐?”

“뭐가?”

“메이저에서 1,000만 달러 약속이 된 상태인데 국제 유망주 슬롯에 문제가 생기면서 좀 꼬여서 1픽 권한 가진 마린스랑 물밑 협상으로 1년 뒤로 미루기로 했고, 너도 동의해서 마린스는 거의 공짜로 너 사용하는 대신에 포스팅 비용만큼 다 너한테 보전해주기로 했다며.”

“쪼유, 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드래프트 1라운드권을 그렇게 버린다고?”

“아니, 이미 내부적으로 네 타격 실력은 메이저급이라고 판단이 된 상태라서 용병 타자 하나 슬롯 안 비우고 심지어 공짜로 1년 쓴다는 개념으로 데리고 왔다고 그러던데? 근데 넌 팬들이랑 규만 선배 생각해서 어떻게든 우승하려고 좀 무리를 했고. 그래서 저기 미리 약속된 메이저 구단에서 네 출장에 제동 건 거라고. 아니야?”

당연히 아니다.

내가 이정훈에게 이야기한 것은 ‘팀이 우승을 막으려고 나의 출장을 제어하는 건 아닐 거다. 그거랑 상관없이 아마 시즌이 끝나면 나는 미국으로 떠날 것 같다.’ 이게 전부였다. 괜히 지금 좋은 분위기의 팀이 구단과 다툼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통합우승은 해야 했으니까.

근데 이야기가 퍼지는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구체적으로 터무니 없는 이야기들이 생성이 된 걸까? 모든 걸 다 떠나서 국제 유망주 계약인데 대체 1,000만 달러는 어디서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분위기 이 모양인 게 그런 소문이 퍼져서 그런거다. 뭐 그거네?”

“어, 솔직히 선배들도 좀 그렇지. 진짜 올해 뛰고 바로 미국 가는 거면 막말로 넌 우승이랑 아무 상관 없는 거잖아. 솔직히 지금 푹 쉬다 가도 똑같을 텐데 말이야. 근데 어떻게든 우승하려고 며칠 전에 감독님 찾아가서 출장시켜달라고 한 번 들이박기까지 했다며. 하여간, 새끼가 학교 다닐 때부터 들이박는 거 하나는 세계 최고라니까.”

“어? 내가?”

“새끼가, 부끄러워하기는.”

아니, 분명 며칠 전에 감독님과 면담을 하긴 했는데 딱히 들이박지는 않았는데. 라고 이야기하기에 지금 나와 쪼유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선배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사실 지금 팀 분위기가 썩 나쁘지도 않았고.

쪼유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솔직히 다들 생각하고 있을걸? 지금 너 있는데도 이렇게 간신히 1위 달리고 있는데 너 당장 내년에 사라지면 평생 기회 안 올지도 모른다는 거. 선배들도 이제 좀 급해진 거지. 나도 좀 그렇고. 규만 선배 봐봐. 리그 최정상급으로 23년을 뛰었는데 결국 우승 반지 하나 없잖아. 얼마나 미련이 남겠냐.’

그래, 뭐랄까?

사실 마린스는 간절함이 좀 부족하긴 했다.

물론 팬들은 34년 동안 한 번도 우승을 못 한 간절함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자기들이 34년 동안 우승 못 한 게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런 우승 없어도 그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서 그런가? 꼭 지금 우승하겠다는 그런 간절함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계속 이 팀에서 뛰는 동안에는 꾸준히 기회가 올거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가장 간절해야 할 올해 은퇴하는 규만 선배도 우승만 없지 커리어가 워낙에 짱짱해서 ‘우승이 너무 간절하다.’까지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화룡점정으로 우승이 있으면 참 좋겠다.’ 정도랄까?

뭐, 본인이야 정말 간절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그러했다. 진짜 간절했으면 지금과 같은 타이밍에는 여유롭게 허허 웃으며 애들을 풀어줄 게 아니라 그 짱짱한 커리어와 팀 내 입지를 이용해서 좀 더 바짝 조였을 테니까.

“아무튼 오늘은 형님도 아주 제대로 활약해줄 테니까 기대해라.”

“설마 2호 홈런 도전하려고? 야, 그러지 마. 네가 무슨 홈런을 친다고······.”

“아니, 단순히 2호 홈런이 아니야. 오늘은 멀티홈런으로 간다.”

“지랄 났다.”

“야, 진짜 완전 감 잡았거든? 내가 지난번에 홈런 쳐보니까 감이 오더라. 아 이렇게 해야 홈런이 쳐지는구나. 뭐 그런 감각?”

“쪼유 넌 약을 잘 못 먹은 거냐? 아니면 먹어야 할 약을 빼먹은 거냐?”

-딱!!!

5번 타자로 출장한 규만 선배의 진루타.

아, 진짜 발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안타였을 텐데 새삼 아쉬웠다. 그래도 저 선배 요즘 방망이 휘두르는 거 보면 나쁘지 않았다. 뭐랄까? 좀 많이 내려놨달까? 이전보다 본인의 존을 좀 더 많이 좁혀서 꽉 찬 공에 그냥 스트라이크를 주는 경우가 늘긴 했지만 애초에 그런 코스로 완벽하게 들어오는 공은 많지 않다. 삼진이야 좀 늘어나겠지만 대신 BABIP이 좀 높아지지 않을까?

경기가 제법 유리하게 흘러갔다.

“아, 까비······.”

“야, 까비라는 말은 그래도 공이 최소한 워닝트랙 근처까지는 가고 해야 하는 말 아니냐? 방금 그 건 거의 내야뜬공 수준이었잖아.”

“아니, 공이 조금만 더 낮게 들어왔어도 백 퍼 홈런 각이었는데.”

“쪼유야, 넌 제발 양심 좀······.”

물론 그 유리한 흐름에 조유진은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강라온이나 이정훈 심지어 서경준에 정지운까지 정말 매서운 방망이를 보여줬다. 나의 빈 자리를 완전히 메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과장 조금 보태 절반 정도는 메운 수준이었다.

아직 낮 최고 기온 37도를 웃도는 무더위. 해가 졌음에도 33도를 넘어가는 기온 속에서 마린스의 모든 선수가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오늘 선발로 나왔던 작년의 마린스 토종 최다승 투수 한명훈은 7이닝 동안 고작 1점을 내주며 이번 시즌 가장 훌륭한 피칭까지 보여줬다.

내가 봤을 때 다른 사람들은 진짜 내가 미국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상관 없는 우승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 자극을 받았다면, 한명훈 쟤는 그러면 내년에 선발 한 자리 무조건 빈다는 생각에 눈도장 찍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생각이야 어쨌건 결과가 좋으니 다 괜찮았다.

그리고 8회.

-딱!!!

규만 선배가 시즌 17호 홈런을 쳤다.

승리를 확정 짓는 2점 홈런이었다.

[이규만 “현재 팀의 분위기는 최고. 우리는 우승을 할 자격을 갖췄고 거기까지 달려 나갈 준비 역시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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