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가장 위대한 것(2)
“최수원 선수, 이번 경기 선발 명단에서 제외가 됐는데 혹시 이에 관해서 뭔가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선수 기용은 전적으로 감독님의 권한과 판단입니다. 선수인 제가 왈가왈부 할꺼리는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최근 각종 타격 지표에서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워나가고 계신데요. 한 타석 한 타석이 중요한 상황에서 이렇게 되면 지켜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참 안타깝거든요.”
미리 약속된 인터뷰도 아니었다.
내용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스타팅 제외 된 사람한테 와서 팬 입장에서 참 안타깝습니다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건 마치 기말고사 망한 학생한테 큰아버지 입장에서 참 안타깝다라고 말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다.
저 멍청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기자도 사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긁는 거다. 어리숙한 애송이들이라면 여기에 발끈해서 뭐라 한 마디 하는 거고 그게 곧 기사가 되는 거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보통 경기 전 약속되지 않은 인터뷰는 하지 않겠습니다. 같은 반응 하면서 들어가면 유명세 좀 얻더니 건방져졌다 같은 뒷담을 듣게 되는 거다.
나도 짬밥 안되던 시절. 그리고 이런 거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던 KBO 시절에는 참 많이 당했다. 구단 프런트며 여기저기서 수습해주고 어쩌고 하면서 골머리 좀 썩였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KBO에서 뛰던 짬밥 안 되던 나의 이야기다. 메이저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매우 달라졌다.
사실 한국에서 뛰던 시절에는 나도 미국에 좀 환상 같은 것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근데 미국에서 뛰어 보니까 기자라는 족속들은 한국이건 미국이건 크게 다르지 않더라.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미국 쪽이 더 거지 같기도 하다. 테드 윌리엄스가 기자들이랑 다투는 바람에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랑 조 고든한테 MVP 뺏긴 것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MVP 놓친 것 중에 한 번은 그냥 기자 중에서 우리 팀을 싫어하는 놈들이 있어서 나한테 2위 표도 아니고 무려 9위를 주는 바람에 거기서 14점이 빠지면서 MVP를 놓친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거 빅리그에서 오래 뛴 베테랑들이 괜히 기자들이랑 원만하게 지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구나.
기자들은 무엇을 바라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트래픽이다.
그러니까 얘들은 뭐 특별히 이게 궁금하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화제가 될만한 이야깃거리면 다 괜찮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정답은 간단하다.
“저는 감독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팬들이 안타깝게 생각할만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방금 그 말씀은 한 경기 정도는 빠지더라도 기록을 세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뭐 그런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그건 너무 거만한 것 같고요.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이 정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제가 오늘 스타팅이 아니더라도 또 신인이라 연습에 늦는 건 곤란해서요. 그러면 박 기자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경기장 안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인터넷 포탈에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감? 아니면 자만심? 최수원의 호언장담 “하루 정도 빠지더라도 내 기록에는 아무런 문제 없어.”]
[최수원 “선수 기용은 감독의 몫. 컨디션에는 아무 문제 없어.”]
“아, 이 새끼들 진짜······.”
아무래도 내가 한국의 기레기를 너무 얕봤던 것 같다.
이 새끼들 진짜 한 문장 요약 거지같이 하는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네.
***
“여어, 이게 누구신가? 하루 정도 빠지더라도 기록에 아무 문제 없는 대타자 최수원님 아니십니까.”
“아, 정훈 선배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기자한테 대꾸는 왜 하냐? 그냥 무시하고 달려 오지.”
“그거 괜히 그랬다고 걔들 또 동영상으로 올리면 어쩌려고요. 그래도 기사 제목만 개떡같지 내용은 제대로 썼으니까······.”
“내용 안 읽고 제목만 보는 사람들 쌔고 쌨다. 그리고 국평오 모르냐? 아무리 내용 읽어도 제목이 저따위면 그냥 저렇게 생각한다고. 심지어 이 바닥 놈들은 국어 평균 오등급이 아니라 한 구등급 정도 된다고. 수원이 내가 봤을 때 너 남은 시즌 개빡세겠다.”
“어차피 그거 아니더라도 빡센 건 마찬가집니다. 그냥 선배만 안 놀려도 그 빡셈이 절반은 사라질걸요?”
“미안하다. 난 후배는 강하게 키우는 주의라서.”
이정훈이 싱글벙글 웃었다.
수원이 워낙에 터무니없는 성적을 내는 터라 뭔가 묘하게 어려운 녀석인데 또 이럴 때 보면 좀 후배 같기도 했다.
“야, 그런데 수원아.”
“네?”
“너 내가 입 무거운 거 알지?”
“네? 선배 입이 무겁다고요? 전혀 금시초문인데요?”
“그러니까. 얼마나 입이 무거우면 내가 입이 무겁다는 소문조차 안 나겠냐. 그래서 말인데. 너 진짜 팀이랑 계약할 때 이면 계약으로 포스팅 관련 조항 넣었냐? 형한테만 살짝 말해봐봐. 내가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비밀로 할 테니까.”
“아, 그런 거 없습니다. 대체 그런 헛소문은 어디서 듣고 오신 겁니까? 여기가 무슨 메이저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도 아니고. 신인이 계약하는데 그딴 조항을 넣는다고요? 선배, 제 계약금 얼마인지는 아시죠?”
“알지, 20억. 근데 소문이 워낙······. 게다가 듣기로는 위에서 너 적당히 쓰라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그러고.”
“그런 소문은 대체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왜? 궁금해? 하, 이거 진짜 비밀인데. 내가 딱 너한테만 해주는 이야기인데 내가 저기 프런트쪽이랑도 좀 친하잖냐. 근데 얼마 전에 단장님이랑 감독님이 둘이 만났는데 뭐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걸 운영팀에 박대리가 들었다는 거야.”
수원이 원래도 확신했지만 한 번 더 확신했다.
이정훈 이 녀석 진짜 입이 거의 무슨 깃털이다.
“박대리 님이면 그 단발에 얼굴 뽀얗고.”
“그래, 운영팀에서 제일 예쁜 걔.”
“사귀시는 겁니까?”
“아니, 사귀기는 무슨. 그냥 오다가다 인사하는 거지. 아무튼 뭐라더라? 마린스 징크스가 우승할 때 에이스 팔 갈아넣는 거라면서. 너 팔 갈리면 그거 징크스 거듭되는 거라고, 모그룹에서 그거 굉장히 싫어한다네? 그래서 관리 좀 하라고 이야기 했다더라.”
“그래요?”
“근데 좀 이상하잖아. 아니, 관리를 할 거면 어? 초반부터 좀 적당히 적당히 하던지. 우승 경쟁 한참 빡세게 하는 지금 시점에 갑자기 그런 이야기 한다는 게······. 게다가 뭐라더라? 그 진짜 우승은 정규시즌 우승이 아니라 코시 우승이라고. 아니, 그게 말이야? 정규시즌 우승을 해야 한국시리즈 직행이고 그래야 가능성도 더 높아지지. 게다가 통합우승이랑 그냥 우승이 같아? 그리고 솔직히 마린스 팬들 최대 숙원이 정규시즌 우승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마린스 정규시즌 우승 0회인 게 최대 약점이잖아. 안 그래?”
최수원은 이정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멍청한······’
그 비난은 단순히 단장이 뒤로 수를 썼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약간의 꼼수는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그리 깊숙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그 자신도 마린스가 진짜 우승에 도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구단 프런트의 목표와 팬의 목표는 조금 다르다. 구단의 목적은 팬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물론 성적은 그 수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그 성적이라는 녀석이 꼭 1등을 해야지만 하느냐를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건 이미 브레이브스가 오랜 기간 증명을 했다. 포시에 꾸준히 나갈 정도의 전력. 그리고 대권에 도전 가능하며 ‘운’이 따른다면 대권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라면 팬들은 기꺼이 자신의 지갑을 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모그룹이 없는 MLB나 브레이브스 같은 구단의 이야기다.
KBO의 구단들에게는 모그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들은 구단이 적자를 좀 보더라도 그룹의 이미지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런 상황에서 최수원 자신을 1년 더 써먹는 것과 마린스가 통합우승을 하고 대승적으로 멋지게 미국으로 보내주는 것.
그리고 정규시즌 우승은 결국 실패하고 2년 차에 볼넷 기록이나 꾸역꾸역 갱신하며 우승이고 나발이고 다 실패한 다음 MVP 2회 조건으로 미국에 보내주는 것.
둘 중 대체 어느 게 더 멋있을까?
심지어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시즌 끝나면 정말 수원을 대승적으로 미국에 보내줘야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통합우승 실패하고 수원을 1년 더 써먹는 시도를 슬금슬금 한다고?
게다가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그런 소문이 구단 내에 슬금슬금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얘들은 모두 하나가 돼서 우승을 향해 달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데 구단에서 우승을 막는다는 소문이 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못 하는 걸까?
최수원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 일단 이 헛소문의 방향을 틀어보자.
“선배, 제가 생각할 때는 이거 아무래도 제 미국 쪽 에이전시가 팀에 요청을 한 것 같아요.”
“엥? 너 뭐 이면 계약 같은 건 없다며.”
“하, 선배. 이거 진짜 비밀입니다. 절대 어디 가서 말씀 하시면 안돼요. 사실 우승이니 뭐니 하는 이면 계약이 아니라 그냥······.”
***
호크스와 마린스의 2차전
오늘 경기 호크스의 선발 투수인 워런 비텔은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승리를 하겠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86년 동안 우승하지 못했던 보스턴이 혹은 108년 동안 우승하지 못했던 컵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눈빛이 저랬을까?
살기.
그래, 그것은 단순히 오늘 경기에서 이기겠다는 의지를 넘어 상대를 철저히 부숴버리겠다는 살기에 더 가까웠다.
‘뭐야? 한 경기 졌다고 뭐 저리 살벌해? 쟤들 아직 2위랑 3경기나 차이 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오늘 뭐 포스트시즌도 아니잖아.’
선두 타자로 타석에 선 것은 이정훈.
그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마운드의 투수를 노려봤다.
-꿀꺽.
그리고 경기장에서 이정훈을 지켜보는 팬들이 침을 삼켰다. 지금 타석의 이정훈이 보여주는 표정은 그에게서는 쉽게 보기 힘든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초구.
-뻐엉!!!
“스트라잌!!!”
이정훈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방망이를 한 바퀴 돌렸다.
-부웅!!
그리고 다시 타석에 섰다.
초구를 허망하게 흘려보냈음에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뭔가 한 방 해낼 것 같은 느낌.
선두 타자 홈런도 가능할 것 같은 단단한 각오.
두 번째 공이 존을 스쳤다.
-딱!!!
3루 내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파울볼.
볼카운트 0-2.
그리고 관중석의 팬들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분위기 탓에 잠시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언제나 뭔가 한 건 할 것 같은 기대를 품으면 그것을 완벽하게 배신하고,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품으면 또 그것도 배신하는 배신의 아이콘 같은 사내라는 것을.
타석에 선 이정훈이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그는 여전히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마운드의 투수를 압도하는 기세였으며 이정훈답지 않은 단단한 각오였다.
그렇기에 그를 지켜보는 팬들은 생각했다.
“아, 망했네.”
마운드의 워런 비텔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그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고 마린스 놈들이 비장한 분위기를 풍겨봐야 마린스다. 애초에 쟤들 이번 시즌 저렇게 잘 나가는 것도 그냥 최수원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탓 아니던가. 타선에서 최수원이 빠지는 순간 마린스는 그냥 예전의 마린스다.
124.8km/h의 절묘한 체인지업.
뭔가를 할 것 같으면 실패하고, 실패할 것 같으면 해내는 역배당의 사나이 이정훈.
사람들의 기대가 사라진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시원한 타격.
공이 쭉쭉 뻗어 나갔다.
“어?”
우측 외야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안타.
이정훈이 3루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