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고비(6)
“그러니까. 내가 살다살다 그딴 폼으로 홈런 치는 꼴까지 보게 될 줄이야······. 아니 대체 그게 왜 넘어 간 거야?”
“글쎄요? 실력이 폼을 초월한 순간이랄까요?”
“지랄. 진짜 쪼유 넌 그런 몸뚱이로 낳아주신 부모님께 평생 감사해라. 아니, 대체 어떻게 대가리가 먼저 돌아가는데,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어쨌거나 이제 앞으로는 조유진 홈런 치는 소리라는 말은 못 쓰겠네?”
“아니, 잠깐만요. 그런 말이 있었어요?”
깔끔한 승리에 덕아웃이 부산스러웠다.
선수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엿보인다.
“자자, 오늘 모처럼 대구까지 왔는데 뭉티기랑 오드레기 함 무야지.”
“어, 저 생고기 좀 그런데요.”
모처럼 멀티 안타를 기록한 서경준이 기분 좋게 밥 먹으러 가자고 소리쳤는데, 이정훈이 태클을 걸었다.
“마, 남자 새끼가 입이 와 그리 짧노.”
“제가 육회도 싫어하는 스타일이라서. 대신 생고기 싫어하는 애들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야, 우리는 막창으로 먹자. 대구는 역시 막창이지.”
서경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규만 선배가 둘의 사이를 중재했다.
“애들도 아니고 뭐 먹는걸로 싸우고 그러냐. 다 먹으면 되지. 1차로 막창 먹고, 2차로 뭉티기 먹으러 가자. 뭉티기 좀 그런 애들은 오드레기로 먹으면 되고.”
“역시 행님. 아이디어가 쥑입니다.”
대체 규만 선배의 말 어디에 아이디어가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규만 선배 못지 않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서경준이 다 먹자는 이야기에 반색했다.
“수원이도 오늘은 같이 가는 거지?”
“당연하죠. 우리 영혼의 배터리가 나란히 홈런을 친 날인데. 수원아 갈꺼지?”
“쪼유 네가 사는 거냐? 마수걸이 홈런 기념으로?”
“어······. 어?”
“뭐야? 규만 선배. 오늘 쪼유가 마수걸이 홈런 기념으로 다 쏜다는데요?”
“정말? 이야, 쪼유 통이 크네. 아버님이 건물주이신가? 오늘 1, 2차 다 쏘면 쪼유 연봉 반토막 나는 거 아니야?”
“쪼유도 나름 2라운드라 계약금 두둑하게 받았잖습니까. 거기다가 수원이한테 비싼 시계도 받았고요. 연봉 정도는 반토막 나도 괜찮죠.”
쪼유가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얼굴에 표정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난다. 뭔가 매일 얻어 먹었으니 진짜 사야하나? 하는 생각 절반. 그래도 이거 고기 구워 먹는 거면 보통 비싼 게 아닐 텐데 하는 생각 절반이다.
“야야, 아 좀 그만 놀려라. 울겠다.”
“마, 형님들이 진짜 너한테 사라 그러겠냐? 와서 그냥 열심히 먹기나 해라. 안 그렇습니까 규만 형님?”
“······. 그래, 얼른 가자.”
***
-똑똑
“감독님. 최수원입니다.”
“그래, 들어와라.”
김대철 감독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종이로 된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는 조금 오래된 사람답게 구단에서 지급된 태블릿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로 된 서류들을 선호하곤 했다.
“부르셨다고요.”
“그래, 요즘 날도 더운데 몸은 좀 어떠냐. 듣기로는 체중이 4.5kg이나 빠졌다고 들었는데.”
“아, 어제 등판 직후에 그랬었고 다시 좀 복구했습니다.”
수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즉석에서 가장 빠르게 사용되는 에너지원인 글리코겐은 몸에 저장되기 위해서는 1g당 3g의 수분이 필요하다. 격투기 선수들의 리바운딩이 보통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데 투수의 경우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등판일에 줄어든 체중 대부분은 그 고갈된 글리코겐으로 인한 체중 저하였다. 그냥 잘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체중 대부분이 회복된다.
“다행이구나. 여름이라 컨디션 관리가 좀 힘들 텐데 그건 괜찮고?”
“조금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이제 7부 능선도 거의 다 넘어가고 있으니까요.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김대철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7부 능선은 무슨. 이제 기껏해야 절반쯤 왔지. 한참 남았다.”
그래, 144경기 가운데 100경기에 가까운 경기를 소화하긴 했지만, 아직 한참 남았다.
“포스트시즌 말씀이시군요.”
“역시 바로 알아듣는구나.”
“네, 하지만 그건 어차피 한국시리즈 직행하면 2주 정도 쉬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일단은 정규시즌 우승만 목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대철은 최수원과 구단 사이의 이면 계약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최수원이 우승에 욕심을 내는 것이 그 ‘대승적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좋은 목표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네 다음 등판 한 번 거르는 걸로 하자. 지금 너 너무 지쳤다.”
“네?”
“어차피 우린 로테이션도 당긴 적이 없었으니까. 휴식일도 딱 맞아떨어지고. 네 로테이션 거르고 한 번 당겨서 돌릴 생각이다.”
“자, 잠깐만요. 감독님. 저 던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피곤한 건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다들 피곤하지. 하지만 그래도 선발 한 경기 뛰고 푹 쉬면 체중 복구해서 다시 마운드에 올라오지. 하지만 넌 지금 그 좀 복구했다는 몸무게도 거의 평소 체중에서 2kg 가깝게 빠진 체중이야. 마음 같아서는 아예 타격도 몇 경기 거르고 푹 쉬게 하고 싶은데······. 아무튼 다음 등판은 한 번 넘길 테니 그렇게 알아라.”
“······.”
“네가 지금 이렇게 널 불러서 내가 직접 이야기 해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한다면 그런 표정을 짓진 못할 거다.”
물론 그는 지금 감독이 자신을 이렇게 불러서 직접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그리고 그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은 김대철 감독 쪽이었다. 지금 수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가 얼마나 신인의 자세로 감독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알겠습니다.”
최수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굳이 메이저리그가 아닌 KBO를 선택한 것은 투타겸업을 통해 시즌을 치르는 ‘경험’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그 경험에는 지금처럼 빡빡한 상황에서 꾸역꾸역 투타겸업을 이어나가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빅리그를 간다면 그 스케줄은 KBO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힘든 순간에도 꾸역꾸역 경기를 뛰어 본 경험은 그에게 매우 큰 자산이 되어 줄 수 있다.
적어도 수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최수원이 출장하지 않았던 피닉스와 마린스의 화요일 1차전 경기.
마린스가 9:4로 피닉스를 크게 누르며 승리를 챙겨갔다.
***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나에게 휴식일을 부여하는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구속도 좀 떨어지고 있었고, 실제로 체중이 쭉쭉 줄어드는 것이 몸에 쌓아뒀던 지방을 미친 듯이 태우고 그걸로 모자라 근육까지 태우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있었으니까.
근데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을 잘하다가도 괜히 밤이 돼서 생각이 많아지면 타오르는 감정이라는 놈이 그 냉정한 이성이라는 놈을 슬쩍 이기기도 한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봤을 때 이거 올해 진짜 우승해서 나 바로 미국으로 뜰 것 같으니까 적당히 조절하려는 음모 같다니까. 어차피 올해랑 내년 MVP는 확정이니까 올해 아쉽게 2위하고 내년에 우승하겠다. 뭐 그런 음모.”
“수원아,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아. 게다가 오늘 어차피 너희 이겼잖아······. 아니, 인간적으로 망할 최꼴등은 오늘 같은 날은 그래도 좀 최으뜸 모드로 던져줘야 하는 거 아니니? 수원이 너도 안 나오는 경긴데 말이야.”
“그러니까. 쪼유는 홈런을 치지를 않나. 마린스는 마린스답지 않은 경기력으로 승리하지를 않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지금 이 무더위에 나만 퍼진 거야?”
“그러니까. 오늘 유진이가 또 안타를 치더라? 그래, 뭐 홈런 맞은 것보단 나아. 낫긴 나은데 그래도 최꼴등 걔는 2할 4푼짜리 포수한테 왜 도망치다가 카운트 몰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복판에 던지는 멍청한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오늘 우리가 이겼으니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뭔가 나랑 상관없이 이긴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네.”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안 좋아. 최꼴뜽 걔는 왜 수원이 너 없는데도 경기를 이렇게 말아먹은걸까? 아니, 그래도 인간적으로 너 출장 안 한 경기에서라도 이겨야 루징이라도 할 거 아니야. 이러다가 수원이 너 남은 두 경기 다 나오면 또 스윕패당할 꺼잖아. 대체 이런 기회를 놓치면 어쩌라는 거야. 이래서 가을에 야구 하겠어?”
얼마 전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 덕분일까?
박은진과의 영상통화는 어색하지 않았다. 뭐 조금 각자 할 말만 늘어놓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어차피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한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수원아.”
“어?”
박은진이 갑자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게다가 오늘 낮에 녹화하고 돌아왔는지 화장도 아이돌 화장인 게 확실히 학교 다니던 시절에 보던 얼굴과는 사뭇 달라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별 건 아니고 너 혹시 내일이랑 모레 시간 괜찮아?”
“시간? 갑자기 시간은 왜?”
“아니, 내가 내일이랑 모레 시간이 좀 비어서. 너만 괜찮으면 데이트하자고. 너 이번에 MVP 받아서 차도 받았다며 같이 동해안 드라이브 어때? 1박 2일로. 참고로 이거 유혹이야.”
“은진아······.”
잠깐의 침묵. 내가 씨익 웃었다.
“박은진 너 연기 진짜 못한다. 하긴 뭐, 유혹도 해본 사람이나 해보는 거지. 야. 어떻게든 내일이랑 모레 경기 나 출장 막아서 피닉스 좀 이기게 해보려는 티 엄청나거든?”
“······. 그렇게 티 많이 났어? 나 연기쌤이 그래도 연기에 재능 있다고 그랬는데.”
“그 선생님 캐피탈리즘에 너무 충실하셨네. 난 그 선생님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게다가 나 차는 있는데 면허가 없어.”
“진짜? 수원이 너 미국 가려면 면허 필요한 거 아니야? 미국에서는 면허 따는 거 더 힘들지 않아?”
“어, 힘들지. 그래서 안 그래도 이번 시즌 끝나면 면허 따려고.”
그렇게 쓸데없는 잡담들이 거의 1시간 가깝게 쭉 이어졌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야, 박은진 너도 얼른 씻고 자야지. 아직 화장도 안 지웠는데.”
“뭐야? 나 화장한 건 어떻게 알았어?”
“야, 그걸 어떻게 모르냐.”
“하여간 최수원 이상한데서 쓸데없이 섬세하다니까.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그 섬세함 발휘도 못 하면서.”
“아무튼 이만 끊는다.”
“잠깐만!!”
박은진이 갑자기 스마트폰에 바짝 다가왔다.
“나도 가끔 그래. 팀에 다른 멤버가 예능 같은 거 나가서 활약하고 팀 이름 알리면 분명 나한테도 좋은 건데 기분 묘해지고. 그거 너무 당연한 거야. 근데 수원아. 그 멤버가 예능 나가서 그렇게 활약할 수 있는 것도 다 우리가 같이 열심히 했기 때문이야. 지금 마린스가 너 없이도 그래도 사람같이 야구 하는 것도. 쪼유가 안타도 치고 홈런도 치고 그런 것도 다 네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야, 뭐냐. 갑자기 전화 끊기 직전에 이 오글거리는 대사는.”
“나도 오글거리는 거 알거든? 그래서 아까 이야기 안 하고 지금 전화 끊기 전에 이야기해 주는 거거든? 아무튼 나 그럼 이제 끊는다!!”
***
피닉스와의 2차전과 3차전.
나는 모두 지명타자로만 경기에 출장했다.
[시리즈 스윕!! 파죽지세!! 마린스 이대로 시즌 1위 굳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