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97화 (197/305)

197화. 고비(3)

한 손을 높게 번쩍 들고 그라운드를 도는 최수원을 바라보며 이규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픔과 부러움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감정을 가득 담아서.

최근 보름은 그에게도 상당히 힘든 기간이었다.

지난 올스타전의 예고 홈런.

관중들은 환호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아니, 그걸 단지 그뿐이라고 할 순 없긴 하지······.’

그래, 관중의 환호는 프로야구의 가장 큰 것이다. 프로 야구란 결국 그 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결국 플레이를 하는 것은 선수들이라는 점 역시 무시할만한 요소가 아니다. 또한 그들 역시 사람이며 사람은 때때로 이성보다 감정이 더 앞설 때가 있는 법이다.

최수원은 투수다.

그것도 심지어 마운드에서 무려 160짜리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다. 생각을 조금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빈볼을 맞췄을 때 돌아올 보복구가 어떨지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예고 홈런이라는 녀석은 그런 ‘생각’을 마비시킬 만큼 강렬했다. 게다가 차라리 피닉스의 임광형 본인이 이를 갈면서 보복구를 던지겠다고 하는 거라면 이규만이 수습하는데 그렇게까지 애를 먹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광형이라는 선수를 존경하는 피닉스의 팔팔한 애송이들까지 어떻게 컨트롤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피닉스와 블레이즈 정도에서 끝난 것은 이규만이라는 선수가 그만큼 모든 팀에 존중을 받는 KBO의 가장 오래됐으며 가장 위대한 커리어를 남긴 선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최수원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 신인 시절에는 다 혈기가 좀 왕성한 법이다. 이규만 본인도 젊었을 적에는 관중석에서 누가 술 잔뜩 취해서 그를 향해 못 한다고 욕하면 마주 보고 대거리 질도 좀 하고 그러지 않았던가.

-부웅!!!

“스트라잌!! 아웃!!”

노형욱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본래 7, 8월 한여름의 성적이 좀 좋지 않던 노형욱이다. 올해는 올스타전 직전까지 불방망이를 휘두른 탓에 그걸 극복한 건가 싶었는데 올스타전이 끝나고 귀신처럼 타격감이 떨어졌다. 물론 걱정은 하지 않는다. 노형욱은 이미 리그 최정상급 타자로 자신만의 루틴이 있는 타자다. 결국 9월이 넘어가면 또 자신의 페이스를 찾는다. 이미 선두권을 달리는 마린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10월 이후였다.

[1회 초 2:0,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5번 타자 이규만이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이규만 자신은 어떠한가.

작년 그는 0.222/0.296/0.418의 타격 성적을 기록했다. 팀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OPS였다. 물론 동시에 그가 야구를 시작한 이래 최악의 성적이기도 했다. 은퇴를 결심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올 시즌 지금까지 성적은 0.221/0.278/0.399. 설마 더 내려갈 곳이 있을까 했었던 작년보다 더 심각한 성적이었다. 유일하게 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타율 정도였다. 그는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몸을 관리했다. 실제로 가장 더운 여름이 찾아온 지금도 몸 상태는 매우 훌륭했다.

마운드의 김새한이 와인드업했다.

초구.

바깥쪽 아슬아슬하게 꽉 찬 코스.

-뻐엉!!

“스트라잌!!!”

흘려보냈다.

이규만은 전성기의 자신을 잊지 못했다.

나이가 먹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으나 주루를 빼고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자신을 버리지 못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보이는 공과 그리 나쁘지 않은 컨택이 그것을 도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KBO의 타격과 관련된 거의 모든 지표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위대한 타자조차도 리그의 평범 이하로 만들어 버린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하게 꽉 찬 코스.

약간 빠지는 공이었다.

하지만 앞선 공과 마찬가지로 전성기의 이규만이었다면 그대로 잡아당겨서 담장을 넘겨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 앞선 타석의 최수원처럼 말이다.

하지만 흘려보냈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올 시즌 팀의 많은 선수들이 커리어하이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린스는 매우 꾸준하게 하위권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서 최고 수준의 유망주들을 긁어 모았으니까.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질 수 있다. 그래, 최수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재능은 분명 그런 특별한 트리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저 서른한 살의 노형욱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앞선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난 녀석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녀석의 성적은 분명 커리어 하이였으니까. 숨겨진 재능을 터트린 것이 아니다. 서른한 살에 110억 타자다. 그런 숨겨진 재능 따윈 남아있지 않다. 노형욱은 그저 등을 보이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 저 압도적인 질주를 페이스메이커 삼아 꾸역꾸역 달린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규만 자신은 어떠한가.

세 번째.

몸쪽 깊숙한 코스.

-뻐엉!!!

이규만이 크게 몸을 뒤로 피했다.

볼카운트 2-1.

그에게 최수원이라는 특별한 천재에 자극을 받고 그것을 기폭제 삼아 나아갈만한 무언가가 있는가. 과연 그 압도적인 질주를 페이스메이커 삼아 꾸역꾸역 달려 나갈만한 힘이 그에게 있는가.

네 번째.

살짝 몰린 공.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2-2.

이규만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호흡을 골랐다.

대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운다. 그 잠깐의 시간에도 이미 습식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전신이 끈적하다.

‘없다.’

늙은 그에게는 최수원이라는 특별한 천재를 기폭제로 삼을만한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이미 다 소진되어 저 지나간 시간 속에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을 뿐이다.

또한 그에게는 최수원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질주를 꾸역꾸역 따라 달릴 힘 따위는 이제 없었다. 그것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 다 닳고 소진되어 남은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말하는 허망한 ‘명성’뿐이다.

다섯 번째.

꽉 찬 코스.

-뻐엉!!!!!

그렇기에 참았다.

삼진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강한 마음으로.

그가 아직 쓸만한 타자임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숫자.

0.221이라는 타율이 거기서 더 무너질 것을 각오한 채로.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볼카운트 2-3. 풀 카운트입니다.]

그렇다면 이규만 자신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저 지나간 시간 속에 ‘그’라는 위대한 타자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

그 기록이 만들어주는 압도적인 명성.

그렇다면 진정 그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인가.

여섯 번째.

마운드의 투수가 공을 쥐었다.

풀카운트.

과거 이규만이라는 타자를 상대했던 투수들은 그와 같은 카운트에서 도망가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마치 최수원이라는 괴물에게 볼넷을 내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처럼.

하지만 지금 이규만이라는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들은 어떠한가.

리그의 속구 평속이 147km/h를 웃도는 2027년.

최고 151km/h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선발투수 김새한이 힘껏 공을 뿌렸다.

149.7km/h의 강속구.

만약 존을 사 등분 한다면 바깥쪽 낮은 코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한복판에 더 가까운 어딘가.

어디로 오는 공이건 다 칠 수 있는 컨택을 버렸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홈런 타자가 아닌 갭히터로 정의 내리던 생각도 버렸다.

그 위대했던 기록과 명성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리하여 그 모든 위대함이 사라진 빈 자리에 남은 것은 23년의 커리어 동안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불쌍한 늙은 프랜차이즈였다.

분명 이규만에게는 더 이상 재능도 그 재능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뒤를 보지 않고 우승이라는 골을 향해 질주하는 천재의 등에 업혀서라도 우승을 경험하고 싶다는 저열한 마음뿐이었다.

존을 좁혔다.

스트라이크 존 밖의 공도 뻥뻥 쳐 내던 과거의 영광은 진작에 버렸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를 더 버렸다. 그것은 존 안에 들어오는 공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자존심이었다.

좁히고 좁혀 그야말로 딱 사람 머리통만 하게 좁혀버린 작은 존.

그 작은 존의 어딘가를 스치는 공을 향해 그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것은 우승행 열차의 끝을 움켜쥔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한 늙은 타자의 발버둥이었다.

-딱!!!

[쳤습니다!! 우익수 카를로스 에드윈 빠르게 달립니다!!]

살짝 낮았다.

원하던 타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규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우익수앞 땅볼로 유명한 그였지만 모든 우익수앞 타구가 땅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오늘 그리핀즈의 우익수가 빼어난 수비로 유명한 외국인 용병이며 1루수는 포구 귀신 소리를 듣는 채창식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1루를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렸다.

느렸다.

그것도 매우 느렸다.

본래도 느렸지만, 그 많은 기록을 세우는 동안 쌓이고 쌓인 부상의 결과물로 망가진 무릎이 그 느린 발을 한층 더 느리게 만든 덕분이었다.

남미에서 건너 온 용병이 달려 나오던 자세 그대로 원바운드 된 타구를 깔끔하게 잡아냈다. 중간에 머뭇거리는 동작 따윈 없었다. 유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세 걸음.

어느새 글러브에서 뽑혀나온 공에 그 달려나오는 속도가 더해졌다.

그야말로 쏜살같은 송구.

1루수 채창식이 그 공을 매우 부드럽게 받아냈다.

-뻐엉!!!!

고작 27.432미터의 짧은 달리기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질주의 결과물이었다.

“세이프!!!”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

남들이라면 여유롭게, 이주혁이나 조유진 같은 녀석들이라면 2루에서 홈까지도 충분히 들어올만한 타구에 간신히 만들어낸 단타.

이규만이 불끈 쥔 주먹을 높이 들었다.

최수원의 홈런 세러머니와 비슷했지만, 그 세러머니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이규만이라는 타자가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꿔 이뤄낸 무언가에 대한 존중이었다.

1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추가점 없이 잔루 1루로 끝났다.

***

“자, 깔끔하게 막아보자!!”

땀으로 범벅이 된 42세의 노장이 크게 소리쳤다.

사실 규만 선배의 바로 뒤에 타석에 올랐던 서경준이 내야 뜬공으로 물러난 만큼 결과적으로 보면 규만 선배가 보여준 그 질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주였다.

“자자, 파이팅!!!”

하지만 대체 누가 그 질주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덥고 습하고 불쾌지수가 아주 천장을 뚫어버릴 것 같은 7월의 마지막 날.

덕아웃을 나가는 팀원들 가운데 인상을 쓰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규만 선배는 장담하는데 좋은 코치나 좋은 감독이 되기도 힘들 것이다. 그는 그냥 야구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러니 후배들에게 야구에 관해서 뭔가 팁을 주기도 좀 애매했다.

하지만 모든 베테랑이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물려줄 필요는 없었다.

때때로 전설적인 업적을 쌓아 올린 베테랑은 그저 바닥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이 타오르는 분위기를 한층 더 격렬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아,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날씨가 너무 더러운 거 아닌가?”

38.1도.

습도는 72%

미친 무더위 속에 내가 마운드 위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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